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나이펠스네스 반도
우리를 쫓아오는 먹구름, 초속 30m의 바람. 아이슬란드에서의 마지막 여정은 가장 아이슬란드다웠다.
사실 우리가 머무는 동안, 날씨는 대체로 좋은 편에 속했다. 종종 먹구름이 끼고 비가 오기도 하고 우박이 공격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하루에 반나절 정도는 맑은 하늘을 만났으니. 그래서 모처럼 날씨 운이 좋다고 생각했건만, 아이슬란드는 진짜 날씨를 우리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나 보다.
10년 전에는 가장 평화롭게 여행했던 스나이펠스네스반도를, 중간중간 바람이 불긴 했어도 겉옷을 벗고 사진 찍었을 만큼 따스했던 그곳을, 이번에는 강풍 예보, 아니 경보와 함께 시작했다.
"스나이펠스네스는 snowy mountain peninsula라는 뜻인데, 오늘은 windy 마운틴이겠어요!"
가이드는 일기예보를 꼼꼼히 확인한 듯, 원래 일정과는 반대로 가겠다고 했다. 원래는 남부에서 시계방향으로 북쪽까지 보고 오는 일정인데, 북으로 먼저 가 반시계방향으로 내려오는 방식을 택했다. 오후 북쪽에 바람이 더 거세질 것 같다고 해, 최대한 피하고자 한 것이었다.
우리는 전날 평화롭게 온천을 했던 부근으로 가, 스나이펠스네스 반도로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해저터널로 진입했다.
사실 이곳은 10년 전에도 갔던 길인데, 그때는 꽤나 불안해하며 갔었다. 유럽에 해저터널에 대한 건설규격이 정해지기 전에 지어진 곳이라, 지금의 규격에는 맞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여러 가지 보수와 보완 작업이 진행되었다고 해 이번에는 마음 편히 들어섰다.
그리고 해저를 뚫고 나왔을 때는, 생각보다 예쁜 하늘에 그 편한 마음이 이어졌다. 레이캬비크에서 출발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비가 꽤 왔는데, 구름이 꽤 있긴 해도 비는 그쳐있던 것이다. 물론 아이슬란드니, 언제라도 다시 내릴 수 있었지만.
'작은 아이슬란드'라 불리는 스나이펠스네스 반도는 평화로운 자연 풍경으로 가득했다. 드문드문 작은 마을들을 지나고, 군데군데 폭포들을 지나, 여러 모양의 산들도 지났다. 이틀 전에 내린 눈의 흔적인지, 아니면 'snowy'라는 이곳의 이름 덕분인지는 몰라도 산들 위에는 하얀 빛깔이 엷게 퍼져있었다.
가장 먼저 내린 곳은 키르큐펠(Kirkjufell)이었다. 'church mountain'이라는 뜻을 가진 곳으로, 수많은 아이슬란드 여행 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마치 뾰족한 고깔모자 같기도 하고, 위가 평평한 중절모 같기도 하다. 나는 아무리 봐도 모자 같은데 그 뾰족한 모양 때문에 교회 같다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모자든 교회든, 어쨌든 멋진 건 매한가지!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너무나 아쉬웠던 건, 탐방로 일부가 닫혀 있었다는 것이다. 강풍 때문인지 혹은 며칠 전에 내린 눈으로 인해 길이 미끄럽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이 산은 앞의 폭포를 나란히 앵글에 넣었을 때의 모습이 가장 멋진데, 폭포 반대편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막혀있어서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최대한 갈 수 있는 곳까지 걸어가, 비슷하게라도 사진을 찍어보았다.
원했던 풍경을 억지로 만들어낼 수는 없었지만, 덕분에 여러 각도로 고민한 끝에 나름대로 색다른 사진을 얻은 것 같다.
이번 여행 기간 동안 원했던 풍경들을 수도 없이 성공적으로 봤으니, 마지막 날은 이렇게 어느 정도 타협이 필요하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받아들일 수밖에.
