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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박선영 Apr 19. 2016

이사 스토리

한 여자가 10여년간 10번도 넘게 이사다녀야 했던 이야기

하루 종일 밥 세 끼 대신 죽 세 그릇 먹고 

이사준비(고양이들이 문지방을 심하게 긁어놔서 임차인의 원상복귀 의무로다가 문 지방 세 곳을 빠대로 메꾸는 작업)를 하고 

두 아들 어린이집 유치원 보내고 데리고오고, 청소, 빨래, 식사준비, 설거지, 재활용 분리수거...

여기에 내 일도 놓치지 않으려면...일단 배가 고프다. 미치게 배가고프다,,, 

난 시방 21세기의 서울에 사는 배고픈 주부다. 푸헐~

- 2013년 11월 8일 개인 SNS에서



11월 15일 이사를 했다. 이번이 몇 번째 이사인지 이제 셀 수 조차 없다. 

혼자 살 적에도 매 해 이사를 했었다. 나를 배려해주지 않는 집주인이 미웠고 혼자 사는 여자에 대한 편견을 신경쓰고 싶지 않아 한 곳에 오래 머물며 살고 싶지 않았다. (한 곳에 오래 머물며 살면 아무래도 이웃이나 주인과 가까워지고 그렇게 되면 내 신상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털어놓게 되는데...그게 싫었다)

그 외에도 이사를 해야하는 이유는 늘 있었다.

주차, 안전 등 조금이라도 더 나은 환경을 위해 참 부지런히도 옮겨 다녔다.

결혼을 하면 좀 달라질 줄 알았다. 나 혼자 몸이 아니니까...

그런데 한국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한국의 대전으로 대전에서 서울로...

그리고 이제 서울에서는 두 번째 이사다.


합정동 옥탑방 - 합정동 투룸 -  망원동 투룸 - 성산동 원룸 -  미국 원베드룸 - 미국 투베드룸 -  대전 15평 빌라 - 대전 21평 주상복합아파트 - 서울의 20평대 오래된 복도식 나홀로 아파트 - 서울 입주 2년 된 계단형 30평대 새 아파트 


내 이사의 역사다. 어쨌든 분명 점점 더 나은 주거환경으로 옮겼음은 다행이다.

그리고 이제서야 이사를 그만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첫 째로 꼽는 이유는 내 형편에 더 나은 주거조건은 이제 당분간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첫 번째로 꼽은 이유보다 사실 더 먼저 든 생각은 이제 늙어서 이사도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사의 역사? 이사 다니게 된 나의 이야기...


너무 힘들다.

미국 원베드룸에서 투베드룸으로 옮길 때부터 힘들었다. 당연한 것이 첫 아이인 정우를 임신 중이었으니 체력이 부족했다.

미국에서 한국의 대전으로 이사 갈 때는 정우가 100일이 갓 지났을 때이고 그런 갓난쟁이를 안고 비행기를 타고 이민가방 달랑 4개 가진 이사를 갔으니 더 힘들었다. 준비해야 할것은 많은데 젖먹이 간난쟁이가 품에 딱 들러붙어 있으니 무엇도 여의칠 않았다...남편은 한국의 직장문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 늘 늦거나 바빴다.

15평 방 두 개에 거실이라고 볼 수없는 복도가 딸린 집에서 젖먹이 아이와 고양이 두 마리를 모두 건사하자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한국식 직장문화와 생존경쟁에 여념이 없어 집안 일을 등한시했던 남편을 윽박지르다시피해서 

21평짜리 주상복합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 때 둘 째가 뱃속에 있었고 친정엄마는 간경화로 병원에 입원 중이었으며 첫 째는 아직 어린이집에 다니지 않아 여전히 내 곁에 붙어 있었다.

견딜 수 없어 결정한 이사였으나 그 역시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렇게 옮기고 나니 한동안은 숨통이 트였다.

그 와중에 , 아직 둘째가 뱃속에 있을 무렵 간경화로 투병 중이던 엄마가 돌아가셨고

장례를 치르느라 혹사한 내 몸과 마음으로 인해 

둘째는 조산될 위기에 처해 결국 병원에 링거를 꽂고 두 달 동안 누워만 있어야 했다.

