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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Dec 11. 2019

학생 잘못이 아니에요

'82년생 김지영' 65-69쪽

하품을 하며 정류장 팻말 아래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남학생 하나가 김지영씨에게 눈을 맞추며 안녕하세요, 했다. 얼굴이 익숙하기는 했지만 잘 모르는 사람이었고, 김지영씨는 그냥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인가보다 싶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너 걸음 정도 떨어져 서 있던 남학생은 조금씩 조금씩 김지영씨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남학생과 김지영씨 사이에 있던 사람들이 제각각 버스를 타고 떠나자 어느새 남학생은 김지영씨 바로 곁에 서게 되었다.


"몇 번 타세요?"

"네? 왜요?"

"데려다줬으면 하시는 거 같아서."

"제가요?"

"네."

"아닌데요. 아니요. 가세요."


 제발 따라오지 마라, 따라오지 마라, 따라오지 마라. 김지영씨는 마음 속으로 기도하며 아무도 없는 정류장에 발을 내디뎠는데, 남학생도 뒤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은 둘뿐이었다. 외진 정류장에는 행인 한 명 지나가지 않았고, 가로등마저 고장 나 주위가 유독 깜깜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은 김지영씨에게 남학생이 다가오며 낮게 읊조렸다.


"너 항상 내 앞자리에 앉잖아. 프린트도 존나 웃으면서 주잖아. 맨날 갈게요, 그러면서 존나 흘리다가 왜 치한 취급하냐?"


몰랐다. 뒷자리에 누가 앉는지, 프린트를 전달할 때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통로를 막고 선 사람에게 뭐라고 말하며 비켜 달라고 하는지. 그때 출발했던 버스가 멈추더니 아까 그 여자가 내리면서 소리쳤다.


"학생! 학생! 이거 두고 내렸어요!"


여자는 자신의 목에 두르고 있던, 얼핏 보기에도 고등학생 김지영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스카프를 흔들며 달려왔고 남학생은 썅년들, 이라고 욕하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82년생 김지영, 65-68쪽)


(중략)


하지만 김지영씨는 그날 아버지에게 무척 많이 혼났다. 왜 그렇게 멀리 학원을 다니느냐, 왜 아무하고나 말 섞고 다니느냐, 왜 치마는 그렇게 짧냐 ...... 그렇게 배우고 컸다. 조심하라고, 옷을 잘 챙겨 입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라고. 위험한 길, 위험한 시간, 위험한 사람은 알아서 피하라고. 못 알아보고 못 피한 사람이 잘못이라고.


어머니가 여자에게 연락해 택시비라도, 작은 선물이라도, 안 된다면 커피 한잔이나 귤 한 봉지라도 전하고 싶다고 했지만 여자는 끝까지 거절했다. 김지영씨가 직접 인사해야겠다 싶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다행이라며 대뜸 학생 잘못이 아니에요, 했다. 세상에는 이상한 남자가 너무 많고, 자신도 많이 겪었다고, 이상한 그들이 문제지 학생은 잘못한 게 없다는 여자의 말을 듣는데 김지영씨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 (68-69쪽)


길지만 다 적어보았다. 왜 개자식들은 인적없는 한적한 버스정류장에서 깽판을 칠까. 지들도 지들 하는 짓이 범죄라는 걸 알아서 그런 거겠지. 


김동진씨는 엄마의 과도한 집착이 싫었다. 엄마는 딸과 알콩달콩 시간 보내는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엄마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성향상 독립적인 김동진씨는 대학생인 자신을 데리러 엄마가 버스정류장에 나온다는 것도, 지하철역에서 버스로 옮겨탈 때 엄마에게 전화를 해야 하는 것도 싫었다. 안 그래도 집 안에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엄마인데, 집 밖에서까지 감시당하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엄마는 교회에서 집에 올 때 한 번에 오는 편리한 노선의 버스를 타지 말라고 늘 말했다. 그 버스는 인적이 드문 정류장에 서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집에 올 때 중간에 번화한 지하철역에서 내려 버스를 한 번 갈아타면, 좀 훤한 불빛들이 있는 아파트단지와 주거지역 동네 앞 버스정류장에 내릴 수 있기 때문에, 엄마는 김동진씨에게 항상 중간에 갈아타고 오라고 말했다. 심지어 그 훤한 불빛들이 있는 정류장에도 김동진씨를 데리러 나오겠다고, 처음 이사가고 얼마동안은 김동진씨는 매일매일 귀가시간에 엄마에게 전화를 하고 엄마와 함께 집에 들어가야 했다. 


