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과 소개팅

프리랜서 번역가 워킹맘의 외국계 기업 취업기

by 은세유
경력직 취준생으로 몇 개월을 지내보니 경력직 취업은 소개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드는 사람(기업)과 1:1로 만나서 서로 내가 찾는 사람이 맞는지 알아본다. 물론 나는 괜찮았는데 그쪽에서 "죄송합니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애초에 소개팅 상대를 고른 건 나였으니 당연하다. 재미있는 건, 나도 별로였는데 그쪽에서 "죄송합니다"하는 경우에도 마음이 쿵 내려앉아 한참 동안 멍해진다는 사실이다. 가슴이 뻥 뚫린 듯 시리고 아프다. 전에 아는 동생이 소개팅을 한 후 "아니 나도 맘에 안 들긴 했는데 내가 저런 사람한테까지 '까여야' 하나 싶어서 매우 기분이 나빴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며칠 전, 한 달 전쯤 지원한 외국계 기업으로부터 최종 job offer를 받았다. 내가 지원한 position의 이름은 Localization Specialist이다. 나는 현재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인하우스로 일한 경험도 있다. 이쪽 업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번역가'라고 하면 출판 번역을 가장 많이 떠올리지만 번역가로 일할 수 있는 길은 여러 가지다. 기업에 소속된 인하우스 번역가도 그중 하나이다.


요즘 대부분의 외국계 기업들은 여러 번역가를 직접 채용하기보다는 소수의(한 명인 경우도 많다) localization specialist를 뽑아 보다 포괄적인 업무를 맡기는 듯하다. 일반적으로 localization specialist의 업무는 번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회사마다 다를 테지만 내가 채용공고를 본 기업들 대부분은 번역 자체보다는, 프리랜서 번역가들의 번역을 최종 감수하고 에디팅 하는 업무를 요구했다. 또한 번역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관리하고, 기업의 전체적인 tone and manner를 정하는 업무도 포함됐다.


프리랜서에서 인하우스로 다시 전향하기로 한 데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는데, 오늘은 일단 제목에 적은 대로 내가 느낀 매우 개인적인 경력직 취업 경험담을 공유하고자 한다. 나는 수많은 사람을 면접 본 인사담당자도 아니고, 오랫동안 여러 기업에 지원한 경력직 지원자도 아니며, 많은 이들이 관심 있어하는 일반적인 포지션에 지원한 것도 아니다(매우 특이한 포지션이다). 따라서 나의 경험이 별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누군가에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또는 착각)으로 몇 달 전의 내게 도움이 되었을만한 정보를 공유하고자 한다.


1. CV

일단 서류 심사를 통과해야 내 능력을 보여주든 말든 할 텐데 서류 조차 통과가 안 되면 기운이 쭉 빠진다. 나의 경우 대학 졸업 당시에는 이 회사 저 회사 많이도 지원했고 많이도 떨어졌다. 대학원 졸업 후에는 인하우스를 할지 프리랜서를 할지 확신이 없어서 사실 회사 지원은 거의 안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너무 탐나는 외국계 기업의 translator, language specialist 같은 포지션이 나오면 자격도 안 되는데 그냥 한번 찔러봤던 것 같고, 물론 결과는 서류 탈락이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요즘 외국계 기업들은 전체적인 번역물을 review 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기 때문에 너무 짧은 경력은 선호하지 않는 듯하다. 이번에는 경력이 있는 상태라 그런지 지원한 기업의 서류는 거의 다 통과했다. 경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요즘 번역 관련 포지션을 오픈한 외국계 기업들은 일단 서류 통과 후 2단계인 written test에서 지원자를 선별하는 듯하다. 어차피 번역이나 에디팅 실력이 기본이 되어야 하므로 written test를 1+α 단계처럼 기본 단계에 끼워 넣는 것이다. (물론 나의 추측이다.)


CV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JD(Job description)를 최대한 꼼꼼하게 읽고 관련 경력을 끼워 넣으며, 기업마다 다른 CV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 소리를 왜 하냐고 하는 분이라면, 아주 잘하고 계신 거다. 나는 어리석게도 예전엔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신입 때야 톡톡 튀는 자기소개서와 열정이 중요했지만 경력직은 기본적으로 fit이 맞아야 한다. potential을 보고 신입사원을 뽑는다면, 기존 경력과 현재 가진 능력을 보고 경력사원을 뽑는 거니까. 따라서 내가 얼마나 이 직무에 적합한지를 내 경력과 JD의 문구를 오버랩해 증명해야 한다.


2. Written test

번역가는 어느 회사 어느 에이전시에 지원하든 시험을 본다. 제삼자를 통해 소개를 받거나 클라이언트로부터 먼저 의뢰를 받는 경우가 아니라면 시험을 안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외국계 기업들은 번역 포지션이 아니더라도 2차에서 간단한 번역 테스트나 코딩 테스트 등을 보는 것으로 알고 있다.


