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알라룸푸르를 떠나며
쿠알라룸푸르 시내는 여행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둘러보게 되었다. 베이스캠프로 삼았던 도시를 여행 끝자락에야 천천히 탐방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사실 나는 그게 오히려 좋다. 며칠간 조금씩 쌓아온 관심을, 마지막 날 정리하듯 채워 넣을 수 있으니까.
마지막 조식을 든든하게 먹고, 우리는 국립모스크로 향했다. 푸트라자야의 핑크 모스크에서 두꺼운 로브를 입었던 그 뜨거운 기억 때문에 걱정했는데, 다행히 이곳에서 대여해 주는 옷은 훨씬 가벼웠다. 핑크 모스크의 분홍빛과 달리 바다의 빛깔을 담은 듯한 파란 지붕과 타일이 눈에 띄게 아름다운 모스크였다.
모스크 안으로 들어가니 한 봉사자 분이 다가와 직접 설명을 해주겠다고 했다. 영국 출신이라는 그분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독실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무신론자였다고 했다. 그러다 세계를 여행하던 중 지금의 남편을 만나 말레이시아에 정착하게 되었고, 무슬림으로서 30년 넘게 살아왔다고 했다.
기독교와 천주교, 이슬람교는 모두 같은 뿌리를 공유하지만, 예수를 대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 이슬람에서는 예수를 신의 메신저 중 하나로 여기고, 마호메트를 마지막 메신저로 인정한다. 숭배의 대상은 오직 단 하나의의 신이며, 그 신의 모습은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조각상이나 화려한 그림을 만들지 않는다.
브라질 리우의 거대한 예수상과 그 아래의 빈민가 풍경을 떠올리면, 오히려 이런 방식이 더 담백하고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다만 기도할 때 옆사람과 팔과 어깨가 닿기 때문에 남녀의 자리가 구분된다고 하는 점은 여전히 아쉬웠다. 단지 그 때문이면 제단 기준 양쪽으로 나누어 서면 되는데, 여자들만 맨 뒤에 몰아넣는 건 차별로밖에 보이지 않으니.
어쨌든 친절한 설명 덕분에 세세하게 모스크를 살펴본 후, 걸어서 메르데카 광장으로 향했다. 길이 헷갈려 꽤 헤맸지만 결국 무사히 잘 도착해 '아이 러브 KL' 조형물 앞에서 사진도 찍고, 광장을 둘러싼 오래된 건물들을 구경했다. 이어서 센트럴 마켓으로 갔는데, 사고 싶은 건 없었지만 잭프룻을 손질하는 모습을 보며 잭프룻이 이토록 거대한 과일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되는 놀라운 수확(?)을 얻었다.
더운 바깥에서 시간을 보냈으니 이제는 시원한 실내 차례. 점심을 먹고, 서점 두 곳을 들러 당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지 얼마 안 되어 뜨거웠던 한강 작가의 책들을 구경하다 '소년이 온다' 영문판을 샀다. 계획에 없는 일이었지만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계획했던 일들도 물론 모두 끝냈다. 이전 투어에서 가이드로부터 추천받았던 땅콩크림 과자도 사고, 카페에 들러 마셔보고 싶었던 화이트 커피와 크리스마스 시즌 한정으로 보이는 초콜릿 에그 타르트도 맛봤다. 달달하게 먹은 뒤에는 마사지를 받았다. 다른 동남아 국가들에 비해서는 그리 저렴한 가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합리적인 가격에 시원함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짐을 챙기러 호텔로 돌아가던 길,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우기였지만 머무는 내내 우산을 펼 일조차 없었는데, 마치 우리가 떠나는 순간을 기다린 듯 하늘이 한꺼번에 터져 내린 것만 같았다. 그간 좋았던 날씨가 특별한 행운이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첫 방문한 쿠알라룸푸르가 우리를 얼마나 환영해주고 있었는지를.
짧게 머문 여행이라 즐거움만큼 아쉬움도 남는다. 언젠가 다시 돌아가 또 다른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다. 쿠알라룸푸르에서든, 또 다른 도시에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