이사온 지 꽤 지나 김동진씨가 엄마에게 전화를 점점 드문드문하게 될 시점의 어느 날이었다. 대학생이었던 김동진씨는 학교 수업이 끝나고 교회에 갔다가 집에 가는 길이었다. 그날따라 피곤한 몸과 마음으로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데, 바로 앞에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섰다. 김동진씨는 편안함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 버스를 탔다. 그맘때쯤이면 버스나 지하철에서 왜 그렇게 잘 잤는지 모르겠다. 그 날도 피곤했으므로 집까지 가는 오랜 시간 동안 김동진씨는 버스에서 잠이 들었다. 한참을 잔 듯 하다 깨어보니 집에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불현듯 주위를 둘러보니 버스 안에는 김동진씨와 어떤 허름해보이는 아저씨, 그리고 또 어떤 여자 한 명 이렇게 세 명밖에 없었다. 김동진씨는 내려야 하는 정류장에서 내렸다. 엄마가 절대로 내리지 말라고 하던, 인적없는 버스정류장이었다. 시간은 저녁 8시-9시 경이었는데, 이미 깜깜했다. 김동진씨를 내려놓은 버스가 윙~하고 출발해 갔다. 김동진씨는 무심코 버스를 쳐다보고 흠칫했다. 그 허름한 차림새의 아저씨가 앉아있던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김동진씨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허름한 아저씨가 버스에서 내려 따라오고 있었다.


직감이 안 좋았다. 저 아저씨는 왜 나를 따라오지,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지, 여기서 어디로 도망을 가지. 김동진씨는 깜깜한 대로변을 둘러보았다. 저 대로변을 건너 냅다 저쪽으로 뛰어갈까, 으아 차에 치이면 어떡하지. 그 짧은 순간 동안 온갖 머리를 굴리고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사이, 그 허름한 아저씨는 김동진씨에게 바짝 다가와서 야, 너 나한테 먹히고 싶어, 라고 말했다. 김동진씨는 너무 무서워서 온 몸이 굳는 것 같았다. 못 들은 척 하고 앞만 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저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면 냅다 뛰어서 건너야겠다, 아 그런데 아파트단지까지 가는 길이 깜깜하고 가로등도 없잖아, 어쩌지. 머리 속으론 수만가지 생각이 오갔지만 어쨌거나 몸은 굳어 있었다. 그 허름한 아저씨는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김동진씨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서 있었다. 


그 때, 그 인적없는 버스정류장에 또다른 버스가 사람을 내렸다. 두어명인가가 내렸고, 어떤 양복 입은 아저씨가 이상한 낌새를 챘는지 김동진씨 옆으로 다가와서 괜찮냐고 물었다. 김동진씨는 그 아저씨에게, 저희 집이 저쪽 오른쪽 **아파트인데요, 죄송하지만 그 입구까지만 저 좀 같이 가주실 수 있을까요, 하고 아마도 덜덜덜 떨며 말했다. 아마도 퇴근길이었을 그 양복입은 아저씨는 허름한 아저씨를 쳐다보는 것 같았고, 허름한 아저씨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김동진씨는 도저히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고 있는 사이 다행히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었다. 김동진씨는 양복입은 아저씨 옆에 딱 붙어서 걸었다. 양복 아저씨는 뒤를 돌아보며, 안 쫓아오네, 라고 말했다. 다행이었다.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너고 신호가 바뀌었다. 그 허름한 놈은 건너오지 않았다. 김동진씨는 오른쪽으로 가야 하고 그 아저씨는 왼쪽으로 가는 것 같았다. 김동진씨는 재차 아파트 입구까지만 가달라고 부탁했지만 아저씨는 이제 따라오지 않으니 괜찮다고, 얼른 가라고 말했다. 시계를 흘끗 보며, 늦은 밤도 아닌데 거 참, 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김동진씨는 허름한 놈이 있는 쪽을 볼 수가 없었다. 너무 무서웠다. 그리고 김동진씨는 거기부터 아파트 입구 불 켜진 상가까지 전속력으로 뛰었다. 구두를 신고 있어서 발이 불편하건 뭐건 상관없이 사력을 다해 뛰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들어갔다. 아니, 사실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그 허름한 놈이 따라왔을까봐 너무도 무서워서. 