Localization 포지션의 테스트는 기업마다 다른데 보통 주어진 시간 안에 번역 또는 에디팅을 하는 과제가 주어진다. 짧게는 1-3시간 내에, 길게는 24시간이나 3-5일 내에 과제를 제출해야 한다. 당연히 그에 따른 전략도 달라야 한다. 짧은 시간 안에 과제를 마쳐야 한다면, 숙고할 시간이 없다. 시간 조절이 관건이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상당한 분량을 주어진 시간 내에 괜찮은 퀄리티로 마무리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하다. 긴 시간이 주어지는 과제는 좀 더 마음이 편하지만 한편으론 더 부담이 되기도 한다. 긴 시간은 내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완성도를 최대한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번역일을 하면서 때로는 짧은 마감이 속 편하기도 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번역은 없다는 게 이 일을 수년간 해오며 내가 내린 결론이다.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하는 번역가를 딱딱한 기술을 다루는 기업에서는 선호하지 않을 수 있다. 기술 문서를 다루는 기업은 되려 너무 단순하다 싶을 정도로 간결하고 한눈에 읽히는 문장을 원한다. 따라서 지원한 회사의 웹사이트에서 기존 자료들을 살펴보고, 그에 맞게 번역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확성과 가독성은 물론 기본이다.


3. 실무진 인터뷰

Written test를 통과하면 보통 내가 보고를 하게 될 실무진 및 리크루터와 인터뷰를 하게 된다. 리크루터와는 written test를 보기 전에도 간략하게 전화 또는 화상으로 인터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인터뷰는 이 단계에서 한다. 이 때도 중요한 건 JD를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실수를 타산지석 삼으시길. 번역을 전공한 사람들이 이 전공을 살려 갈 수 있는 외국계 기업의 정규직 포지션은 Translator, Language Specialist, Language Manager, Localization Specialist 등이다. 나는 ‘결국 같은 일 하는 건데 이름만 다른 거 아니야?'라고 생각(착각)했다. JD를 꼼꼼히 살펴보면 기업마다 요구하는 자질이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어떤 기업은 번역 자체의 비중은 거의 두지 않고 관리자로서의 역량을 중시하기도 한다. 따라서 각 기업의 니즈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나의 어떤 점이 그 핏에 맞는지를 어필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존 경험을 이야기할 때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 어떤 성과를 이루었는지까지 답변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질문하지 않아도 그렇게 답하면 인터뷰를 하는 분들도 이해하기 쉽고, 대답을 더욱 신뢰할 것이다.


4. Lead급 인터뷰

기업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실무진, HR팀 인터뷰를 통과하면 더 직급이 높은 분들과 인터뷰를 진행한다. 예를 들어 3차 때 내 보고라인 상사와 인터뷰를 했다면, 이번엔 그의 상사와 인터뷰를 하는 것이다. 3,4 단계 인터뷰어가 모두 한국인일 수도, 모두 외국인일 수도 있다. 기업의 채용 체계, 그러니까 한국 office에 얼마나 많은 권한을 위임하는지에 따라 다른 것 같다.


나의 경우 이 단계 인터뷰에서는 사람 자체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라는 사람이 이 기업의 문화와 잘 맞는지 cultural fit을 보는 것이다. 인터뷰를 해 보니 기본적으로는 내가 인터뷰 대상이지만 나 또한 그들을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우리'가 서로 맞는지 알아보는 과정이기에 솔직하게 인터뷰를 진행하는 게 가장 자연스럽고 성공 확률도 높은 것 같다.


5. Global line 인터뷰 or 다른 팀원 인터뷰 등

보통 외국계 경력직 포지션의 채용 프로세스는 꽤 긴 편이다. 5단계로 glboal team의 leader와 한 번 더 면접을 보는 경우도 있고, 업무와 직접 관련이 없는 다른 팀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cultural fit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


한 번의 테스트와 2-3번의 면접이 평균인 것 같고, 채용 과정이 긴 기업은 면접을 7-8번 이상도 본다고 했다.



십오 년 전쯤 나는 파릇파릇한 대학 졸업반 학생으로서 수많은 기업에 원서를 내고, 탈락했다가, 다른 곳에 합격해서 면접을 보고, 또 탈락하고, 그러다 의외로 탈락한 곳들보다 좋은 곳으로부터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나이도 많고, 아이도 있는, 여성'이라는 불리한 조건으로 경력직 취업 준비를 하다 보니 예전에는 겪지 않았던 어려움이나 불쾌함도 마주해야 했다. 코로나로 인해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리쿠르터에서 전화가 오면 아이가 크게 목소리를 내서 내가 '엄마'라는 사실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다. 취업 시장에서 ‘엄마'라는 조건만으로 내가 큰 마이너스를 안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제발 착각이었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가 않았다.


