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밭 속 온천 대신, 햇빛 속 트레킹

란드만날라우가르 (Landmannalaugar) 트레킹

by 바다의별

열 번 넘게 간 파리에서도 세 번 방문한 런던에서도, 단 한 번도 이전과 동일한 경험을 했던 적이 없다. 장소가 같을 뿐, 그 어떤 요소도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의 란드만날라우가르 (Landmannalaugar)에서도 그걸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란드만날라우가르가 위치한 아이슬란드 하이랜드는 고지대 산맥 지역으로, 독특한 지열 지대와 온천, 멋진 트레킹 코스로 잘 알려져 있다. 링로드만 돌면 하이랜드는 놓치기 쉬운데, 그 지역만의 매력이 분명히 있어 나는 이번에도 빼놓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10년 전에도 이번에도, 란드만날라우가는 아이슬란드 도착 바로 다음 날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이 되었다. 그때는 10월 4일, 이번에는 10월 3일. 날짜는 고작 하루 차이였지만, 날씨는 전날 레이캬비크에서 느낀 것보다도 더 극과 극으로 달랐다. 10년 전에는 때 이른 눈과 거센 비바람이 몰아쳤다면, 이번에는 맑고 평온한 날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그게 곧 '평온한 날'을 의미하지는 않았지만.


레이캬비크에서 투어 차량을 타고 출발한 지 약 1시간, 셀포스라는 작은 마을의 주유소에 들렀다. 우리가 화장실에 갔다가 편의점에서 점심거리를 사는 동안 (작은 샌드위치 3개에 조그마한 곽 형태의 주스 2개를 샀더니 5만 원이 넘게 나왔다), 가이드는 차량 각 바퀴에 기압 조절 호스를 끼우고 있었다.



하이랜드로 가는 길은 워낙 거칠고 울퉁불퉁한 데다 중간중간 도강도 해야 해서 사륜구동 지프차를 이용하는 것이 권장된다. 19인승 지프차의 거대한 바퀴에 호스까지 끼우니 더욱 강인해 보였지만, 이내 불길한 전조 증상들이 시작되었다. 아직 길이 평탄한 지역을 달리는데도 호스가 자꾸만 빠져 가이드는 10분마다 차를 세워서 재조정을 해야 했다.


길이 거칠어지면서 호스는 더욱 자주 빠졌고, 어느 순간 바퀴에서 애매한 소음까지 들렸다. 우리가 답답한 건 둘째 치고, 이쯤 되니 수시로 차를 세워 내려야 하는 가이드가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바로 어제도 정비를 했다는데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달릴 뿐이었다.



달리는 차 안은 요란했지만, 밖은 평화로워 보였다. 낮은 산들과 황량한 들판, 검은 화산암들이 차곡차곡 풍경을 채워갔다. 날카롭지 않은 산들 사이, 그나마 뾰족해 키세스를 연상시키는 헤클라(Hekla) 산과 2010년 폭발해 유럽 공항들을 마비시켰던 에이야파들라이외퀴들 (Eyjafjallajökull)도 맑은 하늘 아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10년 전과는 딴판이었다. 그때는 며칠 전 내린 눈이 온 풍경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하루 종일 흐리고 비가 내렸는데, 그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나와 내 친구는 란드만날라우가르에서 온천을 했다. 탈의실도 없는 곳에서, 수건만 두르고 옷을 갈아입은 뒤 온천물에 뛰어들어 차가운 빗방울을 맞았다. 우리는 그날 숙소로 돌아갈 때까지 '브레이브 코리안 걸즈'라 불렸다.



그런데,

그 눈이 걷힌 자리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있었다.



차에서 내려 트레킹 코스 입구에 서자, 어쩌면 우리가 비행기가 아니라 우주선을 타고 온 게 아닐까 싶은 풍경이 펼쳐졌다.


붉은 땅과 형광빛 이끼, 검은 화산암이 뒤섞인 모습은 영락없는 화성이었다.



걸어 들어가면 갈수록 풍경은 점점 더 신비로워졌다. 푸르른 하늘에는 구름 군데군데 얇게 걸려있어, 마치 일부러 아름답게 그린 그림처럼 보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눈으로 뒤덮여 알 수 없었던 풍경의 속살을 드디어 만난 기분이었다.



1시간 반 가량의 시간 동안, 우리는 검은 화산석들과 연둣빛 이끼들을 지나고, 곳곳의 물 웅덩이에 비친 풍경을 사진 속에 담고, 모락모락 짙은 안개처럼 올라오는 지열을 통과했다.


