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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박선영 Dec 30. 2015

아들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

여성 혐오주의 시대에 여자로 살면서  남자아이를 어떻게든? 키워보기

누군가 인정하든 안 하든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자부하며 솔로의 생활을 즐길 만큼 즐기다가 결혼한 여자였던 나는 아들이 아닌 딸을 원했다. 내가 아들을 낳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는 없는 거라고...

처음  뱃속의 아이가 아들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이나 확인을 했는지 모른다. 답답해하던 간호사가 초음파 사진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똑바로 보라고  이야기했을 때에 난 포기하듯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래도 마치 갈릴레이라도 되는 듯 '흥, 낳아봐야 안다 뭐' 했었다.

결국 낳았고 아들이었고 난 키워야 했다. 그래서 첫 아이이자 아들을 나는 혼란과 무지 속에서 키웠다. 또한 분노도 있었다. 그 분노는 설명하기 어렵다. 심하게는 저주를 받은 느낌이었고 약하게는 누군가 날 놀리고 있다는 자괴감에 늘 빠져 살았다. 같은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과 이야기 나누며 웃고 떠들고 같이 돌아다녀도 난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대부분의 엄마들이 하는 모든 것을 그냥 나도 무조건 따라 했다. 백화점 문화센터에 다니고, 학습지를 신청해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며 시간을 보내고, 아이 엄마들과 점심에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2~4시간을 떠들며 시간을 죽였다.  그때 나는 미쳐도 살아야 했고 아이를 죽이지 말고 키워야 했고 어쨌든 살아야 했다. 닥치는 대로 그냥 했다.

그래도 생각이란 건 멈추지 않고 나를 괴롭혔는데,  그때 내가 가장 이해되지 않는 건 '모성'이었다. 진짜 모성이라는 게 나한테 있단 말인가. 내가 미치지 않고 이 아이를 잘  키워야겠다고 생각하는 이 마음은 모성일까 인간성일까...

그러던 어느 날... 모유 수유하면서 너무나 평화롭게 잠든 아이를 보다 갑자기 북받쳐 하염없이 울었다.

"난 이렇게 미치겠는데... 이렇게 미치겠는 나의 젖을 빨면서 넌 평화롭구나. 내 안에 뭔 평화가 있긴 있나 보다. 모성 이건 인간성 이건... 너는 나와 같이 살아야 하는구나. 우리는 사랑할  수밖에 없겠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그냥 산후우울증상이었는데 어쨌든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아들과 사랑에 빠진 게...

태어난 지 1년도 안된 말도 못하고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 그 작은 아이가 그토록 든든하고 사랑스럽고 끊임없이 뿌듯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깨달음 같은 거였다.

엄마와 아이는 생존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끈끈한 마음은 어떤 단어로도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 그건 어떤 정치적 이념으로  가치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 깨달음이 어설펐음은 내가  그러면서도 마음 한 편에 아들을 남자로 잘 키워낸다는 것도 어마어마한 프로젝트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거다.

그렇게 힘들게 얻은 어설픈 깨달음은 둘째를 임신하자마자 약효가 떨어져 버렸고, 난 역시 또 딸을 간절히 원했다. 내가 마음을 고쳐 먹고 열심히 살아서 하늘이 나에게 딸을 주는가 보다, 그렇게 두 번째 임신을 받아들였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딸일 거라며...

둘째 초음파 검사를 하고 '아들'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눈물이 조르르 흘렀다. 그리곤 펑펑 울었다. 의사가  어이없어하고 나를 뭐라 뭐라 혼냈는데... 그 상황이 좀 면구스러워 눈물은 멈췄지만 그럼에도 내 머릿속에는 이건 비극이라는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마침 당시 친정 엄마가 오래된 지병인 간경화로 병원에 입원하던 중이어서 그러지 않아도 슬프고 비참하던 난 나를 둘러싼 비극 중 하나로 둘째 아들을 꼭 꼽았던 것 같다.

그러던 또 어느 날... 상쾌하지 만은 않은 도시의 가을날 어느 거리에서 잠든 큰 아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불룩 튀어나온 배를 감싸 안고 혼자 뒤뚱뒤뚱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아들 둘이 장난치며 내 주위를 맴도는 그림이 그려졌다. 그건 상상이었는데 그 상상 속에서 내가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아들들과 같이 장난을 치며 깔깔대고 있었다.

뭐 어렸을 때부터 남자아이들 못지않게 짓궂었으니 내가 아들을 키우면 아마 같이 장난치며 친구처럼 지내는 엄마는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던 것 같다. 그러자 비극은 한 순간에 희극이 되었다.

삶은 유머를 아는 사람에게 '긍정'이라는 에너지를 준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삶을 제법 행복하게 유지하는 비결이 된다. 그리고 난 이내 행복해졌다. 나를 믿기로 했다. 이제까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시 한번 찬찬히 생각해 볼 여유도 생겼던  듯하다. 나의 잘못들, 되풀이되던 실수들은 어쩌면 늘 나의 조급함 때문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고 인내하는 것을 못 견뎌하던 나의 모습이 나에게 남겨준 게 무엇이었는지 냉정하게 계산하고 싶어 졌다.

그렇게 받아들이게 된 아들 키우기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나에게 한계를 느끼게 한다. 체력의 한계, 인내의 한계, 이해의 한계... 재미있는 건 그 모든 건 그냥 내 한계일 뿐 내 아들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늘  힘들어하고 화내고 훈계하는 나를(최근에 내가 깨달은 사실 중 하나는 훈계는 소통이 아니라 일방적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나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행동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르치는데... 그게 바로 훈계의 핵심이었다) 아이들은 사랑한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인다. 아이를 키우면서 겸손해지는 부분이다.

내 아이들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의 성을 갖고 태어나 사회적으로 길러진다는 것에 대해서 늘 경계할 테지만... 적어도 내가 엄마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한 것처럼 다른 여자들도 사랑할 수 있게 되리라 믿는 것이 현재는 내 가장 강력한 희망이다. 아들을 키우는 엄마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도 설명되리라 믿는다.

여자와 남자가 한 사회에서 아니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서로의 자원을 공유하고 행복하게 살자면... 결국 서로 사랑해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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