스타트업으로 시작해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크게 성장한 회사라 젊고 열린 문화일 것으로 기대했던 곳에서, "혹시 결혼하셨나요? 아이도 있으신가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질문과 마주한 나는, 등교 첫날 "아빠는 뭐하시니?"라고 대뜸 묻는 선생님을 올려다보는 초등학교 2학년 아이처럼 경직됐다. 뭐라 둘러대며 대답을 피하는 것도, 그런 질문은 적절치 않다고 대꾸하는 것도 모두 불가능했다. "네"라고 답하면 내가 엄마여서 안 뽑을 수도 있지만 엄마여도 뽑을 가능성이 남아 있지만 "그런 질문은 좀 부적절하지 않나요?"라고 답하면 안 뽑아줄 것 같았다. "답하기 곤란합니다"라고 말하면 "네"라는 말과 다름없고.

코로나로 인해 주로 하던 프리랜서 일 하나가 끊기다시피 해서 외국계 기업의 정규직 자리를 알아보던 끝에 나와 가장 fit이 잘 맞는다고 생각한 기업에서 offer를 받았다. 내가 이제껏 해 왔던 다양한 일들을 점으로 연결시켜 성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은 포지션이었다. 회사에서도 그런 인상을 받은 듯했다. 특히나 성별이나 나이에 대한 차별이 없는 곳이라 내게도 기회가 온 것 같다.


앞서 내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 기업은 내가 '엄마'라서 채용을 안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엄마'인데도 남들보다 더 훌륭하지 않아서 채용을 안 했을 가능성은 있다. '엄마'라는 큰 마이너스를 상쇄하려면 다른 지원자들보다 훨씬 뛰어난 플러스를 증명해야 하니까.


어쩌다 경력직 취준생으로 몇 개월 지내다 보니 경력직 취업은 소개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드는 사람(기업)과 1:1로 만나서 서로 내가 찾는 사람이 맞는지 알아본다. 나는 괜찮았는데 그쪽에서 "죄송합니다"하는 경우가 물론 대부분이다. 애초에 소개팅 상대를 고른 건 나였으니 당연하다. 재미있는 건, 나도 별로였는데 그쪽에서 "죄송합니다"하는 경우이다. 무슨 심리인지 이 경우에도 "죄송합니다" 다섯 글자를 보고 나면 마음이 쿵 내려앉아 한참 동안 멍해진다. 가슴이 그렇게 시리더라. 전에 소개팅을 해준 동생이 "아니 나도 맘에 안 들긴 했는데 내가 저런 사람한테까지 '까여야' 하나 싶어서 기분 나빴다"라고 한 적이 있는데 비슷한 심리려나.


“죄송합니다"라고 얘기라도 해 주면 고맙다.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가장 싫다(영어로도 리크루터가 ghost 했다고 한다) 예전에 취업준비생들에게, 지원한 기업에게 가장 바라는 점을 물었는데 압도적으로 높은 수가 "합격 불합격 여부를 알려주길 바란다"라고 했다. 내가 마음에 안 들었더라도 "죄송합니다."라고 메일 한 통, 문자 한 통 줄 수 있지 않은가. 심지어 최악은 "저기요..."하고 내가 그쪽 의사를 되물었는데도 답이 없는 경우이다. 어려운 일 아닌데 사람을 굳이 그렇게까지 비참하게 할 이유가 뭔가 싶다.


소개팅에서 상대를 계속 만나지 않기로 결정하는 데는 수만 가지 이유가 있을 수도, 한 가지 결정적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아무리 내가 먼저 만나자고 했다지만 잘 거절하고 헤어지는 것도 '서로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지원자가 기본적으로는 아쉬운 입장이지만 지원자가 2군데 이상의 offer를 받으면(나도 다른 곳에서도 offer를 받았다) 입장이 바뀌기도 한다. 채용 과정에서 긍정적인 인상을 주고 나를 존중해준 기업에 더 마음이 가기 마련이다. 지원자도 기업도 어려운 시간을 내서 만난 인연인데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고 서로 존중해주면 좋겠다.


지난 몇 달간 짧다면 짧게, 길다면 길게 경력직 취업을 준비하며 이 과정이 정말 에너지 소모가 많은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고도의 집중력을 다해 시험을 보고, 면접을 보고, 그러다 거절 메일을 받고, 합격 메일을 받으며 롤러코스터를 탄다. 앞서 말했듯 심지어 별로였던 곳이더라도 일단 '거절'이라는 부정적인 feedback을 받으면 자신감이 꺾이고 움츠러든다.


멘탈 관리를 위해서는 나와 기업이 소개팅을 보는 거고, ‘서로’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점을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가 나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준 덕에 내가 나와 더 잘 맞는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사랑의 짝대기가 이쪽저쪽으로 그어지다 보면 결국 나와 잘 맞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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