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다의별 Nov 14. 2023

엄마를 위해 사원까지 짓지는 못하겠지만

캄보디아 여행 4 - 앙코르와트 타프롬 사원

자야바르만 7세 앙코르와트 유적지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몇 번이고 들었을 이름이다. 그는 불교 신자로, 기존 힌두교였던 캄보디아의 국교를 대승 불교로 바꾸었다. 하지만 시엡립의 유적들에는 그가 힌두교를 배척하지 않고 두 가지 모두 통합하려고 노력했던 흔적이 선명하게 보인다. 오히려 반대로 그가 죽은 뒤에는 힌두교가 부활하면서 그가 세웠던 불상들이 많이 훼손되었다. 참고로 이후로는 소승 불교가 자리를 잡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자신의 신앙심으로 특정 종교를 배척하지 않은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자야바르만 7세는 지금까지도 캄보디아에서 성군으로 인정받는 위대한 왕이다. 그리고 보통 그런 위대한 왕들이 그렇듯, 그는 효자였던 모양이다. 앙코르와트 북서쪽에 위치한 타프롬 사원은 그가 자신의 어머니께 바친 사원이고, 그 북쪽에 위치한 프레아 칸 사원은 자신의 아버지께 바친 사원이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이름과 더불어 자신의 부모의 흔적 또한 영원히 남게 했다.


크메르의 왕이 자신의 엄마를 위해 지은 사원을, 나는 나의 엄마와 함께 들어가 보았다.



나는 부모님과 여행을 무척 잘 다니는 편이다. 주변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부모님과 함께 하는 여행에는 눈물, 짜증, 반성이 반복되는 드라마틱한 에피소드가 많다고 한다. 우리도 물론 우리만의 드라마는 늘 있지만, 그런 흔한(?) 가족여행 드라마는 거의 없다. 그러고 보면 상대적으로 순조로운 여행을 하는 편이긴 한가 보다.

그러다 보니 가끔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부모님과 함께 그렇게 여행을 잘 다닐 수가 있느냐고. 모시고 다니다 보면 스트레스받지 않느냐고.


그런데 사실, 일단 '모시고 다닌다'는 표현부터가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 나 없이도 두 분이서 잘 다니시는데, 내가 굳이 모실 필요는 없으니까. 국내여행은 오히려 아빠가 운전 못하는 나를 모시고 다니는 것이나 다름없고, 해외여행의 경우 내가 주도는 하지만 그렇다고 부모님이 온전히 내게만 기대시진 않는다. 두 분 모두 해외 현지의 조건과 변수들에 너무나도 쉽게 적응하시고, 기본적인 영어도 충분히 하실 수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엄마는 심지어 5주간 남미 여행 중에도 한식을 두 끼만 드시고도 거뜬하셨다. 심지어 그중 한 번은 내가 먹자고 해서 먹은 것이었다.


그러니 부모님과 함께 잘 다닐 수 있는 비결 같은 건 내게 없다. 오히려 함께 문제없이 여행을 잘 다닐 수 있는 건 부모님 덕이 크다. 무던한 부모님, 꼭 한식을 드시지 않아도 되는 부모님, 나 없이도 잘 여행하시 부모님. 그렇다면 나도 부모님을 위해 뭐라도 하나 지어야 할까?



15세기 크메르 제국의 몰락 이후 사실상 크메르 유적지들은 모두 방치되고 정글 속에 파묻혀 있다가, 19세기가 되어서야 다시 발견되었다. 모든 사원들이 발견 당시 장엄했겠지만, 그중에서도 타프롬 사원은 특히 더 독보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잊힌 시간 동안 사원의 틈 사이사이로 나무뿌리들이 타고 들어가 사원과 한 몸이 되어 자란 모습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사원 보존을 위해 나무를 떼어내 보려는 시도도 있었다고는 하나,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고 있어 분리할 경우 사원도 함께 무너질 우려가 있어 결국 이렇게 계속 공존하게 되었다. 나무들이 사원에서 자라난 모습은 자야바르만 7세의 마음이 피어나는 모습 같기도 했고, 그 마음에 화답하는 자야바르만 7세의 부모인 다란인드라바르만 2세와 스리 자아라자쿠다마니의 마음 같기도 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생각하는 마음이 어떠한 형태로든, 누구라도 볼 수 있게 두고두고 남는다는 건 근사한 일이다. 아주 조금은 부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나는 12세기의 왕이 아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딸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지금처럼 같이 여행도 다니고, 뮤지컬도 보러 가고, 낯선 외국의 요리를 맛보러 가는 일. 부모님께 어떠한 장소를 바칠 수는 없지만,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장소 최대한 많이 선사해 드리는 일. 그건 내가 할 수 있다.


나의 마음이 이 사원들처럼 몇 세기에 걸쳐 남아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럴 필요는 없다고,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마음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현존하는 지금, 지금 이 순간에 있는 것이 중요하니까. 우리가 함께 하는 이 시간 동안만 한껏 남아있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러 오셨어요, 배우러 오셨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