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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Apr 02. 2024

고작 말 한마디

동네 마을버스에서

어느 저녁, 나는 동네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날따라 사람이 많지 않아서,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승객이 좌석에 앉아있었다.


"이번 정류장은 백합마을, 백합마을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진영아파트입니다."


내내 고요했기에 아무도 내리지 않는 듯하였으나, 백합마을 정류장에 서기 약 10초 전에 '삐-' 소리가 났다. 뒷문 바로 앞에, 꽉 찬 장바구니를 발 앞에 두고 앉아계시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벨을 누르시자마자, 깜짝 놀란 듯 '어이쿠'하는 소리를 내셨다. 벨을 누르다가, 손에 쥐고 있던 교통카드를 어딘가에 떨어뜨리신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앉은 채 자리 이곳저곳을 눈으로 훑으셨고, 나를 포함해 근처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함께 바닥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도 카드를 발견하지 못했고, 버스는 금세 백합마을 정류장에 정차했다. 정차하자마자 할머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셔서 카드 탐색을 이어가셨다.


그 사이, 버스 기사님이 백미러를 통해 버스 내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신 듯했다. 분명 하차벨은 눌렸는데 아무도 내리는 사람은 없었으니, 의아했을 것이다. 기사님은 바로 자리에서 나와 할머니 근처로 다가가셨다.


"할머님, 뭐 잃어버리셨어요?"

"아니 글쎄 카드가, 여기 어디 떨어진 것 같은데 못 찾겠네."


기사님이 할머니께서 바닥에 두신 장바구니 안을 살펴보려 하자,


"아냐, 딱 소리가 났어, 딱 소리가."


라며 할머니는 계속 고개를 숙인 채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셨다. 기사님도 함께 주변을 살펴보시더니, 할머니께 자리를 잠시 비켜달라 하셨다. 그리고는 쭈그리고 앉아 의자 시트를 들어 올리셨다. 카드는 그 속에 박혀있었다. 기사님은 카드를 집어 할머니께 드리고 의자 시트를 다시 바로 하셨다.


"아, 그래서 딱 소리가 났구먼."


할머니는 카드를 받고,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다시 자리에 앉으셨다. 다시 운행하기 위해 자리로 되돌아가시던 기사님은 자리에 도로 앉으시는 할머니를 보시고는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내리시는 것 아니셨어요?"

라고 여쭤보자, 할머니는 당당하게


"나 진영에서 내리는데?"

라고 답하셨다.


그때 3초간 할머니를 쳐다보던 기사님의 표정을 나는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다. 그 표정에는 황당함과 당혹스러움을 넘어, 억누르고 있는 기사님의 짜증까지도 복합적으로 서려있었다. 운전석까지 비워가며 도와주신 기사님에 대한 감사도, 잘못 누른 하차벨과 꽤나 낭비된 시간에 대미안함도 없으셨던 할머니의 태도는, 나를 포함한 주위 다른 사람들까지도 허탈한 웃음을 짓게 했다.



그날 저녁의 할머니 승객에 나는 그동안 알고 지냈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대입되었다. 그중에는 '이런 것까지 굳이 미안하다 말로 해야 해?'라던 사람도 있었고 '맙단 말은 서로 스럽잖아, 말 안 해도 알' 라던 사람도 있었다. 상대방의 배려와 노력을 오로지 '내' 기준으로만 결론짓는 듯했던 이들이다.


누군가는 말 한마디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로 표현되지 않은 마음은 오해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듣지 못한 진심을 누가 알아줄까? 적어도 내 주변에는 독심술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없다.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현하는 일은 상대방의 노력을 가장 담백하게, 그러나 가장 확실하게 인정해 주는 일이다. '내가 당신의 배려와 인내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많은 문제들은, 그 점을 잊지 않고 말해주는 것만으로 해결되기도 한다.



가끔 비행기에서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을 마주다. 당연하게도, 장시간의 비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얌전하게 앉아 가는 아이는 매우 드물다. 아니, 없다. 그러니 그런 가족들이 내 뒷자리에 앉면, 아이가 내 좌석을 내내 발로 차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한다. 당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건 정말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같은 일도, 말 한마디가 남은 여정의 기분을 좌우한다.


내가 뒤를 돌아보자 대뜸, '애가 신나서 그래요.'라고 했던 부모가 있었던 반면, 내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먼저 '주의는 시키고 있는데 죄송합니다'라고 했던 부모도 있었다. 내릴 때까지 발로 차인 건 동일했지만, 적어도 후자의 경우에는 화가 나지는 않았다. 내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나 역시 그 가족을 존중할 수 있었다.


돈도 시간도 들지 않는 '고작 한마디'이지만, 때로 상대방에게는 그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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