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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Mar 26. 2024

먼 길을 떠날 때 꼭 필요한 것

슬로베니아에서 크로아티아로 가는 길

8시간짜리 여정과 13시간짜리 여정 중 무엇이 더 힘들까? 똑같이 버스로 이동하는 것이라고 가정할 때, 당연히 13시간짜리 여정이 더 힘들 거라고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더 고려되어야 할 요소들이 있다.



몇 년 전, 슬로베니아 여행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크로아티아로 이동하는 날이었다. 버스 홈페이지에 따르면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Ljubljana)에서 크로아티아 해안 도시 풀라(Pula)까지는 5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했다. 자동차로 쉬지 않고 갈 경우에는 3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이지만, 여러 도시에 정차하는 버스의 노선을 고려할 때 5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꽤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정보 같았다.



그런데 배낭을 메고 류블랴나의 버스 터미널로 걸어가던 길,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2시 50분 출발 예정이던 크로아티아행 버스, 1시간 30분 지연'


그렇다면 4시 20분에 출발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버스 시간이 다시 앞당겨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나는 터미널 근처에서 기다렸다. 터미널 안에는 앉을 곳이 없어서 길바닥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 사이에 걸터앉았다. 그러나 지연 문자는 계속되었고, 최종적으로 받은 문자는 절망적이었다.


'2시간 35분 지연'


계속 이렇게 야금야금 지연되다가는 오늘 내에 출발하지도 못할 것 같았다. 매표소 직원에 문의해 기존 표는 환불을 받고, 오후 4시 10분에 출발하는 다른 버스표를 구입했다. 하지만 다시 예매한 버스도 5시가 다 되어서야 터미널에 도착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두 버스 모두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Zagreb)에서 출발해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에 와서 승객들을 태우고 다시 크로아티아로 되돌아가는 기나긴 노선이었다. 그러니까 두 대 모두 국경을 넘어오느라 이토록 오래 지연이 된 것이었다.  두 국가 간의 국경을 넘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실제로 버스 회사가 안내한 것처럼 5시간 만에 류블랴나에서 풀라까지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걸, 그때까지는 알지 못했다.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아무튼 그때는 5시간 후면 무사히 도착할 거라고 믿고, 버스 탑승 후 마음을 놓고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잠도 스르르 왔다. 그렇게 잠이 들 무렵, 버스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Trieste)에 멈춰 섰다.


"모두 내려서 다른 버스로 갈아타셔야 합니다. 행선지 확인하세요."


기사의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나는 사실 그 버스가 이탈리아를 경유하는 줄도 몰랐는데, 갑자기 내려서 갈아타라고 하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다행스럽게도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고, 모두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앞쪽에 앉아 있던 몇몇 사람들은 사라진 버스 기사를 찾으러 갔고, 어떤 사람들은 지나가는 터미널 직원을 불러 상황을 물어보았다. 나를 포함해 뒤쪽에 앉은 나머지 사람들은 버스에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답을 기다렸다.


다행히 기사가 잘못 이해한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그 버스는 그대로 크로아티아까지 가는 것이 맞았고, 버스 기사만 교대가 되는 것이었다. 잠깐의 혼란은 어이없는 해프닝으로 종료되었다.


'크로아티아 한 번 가기 되게 힘드네.'


출발 전부터 계속되는 우여곡절에 피곤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버스를 갈아타지는 않아도 되니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하지만 그때 내가 알지 못했던 건, 그것이 버스에서 내려 바깥공기를 마실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자 화장실에 들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는 것이다. 우왕좌왕하는 통에 나는 두 가지 기회를 모두 놓쳐버렸다.



버스는 트리에스테를 마지막으로 단 한 번도 서지 않는 버스였다. 승객들은 모두 꼼짝없이 버스 안에 갇혀있어야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트리에스테를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 내부에 있는 화장실마저 고장 나 버렸다. 조금 전까지 멀쩡해 보였던 버스가 망할 고철덩어리로 전락해 버리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창문은 처음부터 열리지 않았지만 누구도 크게 불평하지 않았는데, 화장실 때문인지 어디선가 퀴퀴한 냄새가 나면서부터는 다들 창문을 깨부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다. 아이들은 곳곳에서 울기 시작했고, 버스는 점차 고문의 현장이 되어갔다.


