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네버 렛 미 고> 감상문 (과제)
마크 로마넥 감독의 영화 <네버 렛 미 고>(2010)를 보고 나서 드는 가장 큰 감정은 찝찝함, 답답함 그리고 무력감이었다. ‘복제인간’인 것으로 추정되는 주인공들은 그들의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적극적인 저항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그런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관객들도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네이버에 올라온 한 비평(?)에서는 이 영화 내러티브 내에서 주인공들이 집단적으로든 혹은 개인적인 ‘복제인간 사회’에서의 탈주이든 저항할 수 있는 방법들이 충분히 많아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것이 전혀 일어나지 않고 운명에 순응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투덜거림도 볼 수 있었다. 정말로 그렇다. 내가 만약 감독이었다면 주인공들이 자신들의 자동차를 타고 관리자 인간들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도피하도록 하고 그들을 통제하려는 인간과 복제인간과의 추격전 내지는 싸움을 (서스펜스와 스펙타클을 섞어서) 그려냈을 것 같다. 그러나 영화 속의 ‘저항 없는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평화롭게 유지된다. 원작이 있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이하기까지한 평화로움이 영화와 영화가 상징하는 세계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어쩌면 가상의 복제인간들에 대해서 그리고 있는 이 영화를 일등시민과 이등시민을 구분하여 통치하는 현대사회의 권력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어낼 수도 있다고 본다. 인간/복제인간의 이항대립을 자본가/노동자, 상층계급/하층계급, 서구/제3세계, 남성/여성, 백인/흑인, 이성애자/성소수자 등으로 치환하더라도 이야기의 큰 얼개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피지배집단은 지배집단과 분리된 채로 교육받는다. 복제인간들처럼 헤일셤에 갇혀 지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다양한 구별짓기의 방식으로 아동 단계에서부터 피지배집단 아동/청소년이 교육받는 장소, 그리고 교육받는 내용은 지배집단 아동/청소년의 그것과 괴리된다. 피지배집단 아동/청소년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정체성 특성으로 인해 주어진 ‘운명’을 학습하거나, 지배집단 아동/청소년들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보편적이라고 여겨지는 자연화된 지식들로 인해서 상처를 입는다. 사회에서 두 집단이 담당하는 역할에도 차이가 발생한다. ‘여성화된 일자리’라고 불리기도 하는 질이 낮은 일자리에는 주로 여성들이 취업한다. 혹실드의 <나를 빌려드립니다>에서 확인한 것처럼 제3세계의 여성 하층계급은 ‘대리모’와 같이 감정(친밀성)노동의 극단적인 산업에서 일을 하게 된다. 이들의 삶의 조건이 서양, 남성, 상층계급 중 하나에라도 해당되었더라면 그들이 그런 역할을 직업으로 담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성이나 성소수자들은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 남성에 비해서 성매매 산업에 성판매자로 종사하게 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한 피지배 혹은 소수집단의 노동자들/개인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생산품으로부터, 생산과정으로부터 더 많이 ‘소외’된다.
캐시와 토미가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싸우지 않고, 거기에 순응해버리는 모습이 오히려 관객에게 더 불편하고 이질적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그나마 이러한 ‘자연화된, 본질화된 정체성’과 ‘집단계층’의 문제에 저항하는 언어들을 그동안 개발해왔던 흔적들이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퀴어 이론, 노동운동론(맑시즘) 등은 실제로 세계가 안정적으로만 유지되지는 못하도록 끊임없이 지배세계에 타격을 가하고 진동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부분의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 사이의 지배적인 권력관계는 역전되거나 폐지되지 않고 있다. 관객으로서 우리는 복제인간 캐시와 토미의 사랑과 눈물, 삶에 대한 의지 같은 것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몰입하게 되지만 허무하게도 복제인간들은 ‘기증 유예’ 같은 것은 없다는 말 한 마디에 좌절하고 운명에 순응해버리는 모습을 보이고 만다. 이러한 전개는 상당히 냉소적인 느낌을 주었는데, 현실세계에서의 저항이 성공하는 것 혹은 발생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물론 소수집단의 피지배성 자각(계몽)이 어렵다고 단정하는 것은 소수집단을 타자화하는 또 하나의 담론이 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보편적인 인간들은 자신이 배태되어 있는 구조 내에서 사고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소수자인 ‘그들’과는 어느 정도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우리’가 소수자에게 이입했다가 허무함을 느끼거나 슬픈 감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경험 자체가 우리 자신이 갖는 소수자 문제를 접하는 윤리적 이슈 – 성찰성의 승자들(reflexivitiy winners)이 소수자 문제를 ‘관용’이나 ‘배려’의 형식으로 풀어나가는 위치를 점유하는 문제 - 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도록 만든다. 