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게 울컥함을 느낀 순간은 라미란의 눈물 (울진 않았다)
주로 CGV에서 영화를 보는데, 개봉 거의 한 달 전부터 주구장창 예고편이 나왔다. 포스터와 예고편만으로도 초반웃음+후반눈물로 대표되는 천만 영화 후보의 '신파적' 정체성으로 가득한 영화일 것임을 대강 추측할 수 있었고, 실제로 개봉 이후 쏟아져 나온 영화평론가들의 한줄평이나 실관람객들의 반응도 딱 그것이었다. 히말라야 핵노잼(!). 주연배우까지 똑같이 황정민이어서 딱 1년 전 연말의 <국제시장>과 너무 겹쳐지는 상황이라, 사실 이 영화 그냥 망해버렸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다. 초반 예매율도 <스타워즈>나 <대호>랑 비등비등하고 오히려 두 경쟁작에 대한 반응이 더 좋은 것 같아서 내 저주가 현실이 되기도 하는 것일까 기대도 했지만, 크리스마스 연휴와 연말연시 연휴를 끼고 스크린을 독점하며 차곡차곡 천만을 향해 관객수를 쌓아가고 있다. 얼마 전 한 독립영화감독이 - 물론 독립영화감독이라는 호칭이 가능한 호칭인지는 좀 애매하다 - 요새는 배급사가 예상하거나 목표하거나 한 딱 그만큼 관객수가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하여간 문화를 가장 잘 한다고 주장하는 CJ엔터테인먼트가 정말이지 좀 무섭기는 한 것이다.
쉽게 읽히는 감동 코드에, 눈물이 나오려다가도 멈췄다
<히말라야>를 볼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새해 첫날 가족끼리 볼 영화를 고르자니 전주에선 딱히 보러 갈 수 있는 영화가 없었기에, 4장을 예매했다. 모든 것은 예상대로 흘러갔다. 가족 단위의 관객이 극장 안을 앞자리까지도 꽉꽉 채우고 있었고(흥행의 비결?), 지역 극장 특유의 공기가 감돌았다. 황정민(엄홍길)이 라면스프를 넣어 야매요리를 해서 베이스캠프 대원들을 먹이는 도대체 이걸 보고 어떻게 웃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에피소드로 시작하더니, 영화 전반 내내 아재 개그를 들었을 때의 실소조차 안 나오는 너무 뻔한 클리셰 코미디로 진행된다. 중반부터는 히말라야 등반하다가 위기에 빠지면서 눈물 짜고 감동을 느끼라고 강요하는 장면들의 연속인데, 사실 '기대를 너무 안 하고 봐서' 그런지 생각보다 눈물이 나올 뻔한 장면들은 몇 번 있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고, 또 황정민, 정우, 김인권, 정유미가 단체로 질질 짜면서 연기하고 있는데 슬픈 감정 자체를 느끼지 않기란 힘들었다. 그러나 그 눈물과 감동의 코드란 너무나도 1차원적인 것이어서,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이미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래서 영화 중반부쯤에 이미 다 면역되어 버렸다. 정우(박무택)가 죽었을 때 이미 한 2시간 지났겠거니, 이제 영화가 끝나겠거니 생각했는데, 그 이후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영화의 '제발 좀 울어라' 공세에 더 이상의 슬픔이 느껴지기보다는 그냥 영화를 멍 때리고 보게 되었다. - 개인적으로 <히말라야>가 찍어놓은 같은 재료들을 가지고 편집만 다시 해도 훨씬 더 즐겁게 볼 수 있는, 슬픔 강요에 지치지 않고 진이 빠지지 않으면서 볼 수 있는 영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혹은 92년부터 2005년에 이르기까지 14년간 있었던 실화를 모두 다 영화 안에 담겠다는 욕심만 버렸어도 훨씬 더 깔끔한 시나리오가 나왔을 것이다.
클리셰라는 것이 항상 나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영화의 클리셰 사용은 너무 과하거나 너무 뻔해서 마치 주말드라마를 보다 보면 다음 장면, 다음 전개를 그냥 예상할 수 있듯이, 다음에 어떤 장면이 나오겠구나 생각하면 어김없이 그 장면이 나왔다. 예를 들면, 황정민(엄홍길)의 휴먼원정대 제안을 대원들이 거절한 다음에 대원들의 아지트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황정민이 잡힐 때 이미 대원들이 거기에 합류하겠거니 예상했고 아니나 다를까 라미란이 "여기 잔 세 개 추가요"라고 외치면서 대원들이 합류했다. 영화 내내 그런 식이었다. 2시간짜리 아웃도어 광고에 클리셰 감동, 클리셰 웃음 MSG만 잔뜩 투척한 느낌이었다.
