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결코 약속할 수 없었던 한 가지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 보기

by 바다의별

부모님께 아이슬란드의 환상적인 자연을 보여드리겠다고 했지만, 내가 결코 약속할 수 없었던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오로라.



오로라를 볼 수 있는 조건은 크게 세 가지다. 깜깜하게 어두운 밤일 것, 오로라의 움직임이 어느 정도 있을 것(보통 오로라 지수 3 이상), 하늘을 가리는 구름이 없을 것. 이런 이유로 밤이 긴 9월 말부터 4월 초 사이, 밤 10시에서 새벽 4시 사이, 맑은 날에 가장 잘 볼 수 있다.


여기다 우스갯소리로 가장 중요한 네 번째 조건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그곳에 내가 있을 것'까지. 오죽하면 오로라 '헌팅'이라고 부를까. 오늘 밤 당장 오로라의 움직임이 있는 곳을, 잘 보일만한 곳을 찾아가는 것이 최종적인 숙제다. 그러다 보니 렌터카로 직접 찾아 나서기보다 전문 투어를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우리는 애초에 렌트를 안 했으니 선택권 없이 투어를 해야 했지만.


아이슬란드는 분명 오로라를 관측할 수 있는 나라이지만, 날씨가 워낙 변화무쌍한 탓에 실제로 오로라를 볼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나는 10년 전 여행에서도 두 번 보았지만, 궂은 날씨 속에서 어렵게 어렵게 기다려 겨우 만났다. 그런데 이후 알래스카에서는 아주 쉽게, 무려 저녁 9시라는 이른 시간부터 진한 초록색과 분홍색으로 춤추는 오로라를 만날 수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아이슬란드에서 두 번이나 행운이 따라준 건 감사한 일이지만, 이번에도 그런 운이 따라줄지는 알 수 없었다. 언젠가 꼭 부모님과 함께 보고 싶은 풍경이었는데, 세상 가장 보여드리고 싶은 풍경이었는데, 계획도 예약도 할 수 없는 자연현상이라니.


그래서 도착 첫날 오로라 투어를 예약하면서,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구름이 하늘을 덮을 때마다, 어차피 날씨가 5분에 한 번씩 달라질 것을 알면서도, 맑게 걷히기를 빌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10년 전에 운을 한 번만 쓸 것을, 왜 두 번이나 썼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후회도 했다.


드디어 결전의 시간. 낮잠을 통해 충전한 몸으로 비장하게 숙소를 나섰다. 하늘은 금방 어두워졌고, 곧 밤 9시가 넘어 오로라 투어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그날 만난 다른 일행들과 함께 출발을 기다리던 중, 갑자기, 알 수 없는 남자 한 명이 버스에 뛰어올라왔다.


"이거 오로라 투어 버스인가요?"

"네!"

"출발 안 해도 되겠는데요?"

"???"

"여기서도 보여요."


그 말에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급히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오로라는 보통 빛이 있는 데서는 보기 어려운데, 버스에서 내려 뒤를 돌아보니 하늘에 분명 오로라가 있었다. 버스터미널이 내뿜는 밝은 빛을 뚫고 나온 옅은 오로라였다.


(좌) 카메라 세팅 전 사진, 육안에 가까움 / (우) 카메라 세팅 후 사진, 그런데 흔들림...


이미 오로라를 몇 차례 본 내가 남몰래 가지고 있던 소망은, 시내에서 오로라를 보는 것이었다. 배부른 소리일 수 있지만 어두운 시골길을 따라 찾아가는 게 아닌, 시내에서도 보이는 강렬한 오로라를 한 번쯤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런데 그것까지 선물해 주다니, 느낌이 좋았다. 벌써 이 정도라면, 도심 불빛을 벗어나면 더 멋질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첫 목적지에 이르니, 구름이 너무 짙었다. 결국 운전사는 몇 번 무전으로 소통하더니, 우리를 내려주지도 않고 바로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두 번째로 도전한 곳은 공항 근처였다. 오래전 지수가 7이던 날 내가 오로라를 봤던 곳과 비슷한 위치 같았다. 그때의 행운이 어딘가 남아있기를.


