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모래 해변에서 빙하까지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짚었다.
가이드였다. 레이니스피아라(Reynisfjara) 해변,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모르게 사진을 찍다가 바다 쪽으로 뒷걸음질 치고 있었던 거다.
아이슬란드의 해변에서 절대 하면 안 되는 일들이 있다. 바로 바다에 등을 돌리고 있는 것. 그리고 바닷물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것.
워낙 바람이 세고 거친 나라라 어디서든 엄청난 바람을 경험할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바닷가는 특히 더 심하다. 해변 근처만 가까워져도 사람을 날려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바람이 거세게 몰아친다. 나는 이전에도 다른 나라들에서, 여러 섬들의 바닷가에서, 강한 바람을 많이 겪어봤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 전쟁 같은 바람 덕분에 sneaker wave라는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 갑자기 예고 없이 덮치는 파도. 간혹 아이슬란드 여행 관련 안전 정보를 찾다 보면, 바다가 얼마나 위협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상들이 굉장히 많이 보인다. 아이슬란드의 파도는 잔잔해 보이다가도 갑자기 사람의 키만큼 높이 불어나 금세 덮쳐버리곤 한다. 그야말로 물귀신이다.
레이니스피아라 해변 입구에는 신호등이 있다. 빨간 불이 켜져 있으면 못 들어가고, 노란 불이 켜 있으면 들어가도 되지만 주의하라는 의미다. 초록불은... 과연 켜지는 날이 있을까 싶다. 우리는 처음 도착했을 때 노란 불이었지만, 나중에 나오며 보니 빨간 불로 바뀌어있었다.
해변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눈을 못 뗄 정도로, 모래 섞인 바람이 얼굴을 강타했다. 큰 바위가 보여서 올라가 보았는데, 아래 사진은 설정이 아니고 정말로 바람에 휘청거려서 중심을 다시 잡는 와중에 찍힌 사진이다.
나름 운동을 꾸준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코어 힘이 이렇게 없나 반성해 보다가, 이내 아이슬란드라 어쩔 수 없는 거라는 속 편한 결론을 내렸다.
휘청이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가이드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들 어깨에 손을 짚어 경각심을 주기도 했지만, 바람에 몸이 기울고 넘어져 의지와 상관없이 바다 쪽으로 가게 된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그 모든 빈 공간을 채운 바람 소리는 귀가 먹먹해질 정도여서 마치 거대한 함성 같았다. 보이진 않고 귓가를 울릴 뿐이었지만 그게 두렵다는 건 분명히 알았다. 그 힘은 계속해서 우리를 모든 방향에서 모든 방향으로 밀어냈으니.
신호등의 빨간 불을 뒤로하고 차에 다시 올라탔을 때, 우리는 모두 기진맥진해 있었다. 사방이 차단되자 곧장 긴장이 풀렸다. 아직 끝이 아님을 알지 못한 채.
웅장한 해변 근처를 지나 다시 길을 달리자, 아기자기한 풍경이 나타났다. 먼발치에서 본 남부의 대표적인 마을 비크(Vik)의 전경은, 동화 한 편이 그려질 정도였다. 벌판을 지날 때는 집들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었지만, 이곳은 알록달록한 지붕의 집들이 서로 가까이에 모여 예쁜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색색의 건물들 중에서도 비크에서 가장 유명한 건 아마 빨간 지붕 교회일 것이다. 교회 앞에서 내리면 저 멀리 아래 펼쳐진 바닷가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레이니스피아라 해변 앞, 크고 작게 솟은 바위들이 신비로웠다. 오래전에 이곳에 섰을 때는 해질 무렵이었는데, 이번에는 한낮이라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이곳 역시 언덕진 곳이라 바람은 좀 불었지만 그래도 비교적 좀 평화로웠는데…
곧 다시 바람과의 싸움을 이어가야 하는 순간이 왔다. 다음에 간 곳은 엘드라운(Eldhraun) 라바필드. 1783년 화산이 폭발하고 화산재와 마그마가 퍼져나간 후 그 위에 이끼가 자란 용암 지대다. 회녹색 빛깔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조금 전 레이니스피아라의 기억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또 한 번 인생 처음 느껴보는 바람을 이곳 라바필드에서 느꼈다. 주변에 바람을 막아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그런지, 아무 제한도 한계도 없는 바람을 맞게 된 것이다.
