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동굴, 빙하호수, 빙하해변
완벽한 하루를 마치고,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배정받은 방에 짐을 풀어둔 뒤 1층 식당으로 내려가니 가이드와 다른 일행들 대여섯 명이 앉아있었다.
게스트하우스 내 식당은 현지 물가 기준으로도 비싼 편이라, 싸 온 음식으로 방에서 적당히 때우는 일행도 있는 듯했다. 우리는 점심도 이미 차에서 대충 먹었는데 저녁만큼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어서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하루 종일 같은 장소에서 같이 감탄하고 같이 놀라고 또 같이 지치며 약간의 동지애가 형성되었다. 호주 멜버른에서 온 나이 든 부부는 이전에 다녀온 부산 여행을 이야기했고, 나는 멜버른 근교에 사는 친구 집 마당에서 캥거루를 본 이야기를 했다. 브라질에서 혼자 온 여자는 세계 여행 중이라고 하여 나 역시 추억들을 떠올리는 시간이 되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주문한 음식들이 차례차례 준비되었다. 엄마는 토마토 수프, 아빠는 대구 요리, 나는 닭가슴살 요리. 슬슬 서늘해지는 기온에 몸을 데울 만한 음식을 골랐다. 맛에 대한 기대는 크지 않았는데, 생각 외로 메인 요리도 함께 곁들여진 채소도 맛있었다.
만족스러운 식사 덕분에 전 세계를 누비던 대화가 다시 아이슬란드로 돌아왔다. 가이드와 함께 오늘 다녀온 곳들을 하나하나 다시 떠올려보다 보니, 새삼 그가 이 일에 얼마나 진심인지를 알게 되었다. 크베르누포스는 12시쯤에 무지개가 가장 예쁘게 걸려있기 때문에 시간을 맞춰 간 것이었고, 스비나펠스요쿨 빙하 역시 차분하고 예쁠 해 질 녘에 맞춰가기 위해 서둘렀다고 했다. 기회가 한 번뿐인 손님들이, 최상의 풍경을 보기를 바란다며.
"오늘 오로라는 있을까요?"
"가능성이 낮아 보이긴 하는데요. 그래도 졸리지 않으면 한 번 나가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오로라 지수는 낮은 날이었지만, 빛공해가 없는 시골이었으니 밑져야 본전이었다. 다만 차마 내내 깨어있지는 못하고, 일단 잠들었다가 알람을 맞춰놓고 다시 일어났다.
덜 깬 눈을 비비며 11시 반쯤 조용히 밖으로 나가보니, 추위 속에서 무장하고 나온 사람들이 꽤 보였다. 하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오로라를 발견하진 못했다. 숙소의 조명을 뒤로한 채 바닷가 근처와 뒤편의 산 쪽으로도 어둠을 헤치며 걸어가 보았지만, 오로라의 흔적조차 없었다.
대신 별이 있었다. 오로라의 활동이 더디다 해도, 다행히 하늘이 비어있는 건 아니었다. 자리를 지키며 반짝이던 별들을 사진에 담고는, 방으로 돌아와 마저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여전히 창밖이 어두웠지만, 수평선 멀리 태양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전날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둑해져서 충분히 즐기지 못했는데, 아침에 다시 보니 우리가 얼마나 기가 막힌 위치에서 밤을 보낸 것인지 새삼 느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10년 전에도 나와 내 친구는 같은 숙소에서 묵었다. 여행사도 다르고 이 지역 숙소들도 다양한데 어찌나 신기한 우연인지 모른다. 그때는 안개가 짙어서 주변 풍경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기억에, 새삼 이번 날씨 운에 더 감사해졌다.
오로라를 보지 못한 밤이 아쉬웠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아침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뒤에는 산, 앞에는 바다, 옆에는 빙하. 바닷가는 일출로 노랗게 물들었고, 설산도 햇빛을 받아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늦은 아침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에 따라 시간이 지날수록 하늘에는 구름도 많아졌지만, 그것 또한 아침햇살이 섞여 들어 아름다웠다.
10년 전에도 먹었을 게스트하우스의 조식을 먹고 출발한 둘째 날의 첫 목적지는 얼음동굴이었다. 얼음동굴 투어는 전문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야 해, 숙소 근처의 요쿨살론 빙하호수에서 현지 투어 차량으로 바꾸어 타고 출발하도록 되어있었다.
투어 출발 전 아침 햇살을 받은 빙하의 모습이 너무나도 멋졌다. 이곳은 얼음동굴에 다녀온 뒤에 본격적으로 구경할 것이었지만, 그때면 아마 비가 오기 시작할 것이었다. 찰나지만 환한 빙하호수를 미리 볼 수 있어 운이 좋았다. 그날의 마지막 햇살이었을지도 모르니까.
얼음동굴 투어는 출발부터 돌아오기까지 약 3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했는데, 그중 차를 타고 달리는 시간이 거의 2시간 소요되었다. 요쿨살론에서 1시간 넘게 울퉁불퉁, 란드만날라우가르 때보다도 거친 돌길을 차를 타고 들어갔다. 낡은 차량은 엉덩이 마사지를 하듯 우리를 튀어 오르게 했다.
그러다 내린 곳은 빙하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저 돌길, 아니 길조차 나 있지 않은 돌밭뿐이었다.
'여기에 얼음동굴이 있다고?'