부모님께서는 아이슬란드 여행의 본격적인 첫 풍경이라 더욱 신비롭게 느끼셨는데,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온천 대신 산길 속에 몸을 푹 담가, 완전히 새로운 풍경들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바람이 차다고 생각했는데, 오르락내리락 걷다 보니 슬슬 땀도 났다. 시작점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트레킹코스의 끝에서, 땀을 식히며 늦은 점심을 먹었다. 5만 원 값어치를 하는 식사는 아니었지만, 식당의 뷰가 근사했으니 그걸로 되었다. 앉아있던 벤치를 빠르게 정리하고, 차로 되돌아갔다. 투어의 후반전이 아직 남아 있었다.


보통 투어 버스에서는 목적지에 내릴 때 무거운 짐은 자리에 두고 내리니, 다시 탈 때도 같은 자리에 앉는 게 암묵적인 룰이다. 그런데 우리 자리에는 다른 일행이 앉아 있었다. 짐이 그대로 있는 채로. 당황한 우리의 시선을 피하고 앉아있는 모습에 기분이 상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도 멀미 때문에 앞자리에 앉고 싶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뒷자리로 가는 게 걱정되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라는 걸 곧 깨달았다. 차에서 정체불명의 '삐-' 소리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문이 열린 것도, 안전벨트 문제도 아니었다. 가이드가 몇 번이나 차를 멈추고 이것저것 시도해 보았지만, 1, 2초 정도 멈출 뿐 날카로운 기계음은 계속 살아났다.


오는 길도 험난했는데, 레이캬비크로 되돌아가는 길은 더욱 험난할 것이 예상되었다. 우리는 귀를 관통하는 삐 소리와, 뒷자리로 간 탓에 더 심해진 멀미와, 덜컹거리는 승차감을 견뎌내며 남은 코스를 꾸역꾸역 돌아야 했다.



그래도 검은 모래 틈에서 푸르름을 가득 안은 료티폴루르 (Ljótipollur) 크레이터 호수는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아주 잠시 고달픈 몸상태를 잊을 수 있었다. 겉보기에는 맑고 예쁜데 화산재 때문에 물이 탁해서인지 '더러운 호수'라는 뜻의 이름이 붙었다고 해 그 냉정함이 왠지 서글펐다. 하지만 다시 차량에 올랐을 땐,


"우리, 중간에 차를 바꿀 거예요. 이 상태로 레이캬비크까지는 못 가겠습니다."


가이드의 비장한 선언에 료티폴루르의 이름을 이해하게 되었다. 겉으로는 멀쩡한데 내내 말썽 부리는 우리 차에, 나 역시 차마 '멋진 차'라고 이름 붙일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남은 여행은 무사히 다 마쳤다. '눈물의 계속'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여러 갈래의 폭포들을 볼 수 있는 시골두글류푸르 (Sigoldugljufur) 계곡, 그 계곡의 시골두포스 (Sigöldufoss) 폭포, 그리고 햘파르포스 (Hjálparfoss) 폭포.



햘파르포스의 경우에는 두 갈래의 폭포가 강물에 떨어지기 직전에 살짝 포개어져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약간 억지를 부리자면 하트 모양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첫 여행과 두 번째 여행의 순간순간들이 이렇게 포개어져 나만의 추억이 담긴 강물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란드만나라우가르 여행을 마치며 살짝 감상에 젖어있다 이날 마지막으로 다시 차에 올라탔다.


아, 마지막은 아니었다. 1시간 정도를 달려, 마주 오던 다른 차량과 만나 차를 맞바꾸었으니. 구세주 같은 새 차, 그리고 그 차에 타고 있던 강아지의 환영을 받으며 진짜 마지막으로 차에 올라갔다.



트레킹이 그렇게까지 힘든 코스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차 안에서의 사투가 힘겨웠던 걸까. 숙소에 도착하니 진이 다 빠졌다. 이날도 오로라 지수가 높아 어쩌면 시내에서도 보였을 텐데, 도저히 기운이 없었다. 전날 보고 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창밖은 내다볼 새도 없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컵라면을 후다닥 먹고, 다음날 떠날 1박 2일 투어 짐을 빠르게 싼 다음, 우리는 앞다투어 잠에 빠져들었다.


10년 전에는 날씨가 변수였는데, 이번에는 차가 변수일 줄이야. 그래도 이번엔 드디어, 란드만날라우가의 진짜 맨얼굴을 본 것 같아서 미스터리 하나를 푼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