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주 D-1
볼 때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시가 있다. 이정록의 '서시'다. 내가 좋아하는 안도현 시인이 직접 좋아하는 시들을 엮어 만든 책이 있는데, 그 속에서 발견한 시다. 너무나 간단하여 언제라도 외울 수 있다.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 이정록, '서시'
나는 고생을 많이 하지 않았다.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비교적 좋은 형편 속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고 심각한 좌절을 느껴본 적도 없다. 좋은 가족과 좋은 친구들, 운이 좋았던 선택들로 만 28년 간의 인생은 대체로 순탄했다. 그래서 나는 가끔 '고생을 좀 해봐야 할 텐데'라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여행길을 고생길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장기여행은 곧 생활이기 때문에 설렘만을 기대할 수는 없다. 일상 속에서 느끼는 모든 감정의 굴곡들을 매일 다른 무대에서 겪게 될 것이다. '다른 무대'라는 대목은 나를 한없이 설레게 만들지만, 동시에 '매일'이라는 대목은 나를 두렵게 하기도 한다.
여태껏 내가 가장 길게 해본 여행은 고작 2주였다. 그래서 지금 나는 한 달 후의 내 모습조차 상상이 가지 않는다. 어떤 모습이든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떠나고 싶어서 포기하면서도 행복했던 마음을.
내 성한 몸에 빛나는 흠집들이 여럿 생기기를.
세계여행 이야기는 매거진 <안녕 보고 싶었어> (brunch.co.kr/magazine/249days)에서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