가이드는 한 바퀴 돌고 오라고 했지만, 제대로 둘러보고 오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눈을 뜰 수도 없는데 무슨 구경인가. 차에서 내린 것이 아쉬워 다리는 제 역할을 충실히 다했지만, 결국 눈에 담은 건 별로 없었다.
레이니스피아라의 바람을 아무것도 아닌 수준으로 만들어버린 그 거센 바람을 겪고, 다시 차에 올라탔다. 차 문이 닫히자마자 바람소리가 끊겨 묘한 쾌감을 느꼈다. 투어 일정에 따르면 이제 호텔에 갈 시간이었다. 드디어, 바람이 공격할 수 없는 쉼터로 들어갈 차례.
그런데 우리 가이드는 아직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이 남아있었다. 어디로 데려가려나 궁금해하며 창밖을 바라보는데, 스카프타펠 빙하 표지판이 보였다. 10년 전에 빙하 트레킹을 했던 지명이라 낯이 익었다. 그때 그곳을 다시 구경해 보는 건가 했는데, 차는 조금 더 들어갔다. 그리고는 갈림길에서 우리 차는 그 옆의 스비나펠스요쿨(Svínafellsjökull)로 향했다.
이번 여행의 첫 빙하였다. 이날 숙소로 들어가는 길에 창밖으로 보게 될 요쿨살론 빙하 호수가 우리의 첫 빙하가 될 줄 알았는데, 가이드는 이렇게나 멋진 곳을 예고편으로 택해주었다.
거대한 빙하 앞에는 검은 화산재 모래가 쌓인 언덕이 있었다. 이 언덕을 넘실넘실 걸어내려가면 빙하를 만날 수 있었다. 멀어 보이지만 걸음은 가벼웠다. 걱정과 달리, 이곳은 바람이 들이닥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좁은 길로 들어와서 바람이 쫓아오지 못한 것 같다.
바람이 없으니 평화로운 마음을 느끼며 빙하를 만끽할 수 있었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인지, 아니면 저녁 시간이 다 되어 인파가 빠져나간 것인지, 한적해서 더 좋았다. 해질 무렵이라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 만들어졌다.
빙하가 떠다니는 요쿨살론 호수와 빙하가 해변에 정박해 있는 다이아몬드 비치를 합쳐놓은 느낌이 들었다. 거기다 오래전 빙하트레킹을 했던 스카프타펠까지도 합쳐놓은 느낌이랄까. 위엄 있게 서 있는 빙하와, 거기서 떨어져 나온 빙하 조각들이 곳곳에 있었다.
오래전 친구와 다이아몬드 비치에서 놀았던 것처럼 얼음 덩어리를 들고 사진도 찍고, 호수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빙하의 모습도 사진으로 담았다.
숙소로 가는 길에는 태양의 흔적이 남은 분홍빛 하늘과 노란 보름달이 공존하고 있었다. 오후는 바람과 맞서느라 정신없이 피곤했지만, 이제부터 밤까지는 숙소 안에서 평화로울 터였다. 다음날 들르게 될 요쿨살론의 잔잔한 저녁 분위기를 창밖으로 슬쩍 느껴보며, 몸의 긴장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단계별로 심각한 바람의 피해를 경험했듯, 빙하 역시 단계별로 더 멋있어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오늘 하루 내내 그랬다. 형체 없는 것과의 싸움이란 예고도 경고도 없어서 더 힘들었지만, 그만큼 피해 갔을 때의 평화는 온몸으로 맞이할 수 있었다.
체력적으로는 힘들고 지쳤지만, 본 것만 따져보면 정말로 완벽한 하루였다. 덕분에 다음날도 막연하게 좋은 것만 기대하게 되었다.
하지만, 완벽한 하루가 있으면 또 완벽하지 않은 하루가 있는 법. 그건 당연한 수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