하지만 간절한 소망과 달리, 시내에서보다 더 옅게 펼쳐진 오로라가 겨우 보일 뿐이었다. 사진으로 찍으면 조금 더 진하고 선명하게 보였지만,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오로라보다는 별들이 주인공인 밤이었다. 우리 등 뒤에 비치는 보름달 때문인지, 아니면 하늘을 조금 가린 구름 때문인지, 아니면 오로라 활동이 그냥 더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부모님께 미리 휴대폰으로 오로라를 촬영하는 법을 알려드렸기에, 비록 삼각대는 없었지만 곳곳에 휴대폰을 고정해 놓고 찍으며 재밌어하셨다. 그렇지만 신기한 마음은 이내 곧 식어버렸다. 오로라는 아주 얇게 진해졌다가 옅어졌다가 할 뿐, 움직임이 별로 없었다.


사실 오로라의 색은 육안으로 보면 사진에서만큼 진한 형광빛이 나진 않는다. 그렇지만 그 오묘한 빛이 일렁이며 춤을 추는 순간, 너무도 신비로워서 경이로운 감동이 밀려온다.


그런데 이날의 오로라는 은은한 빛 한 줄기, 그게 전부였다. 사진 속엔 진한 초록빛으로 나타났지만 우리의 눈에는 옅은 실구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셔터를 누르며, 오로라가 느리게 움직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알래스카에서 혼자 푹 빠져들었던 그런 오로라를, 나는 부모님과 함께 보며 그 시간을 나누고 싶었는데. 도착했을 때의 풍경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하늘이 야속했다. 부모님이 조금씩 지루해하시는 게 느껴져 마음이 조급해졌다.


조금 기다리면 더 멋지게 펼쳐질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었다. 이게 오늘의 전부일 수도 있었으니까. 어떤 날은 그냥 오로라의 흔적이라도 봤다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갑자기, 예고도 없이, 아주 조금씩 그리고 아주 천천히, 오로라가 진하게 퍼져나갔다. 내가 상상한 건 아닌가 싶어서 눈을 깜빡이기를 반복했다. 착각이 아니라, 오로라가 점점 커지며 그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었다. 추위 속에서 벌벌 떤 지 약 1시간, 옅은 빛이 서서히 진해졌다.



"저것 봐!"


여기저기서 소리쳤지만,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미 모두가 시선을 하늘에 고정하고 있었으니까. 희미한 빛에 조금 아쉬워하셨던 부모님도, 마침내 그 빛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곳곳에서 춤을 추자 눈을 떼지 못하셨다. 앞에도, 뒤에도,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오로라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돔 안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 돔의 천장에 누군가가 초록빛 영상을 비추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우리가 서 있는 그 작은 세상은 온통 오로라로 뒤덮였다. 우리는 언제나 우주의 일부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말로 우주의 한 귀퉁이에 서 있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우주의 시작점, 무지개의 한가운데, 자연의 중심. 그 누구도 인위적으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순간의 마법 같은 예술이 하늘에 펼쳐졌다.



그 순간을 오래오래 담고 싶어서 카메라와 휴대폰을 이용해 계속해서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이 정도면 기록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눈으로만 감상하겠다는 마음으로 카메라를 껐다. 그런데 그 순간, 오로라가 찰나의 순간마다 거대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늘 기가 막힌 풍경은 카메라를 끄는 순간 나타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으며, 춥다고 버스에 다시 올라타신 아빠도 서둘러 불러왔다.



얇은 스카프처럼 느껴졌던 오로라는 커튼이 되었고, 그 사이로 별똥별도 떨어졌다. 언제나처럼 소원 빌 틈은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날 나의 가장 간절했던 소원은 엄마아빠한테 멋진 오로라 보여드리는 것이었으니, 이미 이루어진 셈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1시였다. 피곤했지만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여행 첫날밤에 이런 풍경을 만나다니. 조금 무리하더라도 이날 나오기를 잘했다.


이곳에 다시 오길 정말 잘했다.




예전에 본 오로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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