우리는 소수자를 도구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소수자 문제를 이야기하는 자신을 소수자 영역 바깥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세계 모든 존재의 다양한 소수자성들이 횡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흥미로운 장치 중의 하나는 헤일셤을 빠져 나온 복제인간들이 다른 삶의 가능성을 어쨌든 모색해보는 계기가 되는 다름 아닌 미디어 테크놀로지다. 실제의 인간사회나 자신들이 모르는 다른 문화를 경험해볼 방법이 떠도는 소문이나 이미 지배집단의 방식으로 철저히 윤색되었을 헤일셤에서의 모의 교육 정도밖에 없었던 복제인간들에게 다른 삶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텔레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동성(mobility)은 헤일셤에만 갇혀 있을 때보다 어쨌든 인간사회에서 섞여 살고, 하루 정도의 여행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넓어졌다고 볼 수 있지만 그들의 텔레비전 시청(그리고 야한 잡지 읽기)을 통해서 훨씬 더 폭넓어진다. 사랑의 감정이나 사랑을 하는 방식도 상상이나 실제 경험을 넘어서 텔레비전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물론 그들에게 텔레비전 사용법이 익숙하지 않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다양한 상징들을 해독할만한 약호를 복제인간들이 많이 소유하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텔레비전이라는 테크놀로지가 가정화(domestication)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의 텔레비전이 하는 역할은 유동성의 사사화(mobile privatization)가 열어주는 하나의 (저항공간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들이 ‘복제인간’이기는 하지만, 그런 걸 고려하고서라도 영화에서 ‘진짜 인간’들의 사회가 특별히 인상적으로 그려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 또한 흥미롭다. 진짜 인간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헤일셤 학교의 선생님들을 제외하고는 TV 속 인물들, 식당에서 주문을 받는 인물과 같이 복제인간들이 헤일셤을 나와서 마주하게 되는 사회의 배경 정도로만 처리된다. 복제인간을 만들어낸 인간들의 행위자성은 의도적으로든 그렇지 않든 숨겨지고 있으며, 복제인간에 대한 윤리적 문제로 시끄러웠을 법한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논란은 영화 내에서 보여지지 않는다. 이는 극 자체의 전개를 단순하고 매끄럽게 만드는 효과를 지님과 동시에, 영화 내에서는 묵음으로 처리된 인간사회의 외전을 관객이 상상을 통해 복원시켜 볼 수 있도록 하는 여지를 남겨 둔다.
과연 의학/생명 테크놀로지의 개발을 통해서 복제인간을 만들어내고 복제인간이 ‘생산’하는 장기들을 착취해서 복제인간들이 자신의 생산물인 장기들로부터 소외되게 하고 그들의 삶까지 ‘종료’되게 만든 인간들은 그래서 행복해졌을까? 여기에 대해서 단호하게 ‘아닐 것’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생산력의 무한한 발전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한 계급철폐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마르크스의 전망과는 달리 오히려 생산력이 발전할수록 더 많은 착취만이 발생하고 있는 것과 같이, 기술을 통한 ‘장기’의 생산을 통해 생명을 끊임없이 재창출해낼 수 있게 된 사회라 할지라도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고로 인해 잃지 않게 된 사회가 되었다 할지라도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행복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복제인간 집단과 인간 집단을 구분하면서 형성되어 있는 인간관계, 확장되지 못하고 오히려 특정한 대상(복제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는 인간)에게로 축소되는 식의 권리와 존엄성의 개념이 유지되는 한 인간사회도 여전히 불평등한 사회, 그로 인해 수많은 불행들이 여전히 발생하는 사회일 것이라고 예상해 볼 수 있다.
복제인간은 인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되었을까? 자세히 그려지지는 않지만, 루스는 자신의 원본인간을 찾아보려고 하다가 “창녀 같은 사람이 아니고 저렇게 멀쩡한 사람이 나의 원본일 수는 없어!” 라며 분개한다. 복제 기술이 아직까지는 초기 단계라고 친다면 아마도 그 가격이 매우 높을 것이고 그렇다면 복제인간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은 매우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이러한 식으로 복제 기술은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특수한 계층의 이익에 경향적으로 더 기여하게 된다. 복제인간을 무한히 만들 수 있게 된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위계를 만들어내는 방법이 고안될 테니 말이다.
기술의 발전과 인간사회와의 관계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 크게는 복제기술과 관련하여, 작게는 방송통신기술에 관한 내용도 나오는 - 영화 <네버 렛 미 고>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이라는 현상은 반드시 그것의 그늘을 남기게 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러한 흐름을 바꾸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저항조차 하지 못하는 복제인간들에게 이입하게 함으로써, (영화에서 강조되고 있는 인물은 아니지만) 헤일셤의 교사 루시와 같은 비판적 위치에 설 것을 관객들에게 제안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물론 그러한 윤리적 위치에 서는 것에도 이면이 있을 수 있다는 점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