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는 폭세권

폭포 가득, 남부 투어의 시작

by 바다의별

"이기고 나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야지."

"어떻게?"

"먼 나라로 떠나는 거지, 평화로운 곳, 아름다운 곳으로. 폭포가 세 개쯤 있는 곳으로."


넷플릭스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의 마지막 시즌, 주인공들이 기나긴 싸움을 끝내고 쉴 곳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 가족은 모두 동시에 "아이슬란드!"라고 외쳤다. 한 시야 안에 폭포 3개가 거뜬히 들어올만한 곳이라면, 역시 아이슬란드를 추천해주고 싶었다.



아이슬란드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폭포란 깊숙한 산속이나 숲 속에 들어가야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폭포가 길 가다 발에 채일 정도로 무심하게 많은 세상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언제나 동화 속처럼 집들이 서 있었다. 아빠는 그걸 '폭세권'이라 불렀다. 역세권, 스세권을 뛰어넘는 폭세권. 뒷마당에 폭포가 있는 나라. 얼마나 근사한가.


남부 지역은 그중에서도 폭포들을 한가득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남부투어는 꽤 오랜 시간을 차에서 보내야 하고 또 그만큼 비싸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투자할 가치가 충분히 차고도 넘친다. 요즘은 당일치기 투어들도 있지만 조금 더 여유롭게 다니기 위해 10년 전처럼 1박 2일 투어를 택했다.


그때는 이틀 내내 비가 오고 흐렸지만, 그럼에도 그 불편한 날씨가 전혀 아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웅장한 폭포, 검은 모래 해변과 주상절리, 빙하 명소들까지, 어느 것 하나 실망스럽지 않았다. 잿빛 하늘이 오히려 신비롭고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낼 수도 있다는 걸, 아이슬란드에서 처음 알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출발 당일 날씨가 완벽할 정도로 맑다니, 어떤 새로운 모습들을 보게 될지 기대가 되었다. 다음날 비소식이 있기는 했지만 일정의 절반이라도 맑다는 건 변화무쌍한 아이슬란드에서 굉장한 행운이었다.


게다가 이날 우리의 가이드는 지질학과 출신으로, 이틀 간의 일정을 치밀하게 계획해 두었다. 목적지 중 날씨 영향을 받는 곳들은 첫날 들르고, 아닌 곳들은 둘째 날 가기로 한 것이다.



전날 란드만날라우가르에 갈 때처럼, 이날도 우선 레이캬비크에서 셀포스라는 마을로 먼저 향했다. 우리는 여행이 끝날 때까지 레이캬비크-셀포스 구간을 3번 왕복했는데, 전날은 안개 낀 풍경을, 이날은 맑은 풍경을, 이후에는 또 다른 풍경을 만났다.


그러니까 사실, 아이슬란드에서 같은 풍경을 다른 날씨로 경험하는 데에 필요한 시간은 10년이 아니라 고작 하루면 충분했다. 물론, 10년 만에 경험하는 것이 더 극적인 일이었지만.


다시 만난 셀포스에서 간식거리를 사들고, 1시간 30분 정도 달린 끝에 가장 먼저 만난 곳은 '숲의 폭포'라는 이름의 스코가포스(Skogafoss)였다.


아이슬란드어로 'foss(포스)'란 폭포를 의미한다. 원래의 일정대로라면 셀야란즈포스(Seljalandsfoss)에 먼저 갔어야 했지만, 비 오는 날에도 멋있는 그곳은 다음날로 미뤄두었다.



쨍한 파란색의 하늘과 초록빛 풀과 언덕 사이에는 네모난 폭포가 시원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아이슬란드의 산과 언덕들을 덮는 건 대개 짧은 풀과 이끼라, 멀리서 보면 그 재질이 독특하게 느껴진다. 왠지 손을 가져다 대면 펠트나 스웨이드처럼 폭신하며 부드러운 기분이 들 것만 같다. 거기에 폭포수까지 촉촉하게 튀어 오르고 있으니, 마음까지 촉촉하면서도 보송하게 채워지는 듯했다.


폭포 곁에는 완벽한 반원 모양의 무지개까지 떠 있어 모여든 사람들을 설레게 했다. 아래 흐르는 물속에도 반사된 무지개의 양끝은, 뽀얗게 부서지는 안갯속에 여전히 살아있어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알 수 없었다.