하지만 그 타협은 내가 생각한 것처럼, 날씨로 인해 무언가를 덜 보고 다른 걸로 만족해야 하는 그런 방식의 것이 아니었다. 혹독한 훈련이었다.
뾰족한 산을 등지고 향한 곳은 디우팔론산두르 (Djúpalónssandur)였다. 이곳 역시 검은 모래 해변으로, 주변이 독특한 화산 지형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10년 전에 친구와 찍은 사진들 속에는, 겉옷을 벗어 손에 들고 여유롭게 포즈를 취한 내 모습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강풍이 우리를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미 키르큐펠에서도 조금 느꼈지만, 여기서부터가 진짜 아이슬란드 바람이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어찌할 줄 몰라하다, 일단은 서둘러 탐방로로 내려갔다. 지형지물 사이 몸을 숨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이곳의 풍경은 여전히 멋있었지만, 이번에는 바람에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전투적으로 걸어야 해, 다급하게 구경을 이어가야 했다.
해변이 시작되는 탐방로 끄트머리에는, 오래전 선원들이 힘 대결을 했다는 돌들이 놓여 있다. 가장 무거운 건 150kg이며, 가장 작은 것도 20kg가 넘는다. 바람이 거세서 나 포함 다들 슬쩍 건드려보고는 그냥 지나쳤는데, 그 와중에 아빠가 번쩍 하나 들어 올렸다.
"오!!"
하나 더 들어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가뿐함에 곧장 다른 돌을 기웃거리셨지만…
"아, 그냥 와!! 더 못 서 있겠어!"
한 곳에 서 있기도 힘든 날이었다. 선원들도 날이 좋을 때나 힘자랑 할 새가 있지 않았을까. 인증샷을 찍자마자 남은 구경이나 빨리 마치기 위해 해안가로 달려갔다.
해안가의 바람은 더욱 어마어마할 것임을 감안하지 못한 채.
남부의 레이니스피아라 해변에서도 아이슬란드 바닷바람의 위력을 느꼈지만, 이곳의 파도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중간중간 솟아오른 기암괴석들이 방파제 역할을 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모두를 휩쓸어갔을지 모를 파도들이 계속해서 덮쳐왔다.
바람은 형체가 없지만, 파도를 보고 있으니 바람의 세기가 시각적으로 더 실감이 났다. 멍하니 그 위력을 보다가 등지고 다시 주차장으로 되돌아갔다. 걸어가는 길에도 바람이 우리를 이리저리 휘청이게 해서 엄마와 나는 가운데 아빠를 꼭 붙잡고 갔다. 여섯 개의 눈이 번갈아가며 앞을 확인하며.
그러나 여행은 이제 시작일 뿐이고, 스나이펠스네스는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이기에, 앞으로 가야 할 곳들도 모두 해안가였다. 곧이어 들른 곳은 근사한 기암괴석들을 볼 수 있는 론드란가르 (Lóndrangar) 절벽, 그리고 그다음에 들른 곳은 해안 산책로로 유명한 아르나르스타피 (Arnarstapi)라는 어촌 마을이었다. 된통 당하고 났으니 좀 더 비장한 마음을 다잡았지만, 바람은 매번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같은 곳 맞아?'
아르나르스타피 마을은 여전히 예뻤고 해안가도 여전히 멋졌지만, 오래전 느꼈던 아기자기함은 사라지고 음산한 분위기만이 우리를 반겼다.
그럼에도 해안의 신비로운 암석들은 여전히 우리의 시선을 끌었다. 어떤 건 마치 누군가가 오래도록 쌓아 올리거나 조각해 낸 것 같기도 했고, 어떤 건 완벽한 문이나 창문, 다리 같았는데 이 모든 게 자연이 만들어낸 거라니 경탄이 나왔다.
하지만 멋진 풍경에도, 파수꾼 같은 돌 형상에 다다랐을 때는 드디어 산책이 끝났다는 반가운 안도가 들었다.
