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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lker Nov 18. 2015

내가 사랑한 MMO들 1.

리니지

저는 어릴적부터 게임을 많이 해왔습니다. MSX와 애플로 시작해서 패미컴과 슈퍼패미컴까지. 열심히 용돈을 모아 게임기와 게임팩들을 샀었죠. 입대전날에도 슈퍼패미컴으로 동생과 스트리트 파이터2 터보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14박 15일간의 휴가 때는 새로 나왔다는 플레이스테이션이라는 게임기로 파이날 판타지 7편도 플레이하고요. 


제대하고 나서는 예비역의 사명을 안고 학교가서 꼰대질하랴 후배들 밥 사먹일 알바하랴 한동안 바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집 앞에 마실을 나갔는데 ‘PC방’이라는게 새로 생겼다더군요. 저게 뭘까 신기해하면서 들어가 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라는 게임을 하는 이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스타크래프트는 이미 알고있던 터라 리니지가 뭔지 주인 아저씨에게 물어봤더니 요즘 뜨는 게임이라더라구요. 첫 인상은 몹시 구렸습니다. 이게 게임이라고? 파판7의(지금보면 엄청 각졌지만) 현란한 3D 그래픽에 익숙해져버린 제 눈에 조악한 도트가 얼마 되지 않는 프레임으로 움직이는 리니지는 게임 같지도 않았어요. 고고한 게이머부심으로 가득한 제 눈에는 마뜩찮았지만, 사람들이 많이 하잖아요. 일단 저도 자리에 앉아 시도를 해봤죠.


그리고 짧은 시간 동안 크나큰 좌절을 겪었습니다. 당시의 리니지는 엄청나게 혹독하고 무자비한 게임이었습니다. 게임이 플레이어를 대하는 방식도 그랬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또한 그러했죠. 저는 영어로 된 아이디를 가졌다는 이유로 외국인으로 오인받아 한국 게임을 점령하러 온 외세의 무리로 간주되었고 즉결처형을 당했습니다. 여러 번이요. 한국사람이라고 몇 번에 걸쳐서 말을 해보았지만 그저 한국말을 좀 배운 외국인 취급을 받을 뿐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아이디를 한글로 했더라면 … 싶지만 그땐 왜인지 그러기 싫었죠. 


저는 게임을 껐습니다. 이런 구닥다리 그래픽에 불친절한 유저들이 가득한게임이라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걸 게임이라고 할 수나 있는건가? 저는 분노했습니다. 이런 게임이 성공할 리가 없다고 확신하며, 이딴 게임을 하는 자들은 모두 게임의 진정한 모습을 모르는 저급한 이들이라 욕하며 자리를 떴죠. 


얼마후 신문기사에서 봤습니다. 리니지 열풍, 리니지 신드롬, 리니지의 대히트,한국에 게임의 시대 열리나 등등. 제 기준에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일이었지만 현실에서 리니지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히트한 게임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처럼 보였지만요. 


사실 그 이후로도 그 PC방엘 가긴 자주 갔습니다. 그땐 집에 제 개인 컴퓨터가 없었거든요. 스타크래프트도 하고 웹서핑도하고 등등. 그러면서 그 PC방 단골들과도 꽤 친해졌죠. 대부분 리니지를 하는 형들이었습니다. 형들은 자주 저를 꼬드겼습니다. 같이 리니지하자구요. 저는 첫인상이 너무 안좋았기에 주저했지만 어느날 공성전을 끝내고 기분이 업된 형들이 쏜다기에 따라갔던 술자리에서 결국 승락하고 말았습니다. 다음날부터 형들과 같은 서버에서 리니지를 시작했죠. 


두 번째로 시도한 리니지는 크게 달랐습니다. 재밌고 흥미롭고 화끈한일들로 가득한 굉장한 게임이었죠. 사람들이 왜 리니지를 좋아하는지, 리니지가 왜 대박 게임이 될 수 있었는지가 뇌를 거치지 않고 가슴으로 바로 이해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건 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개차반 게임으로 보였는데 두번째는 아무런 위화감이 없이 엄청나게 재미있게 느껴졌었죠. 게임 자체엔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게 꽤 이상한 일이더라구요? 왜 이런 차이가 생긴걸까요?


뒤늦게 돌이켜보면 ‘PC방 형들’이꽤 컸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저는 혈혈단신이었습니다. 의지할곳도 아는 이도 없이 초창기의 리니지라는, 혹독한 야생의 정글에 던져진 셈이었죠. 게임의 재미를 느낄 새도 없이 계속해서 죽어나가야만 했구요. 그러나 두 번째 시도에선 달랐습니다. 저의 편을 들어줄 강력한 아군들에 의해 보호를 받을 수 있었거든요. 사실 제가 가던 PC방은 서버 내에서도 이름 좀 있다는 어떤 혈맹의 아지트였습니다. 제가 ‘아는 형들’이라고만 생각했던 이들이 그 혈맹의 수뇌부였구요. 말하자면 혈맹이라는 ‘커뮤니티’에 속한 상태로 게임을 시작한거죠. 리니지라는 게임은, 커뮤니티에 속해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 그 재미가 엄청나게 달라지는 종류의 게임이었던 겁니다. 


이런 깨달음을 통해서, 저는 게임을 보는 관점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제 관점 자체가 달라졌다기보다는, 다른 관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리니지를 처음 시도했던 무렵 저의 관점에서 좋은 게임이란 파판7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머신을 이용한 3D 그래픽과 박진감 넘치는 전투 시스템을 통해 미려한 스토리와 감동적 반전을 풀어나가는 것. 그에 비해 리니지는 2D 도트 그래픽으로 타일과 타일 사이를 이동하며 단순 클릭으로 전투를 하는, 스토리따윈 존재하지도 않는 게임이었죠. 그러나 두번째 시도를 통해 성공적으로 리니지의 재미를 깨달으면서, 파판7을 정해진 진행을 통해 정해진 스토리를 풀어나갈 뿐인, 혼자서 조용히 플레이하는 게임으로, 그에 비해 리니지는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 속에서 내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PC방 옆자리 사람과 서로 기쁨에 찬 탄성을 나누며 플레이하는 게임으로 볼 수 있게 되었던 거죠.


리니지의 대성공으로 인해 이후 수년간 리니지를 본따되 각자 자기들만의 독창적 컨텐트를 가미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졌지만, 이들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의 인식이 존재했습니다. 바로 ‘MMORPG에서는 커뮤니티가 매우 중요하다’라는 것이었죠. 좋은 게임에서는 커뮤니티가 활성화되기 마련이고, 커뮤니티는 게임에대한 플레이어들의 충성도를 높여주고, 그리고 커뮤니티는 … 그래서 커뮤니티는 … 그렇게 2000년대 중반까지 커뮤니티란 MMORPG의 뼈대이자 심장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저 또한 이런 인식을 확고하게 지지했습니다. 제 자신이 바로 그런, 커뮤니티를 통해 게임의 재미가 극과 극으로 갈린다는걸 직접 체험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이 인식은 이후 제가 플레이했던 다양한 다른 MMORPG들을통해 좀더 확장되거나 때로 변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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