그렇게 버티는 와중이었는지 둘째를 낳자마자 였는지, 

남편이 서울 본사로 발령받아 서울로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닥쳤다.

굳이 따라가야 할까, 잠시 망설였지만...

사실 결혼 전 내 모든 터전(친정을 제외한 일과 친구들 등)이 서울이었기에 다시 일할 기회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서울로 고고씽...

집값에 좌절한 게 이 때부터다.

대전의 21평 주상복합 아파트 전세보증금의 두 배 가까운 액수를 대출받았음에도 

서울이 우리에게 허락하는 공간은 변두리의 지은지 20년 가까이 되는 낡은 나 홀로 아파트 1층이었다.

전에 살던 사람이 10년 가까이 쭉 살았던 상태라 도배장판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심각한 곰팡이와 낡은 때가 가득했던 곳...그래도 그 곳에서 3년을 살았다.

같은 아파트에서 친구들도 만들고 두 사내아이 모두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적응시켰으며 다시 내 일도 찾았다.

그 집은 그렇게 사람을 참 부지런하게 만든 집이었다.

장점은 딱 그 하나...단점이 더 많은 집이기도 했다.

복도식 아파트라 안방 쪽이 외벽이어서 습기와 한기, 곰팡이가 시시때때로 유전적으로 호흡기가 약한 우리 식구들을 공격했다. 큰 아이 정우는 서울대 병원에서 집먼지 진드기와 고양이털 알러지라는 진단을 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남편의 냉랭함에도 불구하고 우격다짐으로 데리고 살던 고양이들과 굿바이 했지만, 

큰 아이의 알러지는 사라지지 않았고 누군가 베란다로 돌맹이를 집어던져 베란다 유리까지 깨져버렸다.

안그래도 추운 1층에서 합판으로 대충 확장한 베란다는 한겨울에 끔찍할 정도로 차가운 공기를 집 안 가득히 채우곤 했었다. 더이상은 안되겠다는 결심을 다시 하게 되었다.

그래도 한 집에서 1년 이상 3년 가까이 살아낸 첫번째 집이었고

경제적으로도 무리에 무리 엄청난 무리였지만, 

이성적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내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이사쪽으로 기울었다. 

추석이 지나자마자 주인집과 부동산에 이야기해 집을 내놨다.


정말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내 이사의 고생 하이라이트는 이 때부터 시작된다.

집을 내어놓자 우리부부는 깨진 베란다 유리와 목욕탕 욕조, 그리고 낡은 가스렌지후드에 대한 처분을  놓고 갈팡질팡했다. 무엇도 우리 탓은 아니었다.

베란다 유리는 누군가 밖에서 돌을 던져 벌어진 일이었고,

목욕탕 욕조도 이미 심하게 금이 가 있었는데 둘째가 목욕하면서 미끄러져 뒤통수를 탕, 부딪치자 와장창 깨져버렸다.

(이 때 119 부를 뻔 했다. 나 혼자 있으 때 벌어진 일이라 더 놀라 우왕좌왕 했으니 우리 왕대갈군 재형이의 화사한 미소로 그냥 아무 일 없는 걸로 정리하고 깨진 욕조 조각을 다 찾아 일일이 다시 맞춰 끼워넣고 스카치테이프로 마감한 채 생활했다)

가스렌지 후드는...내 참,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힌다.

그 집에 이사들어올 당시, 도배장판은 세입자인 우리가 당연히 했는데, 주방 씽크대랑 렌지 후드가 말도 아니게 더러웠다. 상태가 너무 후져서 미안했는지 어쨌는지 렌지후드를 바꾸라고 주인이 30만원을 줬는데 입주청소에 도배에 장판에 시트지 인테리어 등으로 마무리하니 그럭저럭 다시 쓸 만 해서 그냥 사용했다.

 그랬더니...남편과 집주인 아주머님이 이 세 가지 문제로 통화하다가

뭐 어떻게 말이 오갔는지 말다툼이 생겨 서로 으르렁 거리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그 무엇도 우리 잘못은 아니지만 우리가 살면서 벌어진 일이니 전세보증금에서 100만원을 제하는 것으로 합의하길 바랬는데...집주인 생각은 달랐나보다.

