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움과 차가움 사이에 뜬 보름달

골든서클, 흐밤스빅 온천

by 바다의별

반가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문제의 일행은 싱벨리어 국립공원까지, 그러니까 딱 골든서클 투어만 함께 한다는 것. 골든서클 투어 이후 들르게 될 흐밤스빅 온천은 우리 가족과 호주에서 온 부부만 간다고 했다.


"그래.. 조금만 참자, 조금만!"



이어서 들른 싱벨리어 국립공원은 골든서클 투어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했던 곳이다. 예전에 왔을 때 굴포스와 게이시르는 잘 구경했는데, 싱벨리어의 경우 피곤했는지 오는 길에 버스에서 친구와 나란히 잠들어버렸다. 그 덕에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해 주는 내용을 둘 다 하나도 듣지 못한 채, 그냥 두 개의 지각판이 만나는 지점이겠거니 생각하며 걸었다. 어느 게 어느 판인지도 모르고, 그 밑에 맑은 물인 실프라가 있는 줄도 모른 채.



그래서 이번에는 물이 있는 곳까지 한 번 가보고 싶었다. 빠르게 걸어가면 근처까지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레이캬비크의 투파 언덕처럼, 가까워질 듯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냥 우리도 그 사람들처럼 신경 안 쓰고 다니면 좋을 텐데!"



그들처럼 출발시간 안 지켜도 느긋하게 살 수 있다면, 우리 마음대로 가고 싶은 곳 다 보고 원하는 대로 시간을 보내다 갈 텐데. 아마 우리가 제시간에 맞춰가도, 그들은 이번에도 또 늦을 것이다.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한 번 늦는 것으로, 모이는 시간마다 늦는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될 순 없었다.


그냥 물가에서 가까이 실프라가 어디쯤인지 짐작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다시 메인 산책로로 되돌아왔다.



유라시아판과 북아메리카판이 만나는 이 지점도 충분히 멋있었다. 푸른 하늘도 한몫했다. 오래전에 왔을 때는 굴포스와 게이시르를 볼 때 날이 맑았고 싱벨리어에 도착했을 때는 흐려졌는데, 이날은 반대였다.


맑아서 주변 풍경이 탁 트인 풍경, 싱벨리어의 독특한 암석 지형들은 마치 중세시대 같은 느낌이 났다. 이곳의 이름인 싱벨리어(Þingvellir)는 '의회의 들판'이라는 뜻이다. 아주 오래전 아이슬란드 각지의 씨족들이 모여 세계 최초의 민주 의회를 열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이 지각판이 갈라지는 이 자리에 이끌렸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롭다.



이곳에 맞닿은 유라시아판과 아메리카판은 매년 2cm씩 멀어진다고 하는데, 그러면 10년 전에 여행했을 때와 20센티나 차이가 나는 걸까. 한참 뒤에 다시 또 아이슬란드를 방문하게 되면 완전히 더 벌어진 산책로의 모습을 보게 되려나.


아이슬란드를 떠나기도 전에 다시 올 생각을 하며 멋진 산책이 끝났다. 그리고 민폐 일행과의 인연도 여기까지였다.



떠날 때마저도 느긋하게 짐을 챙기고, 아주 천천히 수다를 떨며 내리던 그들. 그래도 그들과 헤어지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가이드마저도 대놓고 속 시원한 한숨을 크게 내쉬며 웃었다. 그도 아침부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으리라. 이제 드디어, 단출하게 온천에 가서 피로를 풀 시간이 왔다.


아이슬란드에는 인기 좋은 온천들이 많다. 단연 블루라군이 가장 대표적이지만, 인파가 많고 입장료도 비싸서 호불호가 다소 갈린다. 우리는 물론 재밌게 놀았지만. 그래서 최근엔 많은 관광객들이 레이캬비크 시내에 위치한 스카이라군, 멀지 않은 시크릿라군 등을 찾는다.


하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곳은 흐밤스빅(Hvammsvík) 온천이었다. 바닷가 바로 앞에 위치한 곳. 바닷물이 맞닿아있는 뜨끈한 자연 온천. 레이캬비크에서 한 시간가량 떨어진 곳이라 렌터카가 없으면 별도로 픽업서비스를 이용해야 하는데, 골든서클과 엮은 투어가 있길래 냉큼 예약한 것이었다.



