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퍼를 사랑한 래퍼들
회사에서 유명 남성 래퍼와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다. 오랜만에 새 앨범을 출시하는 래퍼가 곡을 쓴 작업실을 재현한 후, 그곳에서 팬들이 그의 신곡을 누구보다 빨리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이벤트였다. 오랜만에 발매하는 그의 신곡을 들으며 팬들은 그가 곡을 쓰며 남긴 스케치나 끼적여놓은 노트, 영감을 얻은 장소를 담은 사진 등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래퍼의 실제 소지품 또한 전시되었다.
집에 텔레비전도 없는 내가 이름을 알 정도의 연예인이니 당연히 많은 팬이 몰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보다도 훨씬 많은 인원이 새벽부터 줄을 섰다. 그런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방문한 사람의 수가 아니었다. 방문한 사람들의 인구학적 특성이었다. 남성 래퍼의 팬 절대다수가 어리거나 젊은 '남성'이었다. 예전에 성시경 씨는 본인의 공연에 오는 관객 대부분 여성이거나 그 여성을 어쩔 수 없이 쫓아온 남자친구라고 농담 삼아 말한 적이 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여기에 온 걸까? 몇 시간씩 줄을 서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 앳돼 보이는 남학생이 내게 말을 걸었다. 작업실에 전시된 LP판을 가리키며 저것도 그의 소장품이냐고 물었다. 그 LP판은 그의 것이 아니지만 저 위에 있는 (손댈 수 없는 위치에 전시된) LP판은 모두 그가 가져온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내 말이 끝나자 그는 오오... 하며 그의 진짜 소장품인 LP판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음악 감상실에서 드디어 그의 신곡이 플레이되자 그는 또 한 번 오오... 하며 발로 박자를 맞추고 머리를 흔들며 진지하게 음악을 느꼈다.
사실 그 래퍼 이벤트는 내 업무와 전혀 관련이 없었다. 예상보다도 훨씬 많은 팬들이 몰리는 바람에 해당 업무와 관련이 없는 팀원들도 착출이 되어 안내를 지원해야 했다. 사무실에 할 일이 쌓여 있는 데다 그 래퍼의 광팬도 아니었으니 즐거울 리 없는 추가 업무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몸은 피곤한데 마음에 에너지가 채워지는 듯했다. 진심이 느껴지는 열성 팬들을 바라보는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 알았다! 그들은 모두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아름다운 얼굴. 자신의 얼굴이, 표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모르고 사랑하는 사람만을 생각하는 사람의 얼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몇 시간 정도 줄을 서는 것쯤은 기꺼이 감수할 뿐 아니라 충분히 가치 있다고 느끼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내 몸에도 무언가 뜨끈한 것이 차오르는 열정 전이를 경험하며 나는 요즘 내 삶이 지루하고 힘 빠지게 느껴졌던 이유를 마침내 찾은 것 같았다. 그 팬들의 나이를 넘어오면서 나는 점점 무엇에도 헤어 나오기 힘들 만큼 깊이 빠지기를 두려워하고 적당히 발을 담갔다가 적당히 뺐다. 래퍼의 팬들은 자신의 우상(아이돌)을 만나기를 기다리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만나고 느꼈다. 그의 음악을 통해 그를 만난 순간에 팬들은 다른 모든 것을 뒤로하고 몰입하고 있었다. 무언가에 몰입하여 삶이 고조되는 순간에 자연스럽게 행복이 찾아온다고 역설한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의 말대로 그들은 분명 몰입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방명록을 작성하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군인 청년은 충성!이라고 남겼고, 어떤 남학생은 본인의 이름과 래퍼의 이름 사이에 익살맞은 하트를 그려 넣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방명록은 본인의 이름 세 글자로 시작했다.
김한민
언젠가 너를 따라잡을 사람의 이름이다
기억해 (주세요)
(이름은 내가 임의로 바꾸었지만) 그는 이미 래퍼가 될 자질을 갖춘 듯했다. 짧은 글 속에 흥미로운 반전을 담았고, 상대를 위협하는 듯했으나 재치를 잃지 않고 예의까지 갖추었다. 애정과 존경이 가득 담긴 귀여운 도전장이었다. 언젠가 그가 쇼미더머니에 출연해 그의 우상인 래퍼와 한 팀이 되어 멋진 경연을 펼치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다시 한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