당장 베란다유리부터 갈라고 독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베란다 유리라는 것이 통유리이고 사이즈도 커서 비용이 엄청났다. 게다가 제대로 확장된 베란다가 아니어서 유리 끼우는 일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며 업자마다 베란다를 뜯어내야 한다는 거였다. 골치가 지끈지끈 아팠다. 그래도 어찌어찌 80만원을 들여 베란다를 원상복구했다.


우리 부부는 이미 이 쯤에서 넉다운 되었고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여전히 집주인 이야기만 나오면 비아냥 거리거나 으르렁 거리거나...나와 의논할 수준의 감정상태가 아니어서 어찌되었건 내가 해결해야 했다.

집주인 아주머님을 찾아뵙고 읍소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할 무렵, 

둘째가 폐렴진단을 받아 어린이집에 못가고 내가 보살펴야 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일도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 몸도 점점 어딘가 탈이 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2주일 만에 둘째를 다시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게 되자

이사가 열흘앞으로 닥쳐왔다. 짜증이 났던 것 같다.

그래 이왕 이리 된 거 이사 당일날 이야기하자, 어차피 미리 이야기해서 우리에게 유리할 게 없겠다, 싶었다.

나는 그 사이 우리 고양이들이 긁어놓은 문지방들을 수리해야겠다 싶어서 

빠대(페인트 가게에 파는 깎이거나 긁히거나 하는 부분을 메우는 데 사용하는 재료)를 사서 바르고 그게 다 마르면 사포로 곱게 갈아 모양을 맞추고 페인트 칠로 마무리해서 깔끔하게 원상복구했다.

이 작업도 무려 3일이 넘게 걸렸다. 워낙 많이 깊게 긁어놔서 한번에 되질 않고 1차, 2차, 3차로 덧바르고 문지르니 겨우 모양이 갖춰졌다. 고양이들이 주로 갇혀 있던 베란다 문은 모서리의 각진 부분이 동그랗게 파여서 빠대로 모서리를 아예 만들어야 했으니 그 작업이 나 같은 일반인에게 쉬울리가 없다.

냄새가 독해 아이들이 집에 없을 때 작업하자니 더 빠듯하게 작업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었다.

이 쯤하면 주인이 와서 봐도 화는 나지 않겠다 싶었는데...

이사 당일 보증금 주고받는 자리에서의 주인은 참 가관이었다.

욕조와 렌지후드문제를 놓고 미리 이야기해서 처리하지 않은 부분에 초점을 맞춰 나를 공격했다.

나는 한번도 방문해서 의논하지 않은 집주인의 태도에 대해서 섭섭함을 표시했다.

그 때 이미 욕조 수선비로 22만원을 내어놓은 상황이었는데, 렌지후드값 30만원도 내놓고 가라는 집주인의 태도에 내어놓았던 22만원을 다시 잡아당겼다. 


무엇도 우리 탓이 아니었고  욕조가 깨졌을 당시에는 전화를 3번 이상 했다. 

한번 와서 보시고 어떻게 할지 의논하자고...

그렇지만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회피했던 건 집주인이었다.

집주인의 집관리가 세입자 휘둘러서 이뤄진다고 생각하는구나 싶어서 

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도 사실 돈이 귀하다.

2013년 미친 전세대란에 추가대출 없는 월세를 선택한 이사였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절약'말고는 답 안나오는 이사에 마음이 갑갑한 차에

집주인이라는 사람이 세입자에게 한 푼이라도 뜯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자니 

울컥 화가 났던 거다.

이거 먹고 떨어져라, 는 심정으로 30만원 내어주고나니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갑자기 내가 감당해야 할 현실들이 너무 버겁게 느껴졌다.

월세도, 남편도, 아이도, 일도,,, 거기에 호시탐탐 나를 갉아먹으려는 타인들, 외부환경들...

누구도 나에게 버팀목이 되어주질 않는구나, 싶었다, 그 순간은...

