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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Dec 10. 2019

초경은 *학교 *학년 때였다

'82년생 김지영' 59쪽

초경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또래에 비해 늦은 편도 빠른 편도 아니었다. 언니도 중학교 2학년 때 월경을 시작했고, 김지영씨는 언니와 체형이나 식성도 비슷하고 꼬박꼬박 옷을 물려 입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 속도도 비슷해서 때가 되었다는 예감은 있었다. 당황하지 않고 언니의 책상 첫 번째 서랍에 있는 하늘색 생리대를 꺼내 쓰고, 언니에게 월경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에휴, 너도 좋은 날 다 갔구나." 김은영씨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82년생 김지영, 59쪽)


(중략) 아랫배를 움켜쥐고 방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하면서 김지영씨는 이해할 수가 없다, 는 말을 반복했다. 세상의 절반이 매달 겪는 일이다. 진통제라는 이름에 두루뭉술 묶여 울렁증을 유발하는 약 말고, 효과 좋고 부작용 없는 생리통 전용 치료제를 개발한다면 그 제약 회사는 떼돈을 벌 텐데. 언니는 뜨거운 물을 담은 페트병을 수건에 둘둘 말아 건네며 동의했다. "그러게 말이야. 암도 고치고, 심장도 이식하는 세상에 생리통 약이 한 알 없다니 이게 무슨 일이라니. 자궁에 약 기운 퍼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아나봐. 여기가 무슨 불가침 성역이라도 되는 거야?" 언니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배를 가리켰고, 김지영씨는 아픈 와중에도 페트병을 끌어안고 낄낄거렸다. (82년생 김지영, 63쪽)


김동진씨의 초경의 기억.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어느 날 저녁때쯤 김동진씨는 팬티에 뭔가 거무스름 불그스름한 게 묻어있는 걸 발견했다. 뭔지 몰랐지만, 엄마에게 얘기하면 왠지 혼날 것만 같아서 김동진씨는 그냥 그 팬티를 세탁기 안에 던져버렸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 팬티에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같은 무언가가 묻어있는 걸 발견한 김동진씨는 어쩔 수 없이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침착하게 생리대를 주면서 생리대 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지금처럼 얇은 생리대가 별로 없고 생리대들이 다 두툼했던 그 때, 뭔가를 찼다는 불편감을 느끼고 김동진씨는 하루종일 학교에서 시간을 보냈다. 집으로 왔을 때 엄마가 그 전날 밤 김동진씨가 세탁기에 던져놓은 무언가가 묻은 팬티에 대해 물었고, 여전히 왠지 말하면 혼날 것 같았던 느낌에 김동진씨는 모른척했다. 엄마는 다행히 더 이상 캐묻지도 혼내지도 않았다. 


그 이후 나의 경험은 보통의 대한민국 여성의 경험과 같다. 생리를 생리라 부르지 못하고, 생리대를 생리대라 부르지 못하고, 마트에서 생리대를 살 때도 항상 검은 비닐봉지에 담겨서 은밀히 오가는.. 그런 경험을 하고 살았다. 하지만 몇 년 전 국제여성영화제에서 '피의 연대기'라는 영화를 보며 많은 것을 새로이 깨달아 알게 됐다. 그리고 나서 쓰는, 엄마가 된 이후의 김동진씨의 이야기.


김동진씨는 언제 초경을 할지 모르는 지혜양에게만큼은 본인과는 다른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다. 인터넷 검색질을 마구 하다가, 전세계 약 100명쯤의 여성들이 자신의 초경에 대한 경험을 쓴 글을 모아놓은 '마이 리틀 레드북'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어느 미국 여성이 자신의 블로그에서 재미삼아 초경 경험을 글로 쓰고 다른 사람들의 글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미국 여성들 뿐 아니라 (물론 영어가 가능해야 하겠지만) 온갖 나라 여성들이 글을 보내주었고, 드디어 그 글들을 모아 책으로 냈으며, 우리나라에도 번역본이 존재했었다. 그 때 당시에는 그 책이 절판이라 김동진씨는 어렵게 중고서점에서 그 책을 사 두었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지혜양이 언제 초경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만일 그 날이 온다면 지혜양에게 그 책을 선물로 줄 셈이었다. 


드디어 그 날이 왔다. 지혜양이 초등학교 6학년이던 여름의 어느 날, 아이는 김동진씨에게 와서 당황한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김동진씨는 김동진씨의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침착하게 위생팬티와 생리대를 내주고 생리대 착용법을 알려주었다. 김동진씨는 엄마로부터 받지 못했던 다정한 포옹과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를 지혜양에게 해 주었다.


다른 집 엄마들은 혹은 서양 사람들은 딸의 초경파티를 열어주기도 한다는 것을 어디선가 듣고 본 것이 있어서 김동진씨는 지혜양에게 가족만의 파티를 열어주고 싶었다. 꽃과 케잌이 떠올랐다. 김동진씨는 지혜양을 하교길에 만나 함께 케잌을 사러 갔다. 지혜양은 평소에 좋아하던 초콜렛 케잌을 골랐다. 김동진씨는 남편에게 꽃을 사다달라고 부탁했다. 둘째 지선양이 집에 올 시간이라 더 이상 집 밖에서 시간을 보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김동진씨는 예쁜 꽃다발을 생각했다. 그런데 강원도씨는 꽃이라고는 자그마한 꽃망울 한 개도 없는, 다육이 화분을 사 들고 들어왔다. 심지어 꽃은 몇 년에 한 번씩 아주 드물게 핀다는 말까지 전해주면서. 김동진씨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혜양의 초경 날, 예쁜 꽃다발로 축하해주려는 김동진씨의 로망이 좌절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딸 지혜양은 오히려 푸른색만 있는 그 다육이 화분을 좋아했고, 만약 엄마가 꽃다발을 줬더라면 아마 자신은 토했을 거라고 말했다. 강원도씨는 지혜양에게 평소에 절대로 주지 않았던 막대한 양의 용돈을 주었고, 김동진씨도 아차 싶어서 남편보다는 적지만 그래도 결코 적지는 않은 액수의 용돈을 주었다. 그제서야 지혜양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김동진씨는 몇 달 전에 사두었던 '마이 리틀 레드 북'을 딸 지혜양에게 주었다. 김동진씨의 초경 경험도 이야기해주면서. 책을 좋아하던 지혜양은 단숨에 그 책을 다 읽고, 중간중간 김동진씨에게 와서 '엄마, 어떤 중국 여자는 말야~' 하면서 놀라운 다른 여자들의 초경 경험을 읊어댔다. 지혜양의 초경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언니 덕에 생리가 뭔지 생리대가 뭔지 이미 알고 있었던 김지영씨처럼, 김동진씨의 둘째아이 지선양은 초등학교 2학년, 언니가 초경을 했던 그 때부터 이미 생리가 뭔지 생리통이 뭔지 생리대가 뭔지 귀동냥으로 들어서 알고 있다. 언니가 없는 김동진씨는, 책에 나오는 김은영씨와 김지영씨처럼, 아이들 지혜양과 지선양이 그렇게 서로 의지가 되는 자매로 커가기를 바라고 있다. 


아이에게 '마이 리틀 레드북'을 선물하고 나서 우연히 찾아보니, 강남역 사건 이후의 페미니즘 바람 덕분인지 절판되었던 그 책이 다시 서점에서 팔리고 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고, 더 많은 엄마들이 이 책을 보고 딸에게 선물하면 좋겠고, 더 나아가서는 한국 버전으로, 한국 여자들의 초경 경험을 모은 책도 나오면 좋겠다. 마이 리틀 레드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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