바닷가에 다가갈수록 기분이 설렜다. 가장 요란했던 일행들이 떠나니, 고요함 속에서 그 설렘을 즐길 수 있었다. 우리 가족과 호주에서 온 젊은 부부, 그리고 가이드.


아주 최소한의 시설만 갖춰진 간결한 탈의실/샤워실을 지나, 얼음처럼 차가운 공기를 뚫고 나가자 순간적으로 몸이 얼어붙었다. 기온이 2, 3도 정도인 데다 하루 종일 바람도 살살 불었기에, 수영복만 입고 돌아다녀도 될 정도의 날은 아니었다. 재빨리 온천 안에 몸을 담그니 몸은 금세 따뜻하게 데워졌고, 찬 공기를 맞는 얼굴도 온천 열기에 조금 달궈졌다. 나른한 행복감이 밀려왔다.



흐발피외르뒤르(Hvalfjörður) 피오르 안쪽에 위치해 있어, 온천에서 보는 경치는 그 어디에도 비할 수 없이 멋있었다. 뜨거운 물이 샘솟는 온천 바로 앞에는 겨울처럼 차가운 바닷물이 있으니 신기했다. 온천 자체가 아주 크진 않았지만 바로 앞에 너른 풍경이 이어지는 듯해 전혀 좁게 느껴지지 않았다.



저 멀리 물개 한 마리가 노는 모습도 발견했다. 몇 달 전에는 운 좋게 고래를 본 일행도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물개 또한 기대하지 않았던 손님이기에 그것만으로 기뻤다.


"바다에 들어가 보지 않을래요?"

"네? 진심이에요? 전 지금 온천탕에서 상체만 조금 내놔도 추운데요?"

"재밌잖아요! 전 들어가 볼래요."


함께 간 호주 부부 중 클라라가 우리를 부추겼다. 그녀의 남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옆에 앉아있던 아빠도 고개를 절레절레.


"같이 가보자!"

"어?"


나는 전혀 갈 생각이 없었는데, 엄마가 갑자기 용감하게 일어났다. 온천에서 몸을 일으켜 찬 공기를 맞는 것만으로도 따가울 정도로 추운데, 바닷물이라니! 하지만 나도 어느새 얼떨결에 일어나 뒤따라가고 있었다.


"으아악!"


앞장 선 엄마, 왼쪽 아래가 나, 오른쪽 아래는 아빠


클라라는 자신 있게 온몸을 풍덩 바닷물에 담갔고, 엄마와 나, 그리고 언제 일어났는지 모를 아빠까지 뒤따라 달려가다... 발목까지만 바닷물에 담갔다가 결국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망 나왔다. '얼어 죽는 줄 알았다'보다 더 심한 말은 없을까. 뜨끈한 온천물에 있다가 찬물에 들어가서인지 몇 배는 더 춥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다음에 곧바로 몸을 다시 온천물에 담그니, 처음 온천에 들어갔을 때보다 몇 배는 더 행복해졌다. 바닷가에 위치해서 그런지 내륙인 블루라군에 비해서는 물이 덜 뜨겁다고 느꼈는데, 극한의 추위를 경험하고 나자 팔팔 끓는 물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바닷속 점은 물개


온천에서 나갈 때쯤엔 보름달이 떠올랐다. 마치 온기와 한기가 만나 빚어낸 듯이.


아이슬란드에서 보내는 두 번째 추석 연휴였다. 이전 해에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그전에는 미국에서, 파리에서... 다양한 풍경 속에서 추석 보름달을 봤지만, 이곳 역시 이곳만의 아름다움으로 근사하게 빛났다. 산 위에 살짝 걸려있는, 반가운 노란 보름달.



소소한 인원이니 각자가 충분히 즐긴 뒤에 떠날 수 있었다. 하루의 피로, 특히 마음의 피로가 뜨끈한 온천물에 씻겨나갔다. 8시 전에 도착한 레이캬비크에서는 김치찌개와 스팸계란볶음을 해 먹으며 나른한 몸에 에너지를 채웠다.


숙소에서 본 보름달은 어느새 더 위로 올라가, 노란빛 대신 하얀빛이 감돌았다. 원치 않지만 시간은 그렇게 계속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