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캬비크가 모처럼 맑은데도 불구하고

레이캬비크 핫도그

by 바다의별

"나 그럼 예약한다?"


블루라군에서 버스에 올라 시내로 가는 길, 오로라 투어를 예약했다. 시내 구경 - 저녁식사 - 오로라 투어까지 이어지는 이 휴식 없는 일정을, 불과 30분 뒤면 후회할 줄도 모르고.


10년 전에 아이슬란드를 처음 여행했을 때는 여행사의 도움을 받았다. 당시 나와 친구는 몽골이나 네팔 히말라야처럼, 그때까지만 해도 익숙하지 않은 여행지들을 골라 다녔고, 그러다 보니 우리끼리 직접 모든 걸 준비하기에는 겁이 났다. 그래서 계획은 우리가 세우되, 각종 예약에 있어서는 친구가 알던 여행사 직원 분의 도움을 받았다.


늘 우리가 원하는 일정으로 맞춰주시던 분인데, 우리가 야심 차게 짠 아이슬란드 여행의 첫날 일정을 보자마자 말을 잇지 못하셨다.


오후 4시 레이캬비크 공항 도착
오후 5시 블루라군
오후 7시 반 호텔 체크인
오후 9시 오로라 투어


"음... 첫날은 조금 여유롭게 두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웬만해선 그런 말씀을 안 하던 분이었기에, 그분의 반응을 무시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결국 블루라군은 마지막날로 미뤘고, 오로라 투어는 오로라 지수에 따라 현지에서 직접 예약하기로 했다. 이후 레이캬비크에 도착하기도 전에 헬싱키 공항에서 녹초가 된 우리는, 그분의 현명함에 크게 감동했다.



이번 여행은 내가 마음대로 계획했지만, 그래도 부모님과 함께 간다는 사실이 약간의 브레이크가 되어주었다. 너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여유롭지만 때로는 알차게 다니는 일정.


대신 이번에는 10년 전 실행하지 못했던 '도착하자마자 블루라군 가기' 이루었다. 오전 8시에 도착하는 일정인 데다 비즈니스석이었으니 해볼 만했다. 시간도 아끼고 돈도 아끼고, 천천히 아이슬란드에 빠져들기 좋은 선택이었다.


문제는 오로라였다. 아이슬란드에 도착한 첫 이틀이 오로라 지수가 가장 높았고, 날씨도 맑았다. 물론 워낙 다이내믹한 아이슬란드의 일기 예보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 같아서 예약했다.


하지만 나는 두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목욕을 하고 나면 갑자기 노곤해져 잠이 쏟아질 수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아주 긴 아침을 보내고 시간을 거슬러 와 아직 시차 적응을 하기도 전이라는 사실. 여행의 설렘이 주는 흥분에, 그 후유증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블루라군에서 레이캬비크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을 때까지만 해도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는데, 도시가 가까워지고 건물들이 많아질수록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휴대폰을 꺼내 창밖 풍경을 찍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건 졸린 눈꺼풀이라고 하던가.


하지만 투어는 이미 예약해 버린 상태. 취소는 불가했다.


"너무 졸린데..."

"이따 밤에 나가기 전에 좀 자야겠다."

"응. 근데 배도 고프다."


약 40분 간의 버스 여정 중 30분 정도가 지나자, 졸음과 함께 배고픔까지 동시에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목욕을 하며 에너지를 소모하면 배가 고파진다는 사실도 간과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침을 3번 먹었다고 해서 점심과 저녁을 건너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평소 같으면 졸음이 이길 법도 했지만 여행이니 배고픔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졸려서 호텔이나 제대로 찾아가려나 싶었는데, 다행히 맑은 레이캬비크 시내를 보니 반짝 잠이 깼다.


구름이 꽤 있었지만, 파란 하늘이 빼꼼히 보여 알록달록한 네 분위기와 잘 어우러졌다. 전에는 머문 내내 흐렸으니,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무지개색으로 칠해진 레인보우 스트리트가 이제야 그 이름에 걸맞게 빛나는 듯했다.


10년 전과 거의 비슷한 날짜에 방문했는데도, 그때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노란 단풍도 곳곳에 보였다. 회색빛이던 옛 기억이, 쨍한 색감이 덮어써졌다. 이번에는 그때보다 훨씬 포근한 날씨, 포근한 색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이 환상적인 순간을 오래 붙잡을 수는 없었다. 졸음과 배고픔 중에는 배고픔을 선택했지만, 관광과 졸음 중에는 졸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성적이지도 이상적이지도 않은 선택이었지만, 그런 것도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3시 체크인이었지만 2시임에도 방을 내준 호텔 덕분에 짐만 대충 던져두고 서둘러 나갔다. 식당에 갈 힘도 없어 핫도그나 간단히 먹고 돌아와 잠을 자기로 했다. 오죽 졸렸으면, 조금의 우회도 허용하지 않고, 핫도그를 먹을 수 있는 가장 빠른 직선거리를 택했다.



오로지 배만 채우러 왔지만, 가게 앞은 관광지 못지않게 북적였다. 주문한 핫도그를 받아 들고 떠나는 사람들만큼이나 새로이 줄을 서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났다. 게다가 땅에는 귀여운 새들까지 기웃거려 사람들이 흘리고 가는 핫도그 부스러기들을 냉큼 집어먹었다.


배우 조정석의 "Please, hot dog world (핫도그 세'계' 주세요)"로 우리나라에도 유명해진 아이슬란드 핫도그는, 대단히 평범해 보이지만 꼭 먹어보아야 하는 메뉴다. 짭조름하고 고소한 소시지와 바삭하게 튀긴 양파 후레이크, 그리고 아이슬란드만의 특제 소스의 조합.


특제 소스는 마트에서도 팔고 있지만 사 오진 않았다. 어떤 건 그냥 그때의 기억으로 남기고 싶은 법이다. 그걸 똑같이 재현할 자신도 내게는 없었고.



딱 좋은 날씨 속에 핫도그를 먹고 나니 든든해졌지만, 졸음은 여전히 쏟아졌다. 그래도 숙소로 돌아가는 길, 유난히 더 예쁘게 느껴진 레이캬비크의 화사함이 졸린 시야를 뚫고도 내게 다가왔다.


이번 여행에서는 핫도그처럼 여전한 것들을 얼마나 더 발견하게 될까. 그리고 모처럼 맑은 레이캬비크처럼, 새로운 것들은 또 얼마나 더 만나게 될까.



도착 첫날부터 익숙함과 낯섦이 동시에 다가왔다. 비록 10년 전의 그 레이캬비크는 아닐지라도, 약간의 아는 척을 할 수 있는 반가움과 처음 마주하는 신선한 설렘의 뒤섞임은, 두 번째 가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묘한 벅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처음으로 함께 나눌 새로운 일행, 부모님이 계시다는 사실 또한 더욱 특별했다.



남은 벅참은 저녁에 마저 꺼내 쓰기로 하고, 체력 비축을 위해 호텔로 돌아갔다. 짐 정리는 나중에. 일단은 잠깐이라도 자두기로 했다.


이날의 원래 계획은 이러했다.


8시 공항 도착
10시 블루라군
14시 호텔 체크인
15시 핫도그 먹기
16시 시내 구경
18시 저녁식사
20시 오로라 투어


그때 그 여행사 직원분이 보셨다면, 이것 역시 기겁하시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