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온기가 필요해

비 오는 날의 교통사고

by 은세유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좀 더 자고 싶어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아직 밤인가?' 싶었다. 방 안으로 빛 한 줄기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이번엔 귀의 감각을 깨웠다. 후드득후드득 하는 굵은 빗소리가 단단히 닫힌 창문을 뚫고 들어왔다. '아, 오늘 많은 비가 내린 후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된댔지...' 어제 라디오에서 들려온 일기 예보가 떠올랐다. 영 출근할 마음이 들지 않는 월요일이었다. 버스를 탈까 하다가 아파트 주차장에서 회사 주차장으로 쏙 들어가면 비를 맞지 않아도 되니 오늘은 고민 없이 운전을 택했다.


밖은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처럼 어두웠다. 빗줄기가 굵어지자 앞유리 와이퍼도 제 역할을 더 잘 해내려는 듯 정신 사납게 움직였다. 이사 온 지 일 년이 넘었으니 최소 백 번도 더 오고 간 출퇴근 길이라 궂은 날씨에도 운전 때문에 긴장이 되지는 않았다. 언제나처럼 집 앞 좌회전 신호를 받자마자 김영철의 파워 FM을 틀었다. 특별 게스트로 엄정화가 나온다고 했다. '엄정화가?' 이십 대에도, 삼십 대에도, 사십 대에도, 그리고 오십 대에도 '나이 그까짓 거 별 거 아니라는 듯, 여자인 게 뭐 어떻냐는 듯' 당당하게 도전하는 그녀를 나는 언젠가부터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엄정화와 김영철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와 대화를 들으며 큰 소방서가 있는 언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즈음을 지날 때 언제나 내 차는 2차선에 있었다. 이 고개를 넘으면 3차선이나 4차선으로 이동해야지. 눈과 몸에 빠삭하게 익은 길이라 편안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평온한 운전길에 갑자기 하늘에서 폭탄이라도 떨어지듯 무언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차량 좌측 앞면을 박살 내버렸다.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비현실적인 기시감이 들었다.


차량 사고의 당사자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분명 많이 본 장면이었다. 영화나 드라마, 만화에서였겠지. 순간, '아차, 블랙박스!' 싶었다. 며칠 전부터 블랙박스에서 이상한 소음이 나서 남편에게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빨리 수리하라고 재촉했는데 미루다 아직 손보지 못한 상태였다. 그때 조수석 쪽에서 지나가던 차량의 운전자가 내게 말을 걸려는 듯했다. 창문을 내렸더니 명함을 건네주며 본인 블랙박스에 사고 장면이 찍혔을 것 같다고,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했다.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가운데 너무 고마워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연신 인사를 했다. 그분은 사고 차량이 왼쪽 가드레일을 박고 튕겨서 내 차를 받았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내 과실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니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악몽 같은 상황에 이렇게 선한 분을 만나다니 아주 최악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운전석 쪽은 문을 열고 나갈 수 없을 정도로 사고 차량과 붙어 있었다. 몸을 틀어 조수석으로 문을 열고 나가 사고 차량에 다가갔다.


순간 겁이 났다. 많이 다쳐서 못 나오셨나? 기절한 건 아니겠지? 그럼 119에 신고해야 하나....?

사고 차량 운전석에서 사오십 대로 보이는 여자가 부스스한 얼굴로 차문을 열고 나왔다. 한 시간 전 잠에서 덜 깬 내 모습 같았다. '아니 일단 나와서 피해자가 어떤지 보고 사과를 하셨어야지'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쪽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더 컸다.


"나와보지도 않으시면 어떡해요..." 하고 원망 섞인 한 마디를 건넸다.

"깜빡 졸았나 봐요. 상중이라..." 부스스한 그녀가 말했다.


'상중....'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검정 옷을 입은 상대의 팔을 살짝 쓰다듬었다. "아... 상.. 중 이세요?"


곧 양쪽 보험사에서 출동매니저라는 분들이 와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착착 알려주었다. 가해자가 실수를 인정했고, 목격자도 있는 명백한 100% 상대편 과실이므로 이제 나는 우리 쪽 보험사 접수를 취소하고 그쪽 보험사의 지원을 받으면 된다고 했다.


겉으로 보기에 크게 다친 데는 없었지만 차가 부딪히는 순간 긴장 탓인지 충격 탓인지 왼쪽 손가락이 저릿했다. 하루종일 두통과 약간의 메스꺼움도 느꼈다. 회사에 도착해서 정신을 차리고는 오전에 명함을 건네준 분께 스타벅스 기프티콘을 보내드렸다. 그쪽 과실이 100프로라 블랙박스 영상은 안 주셔도 될 것 같다고, 바쁜 출근길에 선뜻 도움 주셔서 감사하다고 다시 한번 인사를 전했다. 그분은 몸은 괜찮냐는 인사와 함께 혹시 보험사에서 요청할 수 있으니 가지고 계시라며 블랙박스 영상을 보내주었다.


뒤차의 블랙박스에 찍힌 영상 속에서 나는 몇 초 후에 무슨 일이 닥칠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직진을 하고 있었다. 나보다 조금 앞서 달리던 옆 차선의 흰색 차량이 갑자기 왼쪽 중앙 차선 버스 정류장을 들이받더니 오른쪽으로 튕겨 나와 내 진입로를 막았다. 움직이던 두 차량은 모두 심하게 찌그러지고 부서졌다.


집에 와서 유치원에 다니는 딸아이에게 오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니 해맑게 차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보고 싶다고 졸랐다. 사고 사진 속에 우연히 함께 찍힌 상대편 운전자의 모습을 보고 아이가 말했다.


"엄마, 이 아줌마야? 나는 이 아줌마 착한 아줌마처럼 보이는데?"

"응, 나쁜 아줌마 아니야. 실수로 사고가 난 거야."


그녀에게도 오늘 아침은 날벼락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한순간에 '가해자'라니... 가까이에 있으면 큰 변이라도 당할 것 같아 무조건 피하고 싶은 '가해자'라는 말을 상중에 졸다가 사고를 낸 사람에게 갖다 붙이려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영어 사전에서 '가해자'를 검색하면 attacker 또는 assailant(공격을 한 사람)라고 나온다. 예상대로, 의도적으로 남에게 상해를 입힌 사람 또는 범죄자를 의미한다. 그럼 오늘과 같은 교통사고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영어로는 어떻게 말할까? 영어로는 at-fault driver (실수를 한 운전자)와 victim or innocent driver(책임이 없는 운전자)로 구분하는 듯하다. 내가 아이에게 설명해 준 것처럼 그녀는 오늘 '실수를 한 운전자'였다.


내일은 아침 일찍 정형외과에 가서 검사를 받아 보려고 한다. 실수를 한 운전자이자 동시에 사고의 피해자이기도 한 그녀도 무사하기를, 몸도 마음도 곧 회복하기를 바라본다. 내게 선의의 온기를 전해 준 낯선 운전자처럼 나도 그녀에게 마음으로나마 작은 온기를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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