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서버에서 간신히 만렙 하나 찍은 후 버렸던 파판14를 한국 서버가 재개통한다하여 다시 해보았습니다. 이번엔 좀 길게 오래 해보려고 작정하고 괜찮은 길드에 들어가서 사람들이랑 얘기도 하고 … 하면서 보내는 중. 뭐 여전히 지독하게 구린 컨텐츠의 동선이라거나 해괴한 UI 등등 납득 안가는 부분이 무척 많긴 하지만, 그건 오래전에 글로벌 서버 할 때 어느정도 정리해두었으니 이번에는 눈에 들어오는 장점을 좀 정리해볼까합니다. 굉장히 러프한 얘기니까 엄정하게 봐서 뭔가 이상하다 싶은 부분들은 꼭 지적해주십사 …
이건 컨텐츠의 동선이 구린 것과도 연결이 되는데요, 뭔가 할꺼리가 엄청 많아요. 토벌 수첩, 퀘스트, 돌발임무 (필드 이벤트), 각종 의로, 마물 사냥, 던전 등등 디게 많습니다. 런칭후 세월이 좀 지난터라 아무래도 컨텐츠가 쌓여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런걸 노리고 만든 지점은 명확한 것 같아요. 이게 흥미로운 지점은 ‘일종의’ 오픈월드식으로 느껴진다는거죠. 오픈월드식 게임은 아차하는 순간 동선이 난해해지기 쉽잖아요? 파판의 컨텐츠 동선이 구린 것도 그런 측면이 꽤 있지 않나 싶어요. 물론 실수를 된통했다고 봐야겠지만 … 아 장점만 말한다면서 자꾸 단점 쪽으로 얘기가 … ㅋㅋㅋ 아무튼,
오픈월드식 게임의 장점은 그때그때 자기가 흥미를 느끼는 컨텐츠를 골라서 내키는대로 할 수가 있다는거죠. 파판을 보면 레벨업을 하는 경우 대체로 메인 퀘스트 따라가는 경우가 많은데, 메인 퀘스트만 해도 레벨업 진도가 얼추 맞춰진다는 점이 우선 눈에 들어옵니다. 즉 메인 퀘스트의 양이 엄청많은거죠. 그러다 지겨워지면 일반 퀘스트를 두어개 같이 해요. 근데 퀘스트하러 돌아다니다보면 돌발임무가 얻어걸리거든요. 그럼 또 그걸 해요. 그러다 둘러보면 머리 위에 이상한 아이콘이 떠있는 몹들이 있네? 그건 토벌 수첩입니다. 일종의 몬스터 도감 같은건데 이것도 경험치 꽤 쏠쏠하게 주니까 그냥 넘기긴 아까우니 좀 해보죠. 혼자서만 너무 오래 해서 지겨우면 인던 신청해놓고 돌발 뛰다보면 들어가서 파티플레이도 좀 해요.
이거 다 사냥 아니냐고 묻는다면 대체로 그래요. 어차피 다 전투 하라고 만들어놓은거죠. 근데 잘 생각해보면 와우의 레벨업 과정에서 우리가 해야하는 퀘스트들도 대체로 전투가 엄청 많이 들어가거든요. 그래도 어지간히 재미있어요. 못해서 토나올 정도는 아니라는거죠. 메이플2처럼 같은 몹 200마리 잡으라는 퀘스트를 연달아 5개씩 해야하지는 않는다는거에요. 'K몹 200마리 잡아라'와 'A몹 50마리, B몹 50마리 ,C몹 50마리, D몹 50마리 잡아라'는 확실히 다르게 체감되는 부분이 좀 있으니까요.
자 그렇게해서 만렙을 하나 키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그럼 이제 만렙 기본템 갖추고 본격적인 엔드 컨텐츠로 돌입 … 하려는데, 보통 여기서 많이들 막히죠. 엔드 컨텐츠라는게 진입장벽이 의외로 쎄서 쉽게 시작하게 되지가 않거든요. 이럴때 게임에서 이탈하는 사람들도 꽤 되구요.
만렙이 되었으니 던전 파밍 시작하세요. 일반 던전은 공략 뭐 그런거 안보고 냅다 가도 무리없이 클리어 가능하죠. 일반 던전 파밍 끝내고 레이드 가야하는데 아무래도 택틱이나 이런 부분에서 익숙하지가 못하니까 주저되나요? 그럼 뭐 굳이 꼭 그거 하러 갈 필요 없어요. 혼자서도 '현존 최강급’ 장비를 맞추는게 가능하니까요. 부담없이 도전 가능한 일반 던전에서 석판 모으고 이걸로 '현존 최강급’ 방어구 맞춰요. '현존 최강급’ 무기는 일반 던전에선 안나오죠. 괜찮아요. '고대의 무기'라는게 있으니까. 레이드같은거 안가도 무기를 얻을 수 있죠. 단지 그걸 위해 해야하는 일이 '현존 최강급 노가다'라는 점이 … ㅋㅋㅋㅋ 근데 그래도 앞서 설명했던 '비록 노가다여도 다양'하다는 점 때문에 생각보다는 현저히 덜 지루해요. 수직적 노가다를 엄청 높이 쌓아올리는 대신, 수평적으로 다양한 노가다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물론 고대의 무기 만들기의 경우엔 어차피 다 해야한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수직적이지만 적어도 '내가 원하는 노가다를 내가 원할 때 골라서’ 할 수는 있다는거죠.