폭포 또한 그랬다. 우측 계단을 통해 언덕 위까지 올라가면 폭포가 되기 전의 강물부터, 폭포가 되어 낙하한 후 만나는 강물까지, 온전한 전체 풍경을 조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폭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이 절벽을 만나는 순간부터, 이후 아래에서 다시 새로운 강물을 만나는 순간까지일까? 폭포의 시작은 강의 끝이고, 폭포의 끝은 또다시 강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흐르는 폭포를 보고 있자니 문득 흐르는 시간 역시 추상적인 듯하다고 느껴졌지만…



"3분 늦으셨네요. 괜찮아요. 하지만 우리, 더 잘할 수 있죠?"


이날 우리의 가이드에게 시간은 결코 어긋나서는 안 될 절대적인 개념이었다. 고작 3분을 넘긴 일행도 머쓱하게 할 정도로. 어떻게 보면 좀 불친절하고 매정한 게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그게 장점으로 느껴졌다. 이런 단체 투어들을 예약할 때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 일행 리스크인데 (실제로 며칠 뒤 투어에서는 그걸 굉장히 많이 느껴서 이날의 가이드가 그리웠다), 가이드가 세게 차단해 버리니 다들 일찍 다녀서 좋았다.


그리고 그 덕분에 가이드는 자신의 의도대로 우리에게 더 많은 걸 보여줄 수 있었으니, 그것 또한 장점이었다. 스코가포스에서 3분만 지각한 덕분에, 가이드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한다는 곳에 우리를 데려가 주었다. 이곳은 여행사 홈페이지에 포함되어 있는 장소는 아니었지만, 애초에 '시간과 상황에 따라 추가로 들르는 곳이 생길 수 있다'라고 적혀 있었기에 선택한 여행사였다.


차를 조금만 더 타고 가 금방 또 다른 주차장에 들어섰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텀블러를 손에 들고 내렸다. 조금 걸어 들어가니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또 하나의 근사한 폭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베르누포스(Kvernufoss)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곳은 정오쯤 도착해야 무지개가 가장 예쁘게 걸려있다고 한다. 그래서 가이드는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3분도 낭비할 수 없는 마음.


그 덕분에, 추가로 들르는 곳이라 뭐 얼마나 대단한 곳이려나 싶었던 나는, 첫눈에 이곳에 반해버렸다. 이 조금 전 만났던 스코가포스도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이곳은 인파가 훨씬 덜해서 더욱 신비롭게 느껴지는 매력이 있었다. 나 또한 처음 가보는 곳이라 더 설레기도 했다.


"텀블러 가져오신 분들? 이쪽으로 오세요."


가이드의 말에 너도나도 멈춰 서서 가이드가 손짓하는 풀밭 옆에 다가갔다.



그냥 수풀 같았는데, 가이드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가까이 다가가자, 마치 수도꼭지처럼 텀블러 입구 정도는 가져다 댈 수 있는 공간이 보였다. 그 틈새로 맑은 물이 세차게 흘러나왔다.


아이슬란드의 폭포들은 대부분 빙하가 녹아내린 흔적이다. 차가운 폭포수를 텀블러에 담아 마시니 이미 벌써 몸이 청량감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그 빙하수를 품은 채 폭포에 가까이 가니 기분은 더욱 상쾌했다.



다음날 가게 될 셀야란즈포스는 폭포 뒤로 한 바퀴 걸어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데, 이곳 역시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았지만 폭포 뒤편으로 걸어가 볼 수 있어 재밌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밝은 폭포의 뒤쪽으로 가자, 그 거친 뒷면이 눈에 들어왔다. 뾰족뾰족한 절벽의 끝과 물방울이 튀어 오르는 모습까지, 하얀 폭포를 만들어내는 뒷면은 다양한 날 것의 풍경이 가득했다.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거센 물살의 거침없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바깥세상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기묘한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굳이 폭포를 언급한 건, 오랜 전쟁을 치른 뒤 자신들의 상처와 아픔을 씻어낼 곳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마음이 소란할 때는, 더 소란한 곳에 서 있는 게 좋다. 고민의 목소리들이 들리지 않도록, 듣고 싶지 않은 말소리들이 깨끗이 씻고 내려가도록.



물론 이날 내가 씻어내고 싶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폭포의 소리는 여전히 각별한 평화로움을 주었다. 쉬지 않고 자신만의 박자로 쏟아지며, 내 안에 조금이라도 있었는지 모를 엇박들을 모두 매끄럽게 다듬어주는 듯했다.


게다가 하늘까지 청쾌하니 이보다 완벽할 수가 없었다. 10년 전에는 빗속에서 패딩 모자를 움켜쥔 채로 (아이슬란드 칼바람 속에 우산은 소용없으니) 전투적으로 구경했는데, 이토록 하늘하늘한 바람 속을 여유롭게 걸을 수 있다니. 차분한 여행을 하게 된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레이니스피아라에 도착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