빨리 가도 모자랄 판에, 도로는 갈수록 더 꽉 막혀버렸다. 국경에 가까워지면서부터 도로가 왕복 2차선으로 좁아진 것이었다. 그때부터는 '기어간다'는 표현도 후할 정도가 되었다. 밖이 깜깜해지도록 우리는 국경조차 넘지 못했다. 나는 애초에 저녁 8시 전에 도착할 생각으로 낮 버스를 예약한 것이었는데, 도착 예정시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식사도 못한 것은 물론 화장실에 가고 싶어질까 봐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그나마 옆자리에 앉은 슬로베니아 여고생의 휴대폰을 충전해 주면서 지루함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보조배터리로 휴대폰을 두 번이나 충전했고, 내게 조심스레 도움을 요청한 죠나는 내 노트북에 겨우 충전할 수 있었다. 죠나 덕분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간 국경 넘기가 워낙 힘든 일이라는 걸, 이 버스는 늘 이렇다는 걸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국경


밤 11시, 드디어 버스가 출입국 관리소에 다다랐다. 탑승객 전원이 내려서 직접 여권 검사를 받아야 했으므로 평소 같으면 귀찮은 일이었지만, 그날은 모두가 반겼다. 잠깐이면 될 일을 그 누구도 서두르지 않았다. 창문도 열리지 않는 버스에서 6시간 만에 한 탈출이었다. 게다가 그때를 이용해 많은 사람들이 수풀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왔다. 나는 그럴 힘조차 없었는데, 불행 중 다행인지 물을 거의 안 마시지 않아 필요를 느끼지도 않았다.


그렇게 전원 입국 심사를 마치고 무사히 크로아티아에 진입했다. 그리고 버스 탑승 8시간 만인 새벽 1시, 나는 드디어 풀라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류블랴나의 터미널에서 기다린 시간까지 생각하면 사실상 10시간은 걸린 셈이었다.


새벽 1시, 풀라 원형경기장 앞에서 내렸다


사실 나는 그보다 긴 이동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방문하기 두 달 전, 나는 아프리카에서 트럭킹을 하고 있었다. 트럭킹은 버스로 개조한 트럭을 타고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을 이동하며 여행하는 방식인데, 하루에 짧게는 대여섯 시간부터 길게는 12, 13시간까지도 차 속에 앉아 이동했다. 그 긴 시간을 나는 때로는 그곳에서 사귄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게임을 하며 보내기도 했고, 혼자 노래를 듣거나 잠을 자면서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5주를 보냈다.


그걸 생각하면 8시간, 10시간은 정말 별거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13시간이 걸릴 것을 예상하고 출발하는 것과, 5시간이 걸릴 거라고 예상했는데 2시간을 대기하고 또 8시간을 달려가는 건, 그 시작부터가 다른 일이었다. 8시간 동안 제대로 내리지도 못한 것 또한 엄청난 고통이었다. 아프리카에서는 2시간에 한 번씩은 정차해 바람을 쐬고 풀숲에서라도 볼일을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바꿔 말하면, 아무리 멀고 험한 길일지라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면 괜찮다는 걸 배웠다. '쉬울 거야'보다는 '힘들지만 괜찮을 거야'라는 마음. 먼 길이 될지 짧은 길이 될지는 일단 출발해 봐야겠지만, 마음의 준비는 언제나 먼 길을 예상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Hope for the best, plan for the worst.’ (최선의 결과를 기대하되, 최악의 결과에도 대비하라.)


굳이 최악의 경우까지 미리 생각하고 대비책을 세워야 하나 싶어서 평소 아주 좋아하는 말은 아니지만,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굳이 세세하게 계획까지 세우는 건 아니어도, 마음만이라도 단단히 가지면 중간에 덜 지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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