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작가의 여성 중심 서사, 그 흥미진진함에 빠져들다
이제까지의 내 고백 중에 가장 충격적일 고백을 하나 하자면...(그동안 너무 빈번하고 가벼운 고백을 했던 것 같다는 반성을 이쯤에서 해본다^^; ) 나는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렸을 적에는 책 읽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아주 싫어했다는 게 더 솔직한 표현이다.
얼마나 책 읽기를 싫어했냐면, 언니와 오빠가 나를 책 한 권과 함께 방에 가둔 적이 있었다. 바깥에서 잠그도록 된 잠금장치가 있는 방에서 나는 책 한 권을 다 읽어야만 나갈 수 있는 미션을 받고서야 어쩔 수 없이 읽었다. 그 책이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였는지 [모모] 였는지 헷갈린다.
어린 시절에 내가 읽은 첫 소설인데. 어린 시절에 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소설이 달랑 저 두 개인데도 뭘 먼저 읽었는지 나는 기억이 가물가물 흐릿하기만 하다. 그 정도로 나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았다. 저 두 소설은 참 감명 깊게 읽었어서 줄거리도 잘 기억하고 있는데.
여튼 나는 소설보다 사회비평서, 미스터리와 역사와 상식, 철학을 다룬 인문교양서, 자기 계발서, 잡지를 더 선호했다. 주로 내가 필요하고 알고 싶은 정보들이 있는 책을 지금도 좋아한다.
그러나 예전처럼 소설을 극히 꺼리지는 않게 되었다.
2000년부터 2005년까지 페미니스트저널에서 독자관리 팀을 지나 편집부, 인터넷 담당자로 온갖 일을 다 하면서 알게 된 여성 작가의 여성 중심 서사의 소설들을 알게 된 것이다.
김형경 작가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은 세 개의 시리즈를 다 사서 읽었다. 전혜성 작가의 소설 [마요네즈]는 울다가 웃으며 읽었고 권지예 작가의 단편집 [뱀장어 스튜]를 읽으면서는 단편이 가진 매력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소설 덕후도, 문학작품 마니아도 못되었던 나는 딱 그 정도에 머물러 있는 독자였다.
역시, 여자의 시선으로, 여자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소설들은 매력 넘치는구나! 를 아는 정도.
이프북스 편집자가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는 내가 소설을 편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왜 못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참 용감하고도 무식하게 출판사의 편집장을 맡으면서 문학작품의 편집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불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내심 믿는 구석(문학! 하면 나! 하는 선배들)이 있었고, 전문가를 섭외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만 있었다. 그리고 무식하고 용감했던 대가로 나는 결국 소설을 편집하는 상황을 맞았다.
소설 편집의 물꼬를 튼 계기는 인도 페미니즘 출판사 '주반북스'와의 번역 판권 계약 성사였다. 주반북스에서는 다섯 권의 독점적 번역 판권을 이프북스에 제시했고 이프북스 편집자로서 좋은 기회라 흔쾌히 다섯 권 모두 계약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중에 네 권이 소설이고 한 권이 에세이.
그중 첫 출간 도서가 바로 다큐소설 [작전명 서치라이트 - 비랑가나를 찾아서]였다. 그리고 두 번째가 단편소설 15권을 엮은 [페미니스트 고스트 스토리 - 특별한 소녀]였다. 이제 좀 소설 편집에 대해 자신감?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아니 자신감까지는 아니더라도 두려워하지는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던 시점에 편집하게 된, 아니 편집하고 있는 이 책이 바로 [그 강이 잠들 때]이다.
[그 강이 잠들 때]는 장르부터 난해하게 다가왔다. 매직 리얼리즘 픽션? 그게 뭔가 했더니 이미 내가 어렸을 적 읽었던 [모모] 같은, 마법이나 마술 같은 소재를 현실과 리얼하게 엮어내는 문학 기법의 소설을 통칭하는 용어였다. [연금술사] [백 년 동안의 고독] 같은 소설이 매직 리얼리즘 픽션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로 알려져 있다. 워낙 유명한 매직 리얼리즘 픽션 [연금술사]와 [백 년 동안의 고독] 같은 작품도 그러나 '재미없다'거나 '지루하다' 또는 '좋은지 잘 모르겠더라'라는 평이 의외로 있다. 나 같이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다가 워낙 '여성'중심적인 서사를 좋아하는 여성 독자들에게서 이런 평을 발견했다. 도저히 감정이입이 별로 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즘 도서 전문 출판사 편집장이라는 타이틀 하에 고군분투 중인 나에게 [그 강이 잠들 때]는 잘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불끈불끈 나는 책이었다.
[그 강이 잠들 때]는 노르웨이에 현재 거주 중인 인도 나가 랜드 출신 여성 작가 '이스터린 키레 Easterine Kire'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스터린 키레는 '나가 랜드 Nagaland'를 주요 소재로 여러 작품을 썼고 인도 나가랜드 문화에 대해서 연구하고 조사하자면 꼭 언급될 정도로 유명한 여성 작가이다.
무엇보다 이스터린 키레의 수많은 작품 중 [그 강이 잠들 때]는 2016년 힌두 문학상을 수상한, 문학적으로 인정받은 작품이어서 꼭 잘 출간해서 국내에 선보이고 싶다는 욕심이 났다.
*여기서 잠깐***'나가랜드'는 인도 서북부에 위치한 작은 지역으로 인디아 대륙의 원주민인 '나가족'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다. 그들은 인도로부터 행정적 정치적 독립을 요구하고 그 요구가 어느 정도 받아들여져 그들 특유의 세계관을 유지하며 독특한 문화를 간직한 채 살고 있어 관광지, 로도 알려져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문화만 알려졌지, 인디아 대륙의 문화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는 편이다. 그들의 생활습관, 현실, 가치관 같은 것들을 문학작품으로 만날 기회는 없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여성 작가의 작품에, 인도 소수민족의 전설에 관한 소설이라니~.
이 책의 출간을 위해 텀블벅 펀딩 프로젝트를 오픈했고 100명이 넘는 예비 독자들을 확보했다.
북튜브를 찍고 이 책의 리뷰를 수집해 카드 뉴스를 만들고, 뉴스레터도 발행했다.
최대한 많은 이들이 보고 같이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나눠보고 싶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이제 텀블벅 펀딩이 오늘 몇 시간 후면 마감된다. 다행이 펀딩 달성율 100%는 완성했으므로 이 책은 6월 말에 출간이 확정되었다. 한국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어주실지 설렌다. 소설이 어려운 내가 소설을 출간하면서 설레이는 마음까지 갖게 되었다니...개인적으로도 이 책은 나를 편집자로 한 단계 성장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출간할 수 있게 펀딩한 후원자들을 위해 도서의 편집과정과 출간과정을 생생하게 커뮤니티에 기록하는 중이다. 출간 후에는 출간과정, 서사의 독특함, 낯선 문화에 대한 표현들,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독자들과 나눌 수 있는 이벤트도 기획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텀블벅 펀딩 링크에 연결되면 알 수 있습니다)
* 이스터린 키레의 구글링 링크
https://www.tumblbug.com/ifbooks13
*이 책에 대한 북튜브 링크 (쑥쓰러워서 공유 안하려다가 책의 내용이 궁금한 분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