자, 그렇게, 레이드 한 번 안가고 '현존 최강급’ 장비를 모두 맞췄습니다. 이 장비들로는 '현존 최고난이도’ 던전도 도전이 가능해요. 중간 파밍없이 바로 된다는거죠. 적어도 장비 면에서는 손색이 전혀 없습니다. 유튜브에서 공략 동영상 몇 번 찾아보고 시도할 수 있어요. 사실 이건 글로벌 서버와의 버전 갭을 뛰어넘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긴 하지만, 그것보다도 제가 주목하는건 …
이게 가능한 이유는, 파판14의 레이드가 모두 '보스몹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죠. 한 번 시작하면 2-3시간씩 걸리는 레이드가 없어요. 용건만 간단히. 여러분은 보스몹의 아이템을 가지러 왔으니, 입장하면 바로 보스와 싸우세요. 정말로 입장하면 눈 앞에 바로 보스가 서있어요. 아울러 전투 시간은 길어도 한 판에 10분 정도를 넘지 않아요. 10분만에 첫 도전에 실패했어요? 괜찮으니 원하는만큼 더 도전하세요. 와우에도 최근 확팩에서 도입한거지만, 보상은 일주일에 한 번만 얻을 수 있되 도전 자체는 무제한이에요. 그렇다고 메이플2처럼 던전에 '도전하는데 이미 댓가(열쇠)가 필요'하게 되어 있지도 않아요. 무제한의 도전을 통해 능숙해질 때까지 연습이 가능해요. 실제로 공략도 안읽은 쌩판 초짜 길드원 두 명 데리고 가서 계속 실패하면서 '오로지 채팅으로만’ 설명하며 레이드 하나를 2시간만에 클리어 한 적도 있구요. '보상은 제한적, 도전은 무제한'을 통해 엔드 컨텐츠 진입 장벽을 꽤 얇게 만들어놨어요. 물론 이런 게임 디자인적 측면만이 아니라 글로벌 서버에서 수입된, 전형적인 한국MMO보다 훨씬 느슨하고 타인에게 관대한 문화도 상당한 영향이 있다고보지만 아무튼 시스템적으로도 편하다는 얘기.
자, 그렇게 첫 클래스가 '현존 최강급 장비'를 지니고 '현존 최고 난이도의 레이드'를 클리어하였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보통 여기부터 플레이어들의 '컨텐츠가 없다징징'이 시작되고 개발팀은 쫓기는 마음으로 야근의 필요성에 깊이 공감하게되죠.
근데 파판14는 그걸 완충하는 꽤 괜찮은 장치를 가지고 있어요.
첫 클래스로는 이제 뭐 할 일이 없어요. 다른 MMO에서라면 다음 업데이트때까지 징징거릴 일만 남은 셈이죠. 파판14에선 아직도 더 할 일이 남았습니다. '다른 클래스 키우기'죠. 이 게임에서는 캐릭터 하나로 '모든’ 클래스의 만렙을 찍을 수가 있어요. 첫 캐릭이 딜러였으니 이번엔 탱커를 한 번 해볼까요?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손쉽게 시작할 수 있어요. 저렙 탱커 키우는데 누가 인던 가자고 해요? 좋아요. 그 자리에서 바로 현존 최강급 장비를 가진 만렙 딜러로 변신해서 바로 인던에 가면 되요. 그리고 던전 런이 끝나면? 다시 저렙 탱커 키우는거죠.
'전 클래스 만렙을 찍는 경험치'를 수직으로 쌓아놨다면 안드로메다의 노가다가 되었을거에요. 근데 파판14에선 그렇지 않죠. 오래전 소개했던 다중 성장에서 말씀드렸던대로, 일정한 구간에서 완결된 보상 - 이 경우엔 완전히 성장한 하나의 클래스 - 을 주고 다음 노가다로 가는거에요. 그리고 그 '다음 노가다'가 무엇이 될지는 전적으로 플레이어의 선택에 달려있어요. 여러 클래스를 골고루 동시에 키우는 것도 물론 가능하구요.