김동진씨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와같이 엄마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김동진씨는 방에 들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야말로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부들거렸다. 나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가 싶었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말하지 못했다. 평소에도 김동진씨의 사소한 언행 하나하나에도 트집잡으며 욕설과 함께 비난을 퍼붓던 엄마였기에, 이런 일을 얘기했다간 벼락이 날아올 태세였다. 그래서 김동진씨는 엄마에게 그 일을 말하지 못했다. 아마도 친구에게 문자같은 걸로 연락을 했던 것 같다. 친구는 함께 걱정해주었다. 김동진씨는 울지 않았다. 아마도 혹시라도 엄마에게 들킬까 두려워 울지 못했던 것인지, 그냥 눈물이 안 나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날 밤 김동진씨는 처음으로 성폭행 피해자들을 생각했다. 방금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는 생각과, 운 좋게 살아남았다는 생각, 그런데 만일 내가 피해자가 되었더라면, 그리고 이 세상의 그 숱한 피해자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김동진씨는 그 뒤로 다시는 그 한 번에 오는 노선의 버스를 타지 못했다. 귀찮고 힘들어도 늘 중간에 한 번 갈아타는 버스를 탔다. 그 집에서 다른 동네로 이사갈 때까지 줄곧 그렇게 했다.


너무 길지 않게 쓰는 게 이 시리즈 글들의 컨셉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길어지고 말았다. 김지영책에서 인용한 인용문도 심지어 길다. 하지만 어디 한 군데 줄일 데가 없었다. 20년도 더 전인 그 날의 기억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지금도 이렇게 자세히 다 끄집어낼 수 있을까. 


언젠가 집 앞 골목길에서 술취한 아저씨가 비틀거리며 '에~'하는 소리까지 내며 내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순간 약간의 무서움을 느낀 나는 얼른 그 아저씨를 비켜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집에와서 남편에게 그 얘기를 하자 남편은 피식 웃었다. 어떻게 지금 웃을 수가 있냐고 일장 연설을 했다. 아마 본인도 술취한 아저씨가 되어 어딘가에서 그러고 다닌 일이 있으리라. 그러니까 웃었겠지. 그 피식거림은 생존의 기로에 서서 기본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늘 안고 살아야 하는 여성의 삶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 자의 웃음인 것 같아서 두고두고 기분이 나빴다. 


그 날의 일을 기억하며 나는 지금도 가끔, 아이들이 그런 일을 물론 당하면 안 되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을 당했을 때 와서 털어놓을 수 있는 엄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엄마는 그러지 못했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그런 엄마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언제나 무슨 이야기든 잘 들어주는 혹은 비난이나 비판하지 않고 들어주기만 하는 일은 쉽지는 않은 일이다. 몇 시간 전 큰아이에게 공부해야 한다고 잔소리를 했던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본다. 제일 중요한 건 무슨 일이든 얘기할 수 있는 모녀관계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얼마 전 '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이란 책을 주문했다. 오마이뉴스의 남자기자가 쓴 책이었다. 김지영씨를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르려 했던 그 남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과 짓거리를 했는지, 저 책을 읽고 나서도 이해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자기성찰을 하는 남자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운이 좀 난다. 얼른 끝까지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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