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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lker Nov 02. 2015

MMORPG의 지도

지도가 너무 많아

옛날 게임에는 지도가 없었죠. 시스템이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봤던 지역을 하나하나, 모눈종이에 연필로 그려가며 플레이하던 시절이 있었죠. MMORPG로 보자면 마지막으로 제가 봤던 '지도 없는 게임'은 Dark Age of Camelot이었던 것 같네요. 유저들이 발로 뛰어 밝혀낸 지도들을 짜깁기해서 웹상에서 자기들끼리 공유했고, 플레이어는 /loc 같은 명령어로 자기 좌표 찍어보고, 그걸 자기가 가진 지도에 대입해서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를 계산해내야 했습니다. 여기까진 괜찮습니다. 근데 '좌표 33458-98142 교전!!'같은 얘기가 길드창에 올라오면  그때부턴... 단순 계산이지만 게임하면서 그런 것까지 하려면 엄청 짜증스러웠습니다. 아래 그림을 보시면 지도 옆에 자그마한 숫자들이 쓰여 있는데 그게 좌표입니다. 



그것도 나름 재미는 있었어요. 컴퓨터 게임이 나오기 전에  술래잡기하던 식으로요. 지금은  술래잡기하고 싶으면 잠입 액션 게임을 하는 편이죠. 저는 잠입 액션 게임이 훨씬 더 재미있어요. 따라서 그때로 돌아가서 그 재미를 다시 느끼자고 주장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아무튼, 그랬던 지도는 서서히 거의 모든 게임에 필수적인 요소로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당연히 MMORPG에도 그랬죠. 그러나 사람들은 단순히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어요. 지도를 통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았고 더 편해보였거든요. 그래서 지도는 점차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MMORPG에서 지도의 변화는 와우의 확장팩을 꿰어가다 보면 쉽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오리지널 와우의 지도는 그냥  지도뿐이었습니다. 거기에 나와 파티원들의 위치를 표시해주는 정도였죠. 그러나 플레이어들은 지도를 더 유용하게 쓸 방법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방법들 중에서 중요한 한 가지 변화는 퀘스트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주는 거죠. 


오리지널 와우에서 퀘스트 수행 장소를 찾기 위해서는 오로지 텍스트로만 구성된 내용을 참조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서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야트막한 둔덕이 있는데 그 근처의 늑대들을 잡아서 가죽을 벗겨 와' 같은 거죠. 그러나 여기엔 많은 불분명한 내용들이 있어요. 서쪽으로 가려니까 정서쪽으로 쭉 가면 절벽이 나오네요? 그럼 여기서부터 서쪽이 정서쪽인지 아니면 아주 약간 남서 또는 북서인지 헷갈리죠. 시작 지점에서 각도가 조금만 틀어지면 갈수록 차이가 점점 더 벌어져서 혼란에 빠지기 쉬워요. '야트막한' 이란 또 어느 정도 일까요? 등판각 15도 정도면 야트막하다고 할 수 있나? 근데 이건 직접 눈으로 보면 꽤 높아 보이는데 너무 가파른 건 아닐까? 늑대는 또 어떤가요? 그냥 늑대라면 모르지만 근처에 가봤더니 붉은 갈기 늑대들과 푸른 수염 늑대들이 있어요. 어느 쪽일까요?? 



플레이어들은 애드온을 통해서 이런 난점들을 해결했습니다. 지도 위에 정확한 퀘스트 수행 장소를 표시해주는 거죠. 복잡하게 텍스트를 읽고 정서쪽인지 약간 남서쪽인지 고민할 필요 없이, 야트막한 언덕이 어느 정도로 야트막해야 하는지 생각할 필요 없이, 그냥 지도를 펴보면 어딘지가 다 나옵니다. 거기까지 가는 길에 장애물이 있더라도 어디로 우회하면 되는지도 보여주죠. 이런 애드온들이 아주 널리 쓰이게 되자 와우는 그냥 이 기능을 게임 내 HUD로 가져와버립니다. 별도의 애드온 없이도 퀘스트 수행 장소를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되죠. 


한편 와우가 소개한 퀘스트가 널리 쓰이던 와중에 이런 퀘스트 시스템에 식상한 이들은 필드 이벤트 중심의 게임을 꿈꾸기 시작했고, 길드워 2는  그중에서도 꽤 완성도 높은 형태로 '필드 이벤트 중심의 게임'을 실현해냈습니다. 길드워 2에 오면 지도의 쓰임새는 더더욱 중요해집니다. 지도를 펴봐야만 근처의 필드 이벤트 상황을 알 수가 있거든요. 퀘스트 중심의 와우에서는 이런 정보들이 '고정' 되어있습니다. 때가 되면 정해진 지점에 가면 정해진 퀘스트를 받을 수 있죠. 길드워2에서는 이런 요소들이 실시간으로 변화합니다. 어딘가에 가면 반드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요. 필드 위에서 서사는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그에 따라 플레이어들이 해야 할 일들도 계속해서 실시간으로 변화하거든요. 이런 상황들을 플레이어에게 그때그때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서 지도의 중요성은 크게 올라가죠. 그 외에도 활성화시킨 텔레포트 포인트, 근처의 볼거리 포인트 등도 알려줄 필요가 있구요.