그래서 이 게임에선 '할 꺼리가 없다'라는 느낌이 현저히 적어요. 물론 어딜 돌아봐도 모두 '대체로 노가다에 가까운’ 짓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당연히 낫고, 어떤 노가다를 할지가 완전히 내 선택에 달려있으며 - 즉 그때그때 재밌어보이는 노가다를 하면 되며 - 무엇보다 그 모든 노가다들이 확실한 보상 - 성장을 보장하거든요.
다들 아시다시피 저는 매우 전형적인 한국인 MMO 플레이어, 오로지 '캐릭터가 더 강해지는 것'말고는 딱히 관심도 없는, 제작이나 하우징 등은 거들떠도 안보는 플레이어입니다. 그런 제게 파판14의 방대하고 다양한 노가다들은 확실한 강점이에요. 어느쪽 노가다든 제 캐릭터가 강해지는게 명확하게 보여요. 그렇다면 제작/하우징은? 파판14의 제작은 지금껏 제가 해왔던 어떤 MMO들보다도 방대한 노가다 컨텐츠를 가지고 있어요. 하우징은 … 애매한 구석이 많긴 하지만 길드원들 중에 신나서 하는 사람들이 꽤 있더군요.
흔히 '프로젝트 뒤집는다'라고 하죠. 그때까지의 결과물 모두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새로 쌓아올리는 … 솔직히 제가 다니는 회사도 이거 엄청 유명하고, 요새 모바일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넷마블도 이런 짓 지독하게 한다고 들었어요. 개발 실무자들 갈려나가는, 번아웃 촉진제같은 뭐 그런 … 근데 솔직히 말하면 저는 그런 프로젝트 뒤집기가, 필요할 때가 분명 있다고 보거든요. 뚜렷한 장점도 존재하구요. 특히 강력한 장점 중 하나라면, 게임을 만드는 사이에 변화한 시장의 상황에 대응할 수 있다는 점이죠. A트렌드 게임이 유행하기에 A트렌드 게임 열심히 만들어왔어요. 근데 출시하기도 전에 A트렌드는 확 죽어버렸고, B트렌드가 엄청난 바람을 타기 시작해요. 이러면 회사 윗쪽에선 갈등을 느끼죠. 저 트렌드 따라가야하는데 … 이때 이미 실무진은 출시하진 않았으되 프로젝트 하나를 함께 진행하며 팀웍이 얼추 맞아들어간 상황이라, 같은 작업을 새로 시작해서 한다면 좀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결국 경영진은 결정하죠. '뒤집자’ 그리고 고생의 시작 … 처음부터 다시 … 실무자들은 '그간 우리가 해 온건 무엇이었나 …’ 좌절과 허탈 등등.
이건 물론 실무자 입장에선 결코 환영하기 어려운 방식이지만, 불가피한 부분도 없지 않다는게 그간 제 생각이었거든요. 근데 파판14를 해보니 좀 생각이 달라지더라구요. 파판14의 전반적인 게임 시스템이나 디자인의 기반은 최신과 고전이 뒤죽박죽이에요. 왼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오른 손으로는 구석기 시대 돌도끼 휘두르는 느낌을 주죠. 근데 묘하게 여전히 할만해요. 앞서 얘기한 '언제나 할거리가 있다는 장점'이 생각보다 굉장히 강력하기 때문에요. 앞서 언급한 예의 A트렌드 게임을, 굳이 B트렌드 쪽으로 완전히 뜯어고치려하기보다는 적당히 끼워넣으려고 시도한 구석이 많아보여요. 구석기 돌도끼 휘두르는 게임을 만들다가, 시장이 스마트폰을 원하는 쪽으로 변화하니 그럼 뭐 그것도 넣지. 이왕이면 서로 좀 잘 어울리는 쪽으로다가 … 보통 이런 경우는 대실패가 나오기 마련인데, 파판14의 경우는 대실패는 피한게 확실해요. 게다가 A트렌드 게임 만들 때 쌓아뒀던 컨텐츠는 B트렌드쪽으로 전환하면서도 버리지 않았기에, ‘할거리가 엄청 많아요.’
그러다보니 이런 생각도 들어요. '프로젝트 뒤집을 시간에 적당히 타협하고, 대신 컨텐츠를 더, 더더, 더더더더더더더 많이 만들면 …?’ 파판은 앞서 언급한 ‘구조적인’ 측면에서 노가다 활용이 용이한 부분도 있지만, 절대적인 양 자체도 굉장히 많은게 사실이거든요.
물론 이건 파판14가 MMORPG라는 발전 속도가 꽤 더딘 장르의 게임이라 그런 걸 수도 있죠. 수년에 걸쳐 하나 나올까말까하고, 디자인 상의 발전은 최신 모바일 장르에 비하면 말도 안될정도로 느려터진. 뭐 근데 반대로 생각하면, 지금 개발 중인 게임이 최신 모바일 게임이 아니라면 좀 느려도 괜찮지 않겠어요? 컨텐츠가 많다는 것의 장점은 생각보다 엄청 크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