외롭고 버겁고 힘들고...딱 그 세가지 감정이 폭발했다.

나이가 드니 감정이 격해지면 그 감정의 폭풍이 지나자마자 바로 체력이 확 떨어진다.

한 이틀을 몸살 앓고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난 이제까지 살던 집 중에서 가장 좋은 집에 살고 있었다.

그 점에 위안을 받으며 시간이 그럭저럭 흘렀다.

그리고 2년 후, 2015년 반전세, 아니 말이 좋아 반전세지 그냥 월세를 내야 하는 고급 아파트에 사는 동안 난 경제적으로 많이 곤란해져야 했다.

몸은 더 없이 편한데 마음이 불편해서 가시방석 같았다고나 할까.

그래도 몸이 편하다는 장점을 놓치기 싫어 반전세 계약을 연장하려고 했으나 

(그 외에도 이미 초등학교에 입학해버린 아이의 전학문제도 있었고 둘째 어린이집 문제도 자연스러 얽혀 있어서 그냥 주저 앉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이사는 계속된다, 왜? 가난하니까!!!


집주인은 월세를 더 올려받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 당시 부동산 시장 자체가 월세를 올려받는 분위기였고

더 오를 수 없을 거라고 예상했던 전세는 하늘을 뚫고 우주끝까지라도 가겠다는 듯 더 올라 있었다.

망설이고 망설이고 고민하고 발품팔면서 내가 이사가야 할 현실의 집들을 보면서 한숨짓고 심난하고

그런 지난한 과정을 다시 거쳐... 


20평대 3bay 구조의 10년된 아파트 전세로 옮기자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그런 아파트가 나와줬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기에 그 전세가가 매매가의 80%를 웃돌았다는 둥,

사실은 베란다를 3개나 빼느라 방이 다소 좁은 감이 있었다는 둥,

베란다가 확장되지 않은 구조였다는 둥은 거부할 핑계가 되지 못했다.


남편도 나도 그렇게 다운그레이드 된 우울한 이사를 치러냈다.

우리 부부는 말이 없었고 심지어 허허실실 웃기까지 했다.

나는 이사업체 사람들에게 비굴할 정도로 친절하게 굴어서

이 지저분하고 오래된 집을 살 수 있을 정도로만 청소해달라고 돈을 쥐어줘가며 직접 팔을 걷어부쳐가며 온 몸으로 부탁했다.


그렇게 이사한 지 5개월이 다 되어간다. 

직접 살아보니 이 집은 말도 안되게 허술하게 지은 집이라 베란다 벽에는 바깥이 보일 정도로 모서리가 낡아 삭아있었고

(겨울에 추워 디지는 줄 알았다)

맞은 편에 새로 들어선 고층 아파트 덕분에 꼭대기층 8층인 우리집에 햇볕이 들어오는 시간이 짧아 화분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래도 우린 이 집에서 당분간을 아니 3년을 살아내야 한다.


다행히 2018년 새로 입주하는 아파트를 어마어마한 빚을 감수하고 샀기 때문이다. 

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새로 들어갈 아파트를 위해 계약금을 내고 벌써부터 우리 부부는 현금이 없어 쪼달리는 삶을 실감하는 중이다. (이게 바로 하우스 푸어의 시작 아니겠는가!) 


공허함과 피로와 짜증이 엄습해온다. 이따위가 희망이라니 믿고 싶지도 않다.

1년여간의 주말부부 생활에 이제는 집에 돌아오고 싶어하는 남편의 등을 떠밀어 출근시킨 새벽,

육아도 가사도 일도 다 놓아버리고 싶건만(이 어마어마한 빚은 어쩌구~)

이제 육아와 가사와 일을 놓아버리면 살 의미마저 잃어버린 것 같아 씁쓸한 아침의 동이 터온다. 


내가 가장 고급아파트(누가 보면 어디 타운하우스에라도 살았던 줄 오해하겠지만 30평대 새 아파트에서 처음 살아봤던지라...^^;)에 살던 시절에 본 일출.


* 이 글은 문화미래이프 홈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http://www.onlineif.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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