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빛부터 푸른빛까지

말레이시아 푸트라자야, 반딧불과 블루티어스

by 바다의별

272개의 계단을 오르내렸던 바투동굴을 떠나, 푸트라자야로 향했다. 쿠알라룸푸르 근교의 계획도시로, 우리나라 세종시도 푸트라자야를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푸트라자야에는 전 세계 디자인들을 본떠 만든 특색 있는 건물들이 굉장히 많다. 우리나라 국회의사당과 비슷한 모스크, 아이언 모스크라 불리는 곳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푸트라자야에서 우리나라 관광객들에게 가장 유명한 곳은 핑크 모스크다. 분홍빛으로 칠해져 있어 포근한 인상을 주는 곳이지만, 실제로는 포근함 보다는 끈적한 무더위의 기억만 남았다. 여자들은 모스크에 입장할 때 호그와트 마법사들이 입는 기다란 로브 같은 걸 입어야 했는데, 머리카락까지 가려야 해서 모자까지 뒤집어써야 하는 데다 옷감마저 도톰해서 너무 더웠다. 대여해서 입는 거라 전 세계 사람들의 땀냄새가 내게 닿는 동시에 나의 땀도 그 속에 섞이는 듯해 어쩔 수 없는 불쾌함을 느꼈다. 그래도 독보적인 색감의 모스크는 겉에서나 안에서나 예뻤다. 로브는 그렇지 못했지만.



모스크 관람을 마치고는 총리 관저를 밖에서 지나가며 보고, 언덕 위에 위치한 컨벤션 센터인 PICC에 가서 도시 전경을 한 번 내려다봤다. PICC 내부에는 졸업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학사모 쓴 사람들과 근사하게 차려입은 가족들이 많았다. 꽃다발도 굉장히 많이 사고파는 모습을 보았는데, 안에 꽃만 있는 게 아니라 인형들도 있어서 더 귀여웠다. 누군가는 여행하며 잠시 들른 곳이 누군가에게는 끝이자 출발을 경험하는 공간이었다. 그들이 마치 핑크모스크처럼 핑크빛 출발을 하기를.


푸트라자야를 떠나서는 앙코르와트 사원에 쓰인 돌들로 지어졌다는 힌두교 스리샥티 사원에 잠시 들르고, 원숭이들이 사는 몽키힐 입구에 가서 원숭이들에게 먹이를 줬다. 메인 일정인 바투동굴과 푸트라자야에 비해서는 인위적으로 끼워진 일정 같았지만… 새하얗게 조각된 스리샥티 사원은 아름다웠고, 수많은 원숭이들을 가까이에서 보는 일도 비록 겁은 났지만 새로운 경험이었다.



선착장으로 이동해 저녁을 먹은 뒤, 이날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위해 노을이 지기를 기다렸다. 하루 종일 시내에서 땀을 흘리다 강가 근처에서 저녁을 맞이하니 드디어 조금 서늘해졌다. 햇빛의 흔적이 많이 사라진 뒤 어둑해지는 하늘 아래 배에 올랐다. 어둠을 밝혀줄 빛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를 바라며.



강가 수풀의 반딧불은 우기 때 보기 좋고, 바다에 가까이 있는 블루티어스(마찰이 일어나면 푸른빛을 내는 플랑크톤)는 건기 때 보기 좋다고 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우기였다. 건기든 우기든, 둘 중 하나를 볼 확률은 높다는 거니까 괜찮은 확률로 느껴졌다. 둘 다 제대로 보진 못하더라도, 하나쯤은 볼 기회가 있다면 꽤 멋진 일이다.



먼저 반딧불을 보러 갔다. 가는 길, 눈앞에 거대한 보름달이 가까이 걸려있었다. 거기서부터 이미 곳곳에서 감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강가의 수풀에 다가가자 사람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크리스마스트리라는 별명에 걸맞게, 반딧불은 수풀 이곳저곳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배가 크지 않아 사람들은 배의 양쪽 일렬로 앉아있었는데, 먼저 반대편 사람들이 가까이에서 반딧불을 감상했다. 가까이 다가간 사람들의 설렌 경탄을 들으니 우리도 마음이 들떴다.



얼마 후 배를 돌렸고, 이제는 우리가 앉은 쪽이 수풀 근처로 다가갔다. 우기라 기대해 봄직하다고는 했어도 애써 큰 기대는 하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무슨 걱정을 했냐는 듯 예쁘게 반짝거렸다. 이렇게나 촘촘하게 여러 마리가 우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떤 반딧불이들은 불이 꺼진 배 안쪽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얼른 손으로 살짝 잡아보기도 했는데, 내 손바닥 위를 기어가는 촉감이 신기했다. 물론 곧바로 놔주었다.



우리가 다가가는 것과 떠나는 것과 상관없이 열심히 반짝이는 노란 반딧불을 뒤로하고, 이제는 바다 근처의 블루티어스를 찾으러 향했다.


플랑크톤이 강가로 거슬러 올라와야 볼 수 있는데, 우기 때는 자꾸만 비에 쓸려 바다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제대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당시 일주일 사이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고 했다. 기대를 내려놓고, 뜰채를 하나씩 받아 들었다. 뜰채를 물속에 담가 물을 모으면, 그 안에 모여든 플랑크톤들이 서로 닿아 빛을 만들어낼 거라고 했다.



뜰채를 물에 담근 채 배가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물속에는 정말 신기하게도 짙은 푸른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새까만 강물 안에서 이렇게 밝은 빛이 나온다는 게 신기했다. 마침 전날부터 비가 안 와서인지 플랑크톤들이 강으로 많이 올라온 듯했다.


조명처럼 빛나는 깊은 푸른빛은 뜰채 안에 담겨 초승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눈물 같다고 해 블루티어스라는 이름을 붙였을 테지만, 내게는 여전히 깊은 밤하늘의 초승달의 모습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하늘에는 노란 보름달이, 물속에는 푸른 초승달이, 그리고 수풀에는 노란 별들이 반짝이는 밤이었다.



푸른빛으로 시작해 푸른빛으로 마무리한 날이었다. 바투 동굴에서 깜깜한 동굴 천장 사이로 보인 하늘의 빛을 시작으로, 푸트라자야의 분홍빛을 거쳐 밤의 깜깜한 강물 속 푸른 플랑트콘의 빛을 마지막으로. 구경을 다 마치고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는, 저 멀리 쿠알라룸푸르 시내의 페트로나스 타워 전체가 약 2초 정도 파란 불빛으로 바뀌었다 하얗게 되돌아오는 모습도 보였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 조명 색 테스트 중이었다고 한다.


말레이시아를 밝히는 수많은 빛들을 만나, 결코 어둡지 않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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