이전에는 빙하트레킹을 해보았으니 이번에는 얼음동굴을 택한 거였는데, 얼음동굴 역시 약간의 빙하 트레킹은 필요하다고 들었다. 그러나 30분 넘게 눈앞은 돌밭뿐. 얼음에 가까워지면 아이젠이 필요할 것 같은데, 아무도 말이 없었다. 인솔자들의 짐을 보아도 이 많은 인원이 쓸 수 있는 아이젠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목이 올라오는 등산화가 필수라고 해서 여행 직전에 저렴한 걸로 사 오기까지 했는데, 아이젠도 각자 준비해와야 하는 거였을까. 그렇다기엔 사전에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혼자 이런저런 고민에 빠져있을 무렵, 인솔자의 "도착했습니다!" 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둘러봐도 여행사 홈페이지 속 푸른 동굴은 보이지 않았다. 인솔자가 가리킨 곳은 탁한 잿빛의 동굴 입구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얼음이 아닌 바위가 깎인 걸로 보이는 곳이었다.
네? 이게 다라고요?
나는 분명 예약 전에 10월에도 얼음 동굴을 볼 수 있는 건지를 문의했다. 온라인 정보상 11월부터가 적기라고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충분히 볼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러니 더 억울할 수밖에. 볼 수 없는 건 아니었지만, 우리가 기대한 건 이게 아닌데.
물론 '블루 아이스 케이브'에 다녀온 사람들 대부분이 '그레이 아이스 케이브'였다고 후기를 남기곤 한다. 맑고 투명한 푸른빛의 동굴 사진은, 기가 막힌 시간과 계절에 잘 찍어야 가능한 거라고.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했다. 동굴은 아주 짧은 터널 같았고, 좋게 말해야 그레이지 블랙에 가까웠다. 이게 다라니.
하지만 우리가 실망한다고 해서 갑자기 눈앞에 맑고 거대한 얼음동굴이 생기는 건 아니다. 애초에 오로라도 그렇지 않은가. 얼음 상황은 매일 바뀌기 때문에 빙하트레킹 코스도 매일이 다르다는데, 하물며 더 정교해야 할 얼음동굴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결국 여행자들은 그날그날 주어진 풍경밖에는 볼 수 없다. 같은 숙소에 묵어도 10년 전에는 안개만 보았던 것처럼, 그때는 스코가포스에서 무지개는 언감생심이었던 것처럼. 그날의 운, 계절의 운에 따를 뿐이다.
그래도, 이게 다라고 생각하고 보니 또 나쁘지 않았다. 처음에 느꼈던 허무함은 볼수록 신기한 감정으로 채워졌다. 오랜 시간 화산재와 얼음이 섞여 만들어낸 잿빛도 특별했고, 마치 누군가가 엄지손가락을 여러 번 찍어내어 만든 듯한 동굴의 벽면 모양도 특이했다. 입구는 마치 하트의 위쪽을 똑 떼다 놓은 모양 같았다. 볼수록 정이 갔다.
매끈하고 반투명한 동굴의 벽면을 계속해서 들여다보다, 어느새 되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도착했을 때는 '이게 뭐야' 싶었던 곳이, 막상 떠날 때가 되니 약간 아쉬웠다. 처음에 실망했던 게 생경할 만큼.
우리에겐 아직 빙하호수와 해변이 남아있었다. 다시 돌길을 한참 걸어 나와, 또 한 번 울퉁불퉁한 길 아닌 길을 차로 달려, 빙하해변인 다이아몬드 비치로 먼저 향했다.
자갈이 가득한 해변 위에는 크고 작은 빙하 조각들이 정박되어 있었다. 어떤 건 투명했고, 어떤 건 짙은 푸른빛이었다.
우리는 얼음에 뚫린 구멍을 액자 삼아 서로의 사진을 찍어보기도 하고, 어떤 얼음 위에는 앉아보거나 누워보기도 했다. 차가웠지만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모처럼 온 얼음세상에선 꼭 해보아야 하는 일들이었다.
이어서는 해변과 바로 맞닿아 있는 요쿨살론 빙하호수에 갔다. 아침 햇살은 사라진 뒤였지만, 아이슬란드의 우중충함은 그것대로 묵직한 멋이 있었다.
예전에는 수륙양용 버스를 타고 호수 안에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그 대신 호수 주변을 천천히 산책했다. 빙하를 가까이서 보는 것도 좋지만 멀리서 몰려있는 모양을 보는 것도 재밌었다. 내일은 또 다른 모양으로 모여있을 텐데, 그건 내일 올 관광객들이 즐길 몫일 테지.
산책 후에는 푸드 트럭에서 점심으로 양고기 햄버거를 사 먹었다. 비싼 데다 비까지 내려 먹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인생 햄버거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맛이었다. 빗속에서도 절대 눅눅해지지 않은 감자튀김도 최고였다.
호수도 해변도, 10년 전에도 보았던 풍경이지만 이 빙하들은 모두 처음 보는 것이다. 만약 10년 뒤 다른 계절에 얼음동굴을 다시 찾아가면, 또 전혀 다른 풍경의 전혀 새로운 추억이 생기겠지. 어쩌면 그때는 진정한 블루 아이스 케이브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오로라는 없었지만 별이 가득했던 밤과 발그레했던 아침, 기대에는 못 미쳤지만 볼수록 그 매력이 번져나던 얼음동굴, 흐렸지만 웅장했던 빙하 해변과 호수. 하나가 좋으면 하나가 아쉽지만, 하나가 아쉬우면 또 다른 게 좋을 것이다.
이곳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차에 올랐다. 전날 달려왔던 남부 해안길을 거슬러갈 시간. 일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조금씩 치던 빗발이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