바르두르 스나이펠사스 (Bárður Snæfellsás)라는 전설적인 반인 반트롤을 형상화한 석상인데, 그 석상에는 사실 살인과 복수가 반복되는 꽤나 고어한 이야기가 얽혀있다. (오래전 아이슬란드 사가를 사서 읽어보기도 했는데 굉장히 잔인하다.) 그렇지만 이날의 우리에겐 바람과의 사투의 끝을 알리는 반가운 것이었다.
정해진 시간보다 빨리 와서, 근처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와 쿠키 하나 사 먹으니 꿀맛이었다. 이미 점심은 차에서 대충 때웠지만, 이렇게 잠시나마 디저트를 먹으니 기분 전환이 되었다.
차에 타서 일행들을 기다렸다. 창밖으로 보니 다들 여기저기서 얼굴을 감싸며 바람을 맞고 있었고, 우리 일행 외에는 눈에 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역시 이런 날은, 다시 올 가능성이 적은 관광객들만이 빗방울과 바람을 뚫고 꾸역꾸역 산책 아닌 고행을 하는 거였다.
그런데 갑자기 가이드가 차의 방향을 틀어서 다시 주차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안전을 위해 위치를 조정하고 있었다. 문이 갑자기 닫히거나 젖혀져서 위험한 일이 없도록. 그러고 보니 가이드도 만만치 않은 하루였다. 여행하는 우리도 험난했지만, 가이드도 험난한 날. 꽉 찬 19인승 차가 바람에 휘청거리기 일쑤여서, 달리는 속도도 수시로 조절해야 했던 날.
그래도 이제 투어는 막바지로 향하고 있었다. 마지막 목적지는 물개 구경이었다. 가는 길에는 검은색 교회 부다키르캬 (Búðakirkja)를 잠시 구경하고, 이곳에서 보이는 폭포를 반갑게 맞았다. 10년 전에도 보자마자 사진 속에 남겼던 폭포인데, 살짝 비뚤어지게 꺾인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곳이다.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강산이 있나 보다.
그리고 드디어 도착한 이트리툰가 (Ytri-Tunga). 이곳은 디우팔론산두르처럼 지형물이 있는 것이 아닌, 완전히 탁 트인 해변이었다. 그야말로 바람이 신나게 날아다닐 수 있는 곳. 다행히도 놀고 있는 물개 몇 마리를 발견해 이 걸음이 헛되진 않았지만…
"그만 가자!"
"그래 충분히 봤어!"
근처에 고래 뼈도 있다고 해서 구경해보고 싶었는데 거기까지는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강풍을 만나, 우박인가 싶을 정도로 아프게 얼굴을 때렸다. 해변의 모래까지 날아와 온몸을 강타했다. 모래는 코로도 들어오고 가방과 주머니에도 들어왔다. 사막을 달리면 이렇던데 못지않았다.
하루 종일 그렇게 온몸을 감싸며 돌아다니니 너무 힘들었다. 근데 남들도 그런지 다들 돌아오라는 시간보다 빨리 돌아왔다. 골든서클 갔던 날 바람이 이렇게 많이 불었다면, 그 민폐 일행도 빨리빨리 돌아왔으려나.
아무튼 이날은 모두가 서두른 덕에, 차를 빨리 달리지 못했음에도, 게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바닷물이 도로를 덮쳐서 왔던 길이 아닌 다른 안쪽 길로 가야 했음에도, 시내에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마지막 마트 쇼핑?"
다음날 아이슬란드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으니까. 초콜릿이랑 스키르를 사서 집으로 가, 남은 식량들을 털어 마지막 만찬을 엄청나게 푸짐하게 차려 먹었다. 바람으로 온몸을 두들겨 맞아서인지 뭘 먹어도 잘 들어갔다.
안전한 숙소에서 식사를 하고 나니 긴장이 풀어졌지만, 곧 가장 중요한 걱정이 한 가지 떠올랐다.
우리, 내일 비행기는 탈 수 있을까?
뒤늦게 걱정되어 찾아본 케블라비크 공항 정보에는 delay와 cancel이 번갈아가며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