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로 출발
여행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약간의 근거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그건 지난해 오스트리아 여행 때문이었다. 출발 두 달 전 항공편이 변경되고, 기차 일정도 변경되고, 도착해서는 어마어마한 폭풍우를 만났던 여행. 여행 일정 절반 가량동안 우리는 그야말로 생고생을 했다. (브런치북 <폭풍과 함께 오스트리아> 참고)
하지만 그 불안한 예감과는 달리, 이번 준비는 꽤 순조로웠다. 수시로 일정 변경과 날씨 체크로 바빴던 오스트리아 여행 준비 때와는 달리, 부수적인 것들에 신경 쓸 여유도 있었다. 나는 핀란드어를 조금 공부해 보았는데, 아이슬란드를 배워보려 했다가 알파벳의 장벽 앞에 포기한 뒤, 헬싱키 경유 때라도 써먹어보자며 택한 일이었다. 부모님의 경우엔 아이슬란드 여행 도서와 내가 10년 전 블로그에 남긴 여행기를 보며 기대감을 높여보시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긴장했던 마음이 출발일이 다가올수록 조금씩 풀어지고 말았다. 뒤늦게 '아 맞다!' 하며 챙겨야 할 것들이 하나 둘 쏟아지더니, 급기야 출발 당일에는 캐리어 하나의 비밀번호를 가족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 사실을 순간 깜빡하고 내가 무심코 잠가버렸다가 30분간 죄인이 되기도 했다. (결국 111부터 하나씩 돌리면서 겨우 풀었다)
그렇게 잠시 긴장감이 다시 생기나 싶더니, 공항에 도착해서는 또 마음이 풀어졌다. 큰 마음먹고 끊은 비즈니스석을 탈 생각으로 마음이 들떴나 보다.
10년 전 친구와의 비행이 고난 그 자체였기에, 부모님과 함께 하는 이번 여행은 피로를 최소화하기 위해 과감히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 여행 총경비의 절반이 넘는 금액이라 손은 좀 떨렸지만, 보람 있는 선택이었다. 타는 동안은 물론, 도착 후에도 피로감 없이 편안했으니.
그러나... 결국 여행 전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약간의 복선이었던 걸까.
14시간가량의 비행을 마치고 헬싱키 공항에 내려 짐 검사를 마치자, 핀에어 라운지가 눈에 들어왔다. 환승 시간이 1시간 30분가량 있어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목이라도 축이고 싶어 잠시 들렀다. 이제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그나마 조금 있던 긴장도 풀린 상태로, 간단히 간식까지 먹었다. 그리고는 탑승 시작 10분 전, '여유롭게' 라운지를 나섰다.
그런데 탑승구로 향하는 길, 그제야 여러 갈래로 나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향하는 곳에 걸린 안내판을 본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출입국심사'
우리에게는 아직 입국심사가 남아있던 것이다.
처음부터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헬싱키에 도착했을 때 짐검사만 이루어지고 출입국심사에 대한 표시가 없어, 아이슬란드에 가서 하는 건가 생각하고 금방 잊어버렸다. 찾아보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그동안 유럽에 갈 때마다, 항상 첫 입국국 도시에서 입국심사를 받았었는데(쉥겐 조약 가입국의 경우), 어떻게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었던 것인지.
"죄송합니다, 비행기 시간이 다 돼서요!"
평소 이런 말을 하며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면 '미리미리 준비 좀 하지' 싶었는데,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볼 줄이야. 앞선 연결 편이 늦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여유를 부리다가 비행기를 놓칠 뻔하다니 창피했다.
재빨리 달려가서 선 입국심사 줄은 꽤 길었지만, 그곳 직원의(그리고 다른 탑승객들의) 배려로 빠르게 심사받을 수 있었다. 심사대를 지나자마자 또다시 미친 듯이 뛰었다. 비즈니스석과 라운지에서 누렸던 안락함은 공항 내 전력질주로 순식간에 증발되었다.
헐레벌떡 게이트에 도착하니 이제 막 탑승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깨닫게 된 허탈한 사실. 게이트 바로 앞에도 핀에어 라운지가 있었던 것이다. 먼저 게이트 근처로 향했다면 입국심사도 여유롭게 했을 테고, 라운지에서 더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부모님을 헬싱키 공항에서 달리시게 한 약간의 불효 끝에, 레이캬비크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숨을 고르는 동안 등에 맺힌 땀을 식혔다.
그리고 곧 작은 보람도 찾아왔다. 식사를 준비해 준 승무원 분께, 핀란드어로 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작 '감사합니다(Kiitos)'였지만, 그분의 깜짝 놀란 표정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미 기내 방송에서 몇 가지 단어들을 알아듣고, 메뉴판에서 사과, 커피 등의 단어를 알아보며 혼자 속으로 환호하기도 했다.
그래, 그래도 내가 아무 준비도 안 한 건 아니었지. 그렇지만 너무 빨리 긴장을 풀어버린 건 내 실수였다. 남은 여행 기간 동안은 약간의 긴장감을 놓지 않기로 했다. 두 번째 방문이라고 해서 다 안다고 미리 지레짐작하지 말 것. 여행은 늘,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 거니까.
비행기 좌석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차분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간을 거슬러 서쪽으로 달리는 우리에게, 그날의 아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헬싱키 도착 전 기내식, 라운지에서의 간식, 그리고 레이캬비크행 비행기에서의 식사까지 무려 세 번의 아침밥을 먹고, 두 번의 일출을 마주한 기나긴 아침이었다. 헬싱키를 이륙할 때 한 번 떠올랐던 해는, 3시간 뒤 레이캬비크에 착륙할 때 즈음 또다시 붉게 떠올랐다.
그 아침의 끝에, 드디어 아이슬란드에 도착했다. 그리고 아이슬란드는 기다렸다는 듯, 가장 아이슬란드다운 방식으로 우리를 환영해 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