그런데 길드워 2의 지도는 와우의 지도와는 미묘하게 성격이 다른 부분이 있었습니다. 와우의 지도는 철저히 가용/비가용 면적을 중심으로 보여줍니다. 어디가 갈 수 있는 곳이고 어디가 갈 수 없는 곳인지, 어디에서 어느 쪽으로 일방통행 (절벽 등,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는 낙하를 통해 이동이 가능하지만 반대로는 이동이 불가능한 지역) 인지, 어디에 마을이 있는지 등을 명확하게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죠. 와우의 지도는 '이동정보'를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있어요. 


길드워 2에는 와우에는 없는 일종의 '길 찾기 퍼즐' 같은 게 있습니다. 목표 지점을 주고, 거기까지 가는 길을 적당히 꼬아놓고, 길을 찾아서 가보라는거죠. (듣기론 짜증날 수 있지만 직접 해보면 길찾는 과정이 꽤 재미있기도 해요.) 따라서 지도가 와우같이 구성되면 길 찾기 퍼즐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와우식의 지도에서는, 지도만 보면 다 알 수 있는데 굳이 길을 찾으려 노력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이 지점을 해결하기 위해 길드워 2의 지도는 고의적으로 다소간 모호하게 꾸며진 부분이 있습니다. 



길드워 2는 제가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 현재까지 '가장 진보된 MMORPG'입니다. 나온지 꽤 오래된 게임이 '가장 진보된'이라니 이상하지만, 요새는 MMORPG들 자체가 별로 나오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요. 물론 제가 아직 해보지 못한 MMORPG들 중에서 더 진보된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지만요. 아무튼, 그렇게 '가장 진보된' 게임이기에, 지도 시스템도 나름 꽤 최첨단이에요. 게임의 중심인 '실시간으로 발생하는 이벤트들'의 정보를 쉽고 편하게 잘 전달해주죠. 그런데, 지도에 한해서라면 이보다 더 앞섰다고 보는 게임이 있습니다. MMORPG는 아니고 MMOFPS인데요, 일단 게임 자체는 거의 폭망 확정이라고 보지만 눈여겨 볼만한 지점은 꽤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지도 및 지도와 맞물린 게임의 시스템이고요. 


파이어폴이라는 게임입니다. 파이어폴은 퀘스트가 아예 없고 실시간 필드 이벤트만으로 구성된 게임입니다. 방금 소개드린 길드워 2와 굉장히 비슷하죠. 그리고 이런 게임에서 지도는 굉장히 중요해요. 플레이어들에게 할 일이 있는지, 어디로 가면 그걸 할 수 있는지를 알려줘야 하거든요. 퀘스트도 물론 마찬가지지만 퀘스트는 고정적이죠. 그러나 필드 이벤트 중심 게임들은 이런 게 실시간으로 변동하기 때문에 지도가 한층 더 중요해집니다. 


그리고 파이어폴에는 길드워 2에는 없는 '지역 침공'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몬스터들이 어떤 지역으로 대거 쳐들어오는데, 이걸 막지 못하면 그 지역의 '레이더가 OFF'됩니다. 지도를 보여주는 주체는 게임 내에서 레이더로 상정되어 있고, 이 레이더가 OFF 된다는 것은 즉 그 지역의 지도를 볼 수 없게 된다는 의미죠. 



파이어폴의 지도 스크린샷입니다. 파란색 레이더 아이콘들이 보이죠. 여기는 레이더가 살아있는 지역들이에요. 이 지역에서 어떤 이벤트가 벌어질 경우 레이더를 통해 감지하여 플레이어들의 지도에 표시해줍니다. 그러면 플레이어들은 그 지역으로 달려가 이벤트에 참여하는 거죠. 중앙 하단의, 레이더가 붉은 빛으로 점멸하는 듯한 지역이 보이나요? 여기는 현재 이 지역이 몬스터들에게 공격받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빨리 달려가서 침공을 저지하지 않으면, 바로 오른쪽의 두 지역처럼 레이더가 아예 꺼져버립니다. 그러면 이 지역에서 일어나는 이벤트에 대한 정보를 전혀 알 수가 없어요. 


게임의 시스템이 지도와 연동 (지도의 주체 레이더 = 게임 내에 실존하는 오브젝트) 되어 있고, 그것이 게임 플레이와도 연계되는 거죠. 레이더 탑을 방어해내지 못하면 페널티를 받게 되는 거예요. 그 페널티는 지도가 무쓸모 해지는 것으로 나타나고요. 


지금까지 MMORPG의 지도의 사용에 대해 제가 아는 데까지 설명하긴 했는데, 사실 저는 지도를 계속해서 폈다 접었다 하는 게 너무 귀찮아서요. 지도의 기능을 대체할 수 있는 좀 더 인게임스러운 뭔가가 나오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지도의 기능은 점점 강력해지고 확장되어 왔죠. 그러나 지도는 엄연히 HUD의 하나이고, HUD가 간략해지면 그에 따라 재미있어지는 부분들도 있으니까요. 대전 격투 게임을 할 때 화면 상단의 체력 게이지를 보고 판단하기보다는 상대 캐릭터의 숨소리나 자세를 보고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면 더 재밌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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