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짧게 나타나는 가장 긴 고민
책을 만들면서 가장 어려운 게 뭐냐고 물으면 나는 '제목 짓기'라고 답하련다. 작가를 발굴하는 것도 나에게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실 발굴까지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내 주변에 글 잘 쓰는 여자들이 너무 많다.
왜 저 여자의 글이 책이 되지 않는 걸까?
저런 여자가 쓴 글이 책이 되어야는데...라는 생각으로 내가 그녀들의 글을 모두 책으로 만들 능력이 없음을 탓하면 탓했지, 작가 발굴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물론 좋은 작가와 연결되는 건 완전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베스트셀러 작가라든지 이미 이름 석자가 브랜드가 되어버린 작가'님'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아직 다가가기 어려운 처지이다. 인세 줄 능력도 초기 배본할 책을 인쇄할 능력도... 대체적으로 경제적인 능력이 못 받쳐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만들 때 가장 경제적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는 효과를 노리는 편인데... 그게 바로 제목과 디자인인 것 같다. 사람들의 생각을 건드리는 제목, 시선을 끄는 디자인이 매번 가장 관건처럼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제목'이야말로 편집자가 제일 자신의 능력을 한 번에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어서... 늘 욕심을 내고 과하게 고민하고 주변 사람들을 괴롭혀가며 묻고 따지며 의미 없는 논쟁도 부지기수로 했다.
나중에 책을 펴놓고 후회하지 않을 제목을 만들자, 까지가 내가 심정적으로 나 자신과 합의한 제목 짓기의 합리적인 심리적 마지노선이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한 번도 제목으로 후회나 아쉬움이 남은 적은 없었다.
물론 다른 출판사 책들의 제목을 보면서 부러워하고 무릎을 탁 치며 감탄하는 경우는 제법 있는데... 아주 주관적으로 2019년에 가장 잘 지은 책 제목을 꼽자면 바로 [나는 엄마가 먹여 살렸는데]이다.
제목 안에 메시지와 콘텐츠를 모두 명확하게 잘 담고 있는 데다 공감의 여지도 무척 잘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가족을 부양한다는 것의 의미를 '경제'에 가둬 생각해도, 그저 먹여 살리는 '노동'으로 생각해봐도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엄마'의 손에서 자랐다.
그걸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만의 특수하고 복잡다단한 가정사가 있을 것이다.
부모와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는 그런 특수한 가정사 말이다. 그런 특수한 가정사를 가진 이들조차 사실 먹여 살리는 역할을 누군가 했을 것이고,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마음으로 '엄마'라고 느꼈을 것인데..'엄마'라는 존재가 생존능력이 없는 이들을 돌보고 독립시키는 역할을 해왔다는 측면을 강하게 보여주는 부분이 아닐까?
여하튼 여성노동운동사를 개인들의 에세이와 타임라인으로 엮어낸 [그곳에 내가 있었다]를 펴낸 이로써 가장 부러운 제목이었다. [나는 엄마가 먹여 살렸는데]의 제목을 [그곳에 내가 있었다] 한편에 꼭 남겨 내용의 연결을 보여주고 싶어서 [나는 엄마가 먹여 살렸는데]의 작가에게 추천사도 받았다. 그로써 미련은 없었다.
그 외 [여성을 위한 별자리 심리학]의 원래 제목은 섹스 사인 SEX SIGNS였다. 성적인 차이와 그것을 표현하는 별자리마다의 특징을 표현하는 내용이어서 영문의 원제는 SEX SIGNS였다. 미국이나 영어권 나라에서는 이 제목 때문에 엄청 팔린 것 같다. 그래서 2003년도에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될 때에도 그 제목을 버리지 못하고 '여성을 위한 별자리 심리학'을 부제로 넣고 제목으로는 크게 SEX SIGNS를 부각했다.
워낙 내용이 클래식할 정도로 우수해서 명상과 타로, 치유, 심리, 힐링이라는 키워드에 꽂힌 여성들 사이에서는 입소문을 타고 많이 팔렸지만 결국 대중서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제목이 다는 아니었겠지만 제목이 어떤 이들에게는 편견을 심어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편집자로의 내 판단이었고 2019년 개정증보판에서는 과감하게 SEX SIGNS를 버리고 '여성을 위한 별자리 심리학'을 제목으로 결정했다.
이 책은 대중서로 나아가는 걸 기대하는 것보다 영원히 회자될 수 있는 별자리계의 고전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이 책을 출판하면서 하늘의 별자리 해석조차 '남성 중심적인 메커니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서 그저 이 책이 존재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감사하게 되었다.(그러니까 더 야망을 가져야 했나 싶긴 한데... 나는 야망보다는 생존을 택했다. 그게 더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이리라)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이프북스의 베스트셀러 '근본없는 페미니즘'. 이 책은 제목 때문에 출판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 이 책의 원고를 갖고 있던 이가 출판사들에게 모두 거절을 당하고 매우 낙담해 있을 때 우연히 우리와 만나게 되었다. 그때의 만남은 '출판'과 아무런 관련도 없고 그저 서로 하소연을 하기 위해 만났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정도로 우연이었다. 그래서 나는 솔직히 이제와 고백하자면, 지나칠 정도로 우연히 만난 이 원고의 출판을 망설였다. 어떤 도전이 될지 '제목'에서 이미 견적이 나왔기 때문에 선뜻 그럼 우리가 출판하겠다,라고 나서지 못했다. 바로 그때 이프북스 관계자인 Y와 J가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출판을 강력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못 이기는 척 출판을 결정했다. 사실 나는 거절할 핑계가 전혀 없었다. 나 또한 그 불온한 냄새가 강한 제목이 너무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온라인이라는 공간에서 떠돌며 악착같이 존재를 드러내려고 애쓰는 신세대 페미니스트들을 가장 적합하게 표현한 제목이었고 도서의 내용도 그랬다. 그 책은 그렇게 입소문과 온라인상의 무수한 공격을 받으며 무럭무럭 팔렸고 '이프북스'라는 출판사의 존재를 자리 잡게 했다.
이프북스라는 출판사의 근본이 되어줬달까? 이 책을 해외로 수출하는 것이 지금 현재 내가 가진 가장 원대한 희망사항이 되겠다.
to be continue ~
(다음에 최근 출간한 [여성관음의 탄생]과 출간을 준비 중인 [feminist ghost stories - 특별한 소녀]의 제목과 그 외의 이야기를 이어나가기로...)
#나는엄마가먹여살렸는데 #이프북스 #달나라딸세포 #그곳에내가있었다 #여성을위한별자리심리학 #근본없는페미니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