실화보다 더 '평면적으로' 가공된 캐릭터들, 싸나이(!)와 집사람
게다가 <히말라야>는 예상 밖의 불편함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내조하고 희생하는 여성상'에 너무나도 부합하는 여성 캐릭터들의 등장이었다. 물론 여성의 비중이 작은 것이 거의 완전한 '남성들의 세계'인 산악인들의 세계를 다룬 실화이기 때문이라고 실드를 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말라야>는 영화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캐릭터들은 실제 인물들을 영화적으로 가공하거나 혹은 왜곡한 것이다. 정유미가 연기한 정우(박무택)의 부인은 실제로는 영화 속에서와 달리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오지 않았었다고 한다. 정유미, 그리고 황정민(엄홍길)의 부인 역으로 나오는 유선 두 사람이 연기한 '여성 캐릭터'가 영화 속에서 담당한 역할이라고는 '제발 가정도 생각해 달라고 남편에게 애원하면서도 남편을 내조해주고 애를 잘 키우며 끝끝내 남편을 원망하지는 않고 남편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그런 '남편의 부인'으로 존재하는 것뿐이었다. 유선, 정유미 정도 되는 배우들이 도대체 왜 이런 시나리오에 이런 정말 기능적인 기능밖에 못 하는 역할을 특별출연으로까지 나와서 연기했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 최근 페이스북에서 여배우들이 여배우가 맡을 수 있는 욕심나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시나리오가 한국 영화계에 참 없다고 인터뷰한 내용들을 모아놓은 자료가 생각이 난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 출연했던 이정현도 수남 역을 노개런티로 연기했던 이유를, 한국영화에 쉽게 나오기 힘든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고픈 욕심이 생겨서였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싸나이'라는 단어로 압축되는 특수한 종류의 남성성에 부합하는 캐릭터로 재가공된 남성 캐릭터들도 가관이었다. 정우(박무택)는 '무뚝뚝하고 표현은 잘 못하고 잘해주지도 못하지만 사실은 마음 깊숙이 너만을 사랑하는' 경상도 남자를 연기했다. 황정민(엄홍길)은 '아내와 아이들이 원하지 않는 위험한 행동을 감행하고 집안은 돌보지 않는데다가 고집불통이지만 그냥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이유를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대사로 자기 정당화하는' 애잔한 K-아버지를 연기했다. 게다가 영화 속 황정민은 대원들의 위험이나 안위, 삶 같은 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가 꽂힌 목표를 위해서 대원들을 희생시키는 약간은 광기 어린 '리더의 나쁜 예'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동진 블로그에 갔다가 한 블로거가 댓글로 캐릭터를 이렇게 만든 것은 산악인과 고인에 대한 모욕 아니냐는 식으로 얘기해놓은 것을 읽기도 했는데, 정말로 딱 그런 느낌이다. 더 입체적이고, 더 매력적인 캐릭터들로 실화의 인물들을 더 살려내는 방식도 있었을 텐데, <히말라야>에서는 인물들을 더 클리셰에 맞게 평면적으로 깎아내면서 다 죽여버린다.
영화 보면서, 그리고 영화 본 이후에 더 인상적으로 느껴졌던 캐릭터는 라미란(조명애)이었다. 일단 라미란은 같은 시기 개봉한 <대호>에도 나오고, 현재 가장 인기 드라마인 <응답하라 1988>에도 나오고, 아주 다작하고 있는데도 은근히 이미지 소모가 잘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내가 <히말라야>를 보면서 진심으로 울기 직전까지 갔던 단계는 단 한 번이었는데, 라미란이 황정민(엄홍길)에게 "사실 정우(박무택)를 미워한 적도 있었다"고, "나도 정상을 밟고 싶었는데 항상 대장님은 박무택만 선택했다"고, "내가 여자라서 그런 건지, 내 실력이 부족한 건지 고민했다"고 말하며 울먹거리는 장면이었다. 라미란이 여성이었기 때문에 여성으로서 느끼는 남성 중심사회에서의 여러 가지 억압에 감정이입을 남성인 내가 했다고 하기에는 좀 억지스러워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고, 실제로 나는 그 결국에는 '이름 없는 조연들'이 가질 법한 감정에 대해서 어떤 북받침을 잠시 느낀 것이 아니었나 생각했다. 정상에 오르기 직전까지 함께 고생하지만 결국 정상에 오르지는 못하고, 이름도 남기지 못하는, 그렇지만 대장의 명령에 따라야만 하는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 장면에서만큼은 황정민(엄홍길)이 진심으로 미웠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히말라야>의 모티브가 된 실제의 휴먼원정대를 찾아봤는데, 당시 대원들 중에 여성 대원은 없었던 것으로 보아 라미란(조명애) 역할 자체가 영화적으로 창조된 캐릭터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하여튼 그나마 이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로서 자기 역할을 하는 라미란(조명애)이 완전한 허구의 캐릭터였다는 것은 여러 가지 조금 복잡한 생각을 하게 했다. 이런 캐릭터는 실제로 영화 안에서 어떤 역할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일까 하는. 남성들만 나오는 영화는 우중충하니까? 아니면 유선, 정유미를 더 전형적인 여성성 안에 가두는 가공에 대한 일정한 반대급부? 그냥 라미란을 쓰고 싶어서?
★★★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