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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는 매개되지 않는다

Technology and Everyday Life 10주차 리딩로그

by 페르마타

이번 주의 두 글을 읽고 나서 사실은 “so what?”의 느낌이 약간 강하게 들었다. 죽음/추모와 온라인 미디어/테크놀로지를 접합시키는 논의라고 요약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죽음/추모 말고 다른 소재들과 결합되어 있는 사이버스페이스에 관한 논의들과의 특별한 변별점을 찾을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Veale(2004)은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추모 행동의 동기(motivation)와 특징(characteristic)을 기존 오프라인에서 발생하는 추모 행동을 설명했던 기존 논자들의 논의와 비교하여 설명하고,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공간이 추모 행동에 적합한 공간으로 여겨지는지에 대해서 ‘Memorial Attribute Model’이라는 저자 고유의 논의 틀을 가지고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다만, Memorial Attribute Model이나 글의 마지막에 제시되는 collective memorial landscape라는 용어는 명료하게 개념화되었다기 보다는 수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Hutching(2012)의 글은 인터넷과 죽음이라는 두 현상이 결합되는 상황에 대한 기존의 문헌들을 종합한 일종의 메타적 논의이다. 세 가지 측면에서 ‘죽음’과 이를 둘러싼 상황을 사례로서 분석하는 것이 유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사실 커다란 설득력이 느껴지지는 않으며 오히려 일종의 ‘소재주의’의 사례로서 비판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글을 읽고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 내가 트레이닝 받아 왔던 학제의 영향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다소 현상을 피상적으로 기술하는데 치중해 있는 논의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언가 다른 개념이나 논의가 합쳐져서 확장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자꾸 들었다. (Hutching의 글의 마무리 부분에서 제시하고 있는 일종의 향후 연구 방향들이 추후 연구 과제로만 툭 던져질 게 아니라 사실 이 글들에서도 이미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다만 Hutching이 언급한 대로 죽음이라는 사건이 인터넷을 통해 사건화되는 여러 가지 방식들 자체가 흥미로운 지점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또한 그러한 사건에서 출발해 무언가 이론적인, 경험적인 연구 거리들을 상상해볼 수 있게 하는 단초가 된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


더불어 두 글에 등장하는 개별 사례들 자체에는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나 또한 죽음과 그 이후의 상황들을 사이버스페이스를 매개하여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가까운 또래 중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 두 사람 있는데, 그들을 내가 계속해서 이따금씩 기억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매개체가 다름 아닌 페이스북이다. 한 경우에는 소식을 듣고 대전에 있는 장례식장까지 내려갔다 왔던 경우인데, 그때는 그 친구의 담벼락에 글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그 친구의 다른 지인들이 남겨 놓은 글을 읽으면서 그 친구를 이제야 뒤늦게 더 이해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슬픈 마음을 며칠간 유지했다. 그리고 3년 정도 지난 후 최근에 면접을 보러 갔던 곳이 우연히 그 장례식장 근처여서 그 친구가 생각났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친구의 타임라인에 글을 올리는 일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친구의 지인들이 내 글에 ‘좋아요’를 눌렀다. 반대로 나 역시도 가끔씩 내 타임라인에 올라오는 그 친구의 담벼락에 올라온 글 하나를 통해서 그 친구의 담벼락과 그 친구가 썼던 글과 그 친구 사진들을 다시 살펴보게 되곤 한다. 다른 경우에는 내가 소식을 늦게 전해 들어서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었는데, 그때 나는 페이스북 담벼락에 결국 올리지는 못했지만 이런저런 글을 써보고 지우면서 나 나름의 미안한 감정과 슬픈 마음을 풀어보려고 했던 것 같다.


두 사람의 담벼락을 읽을 때마다 내가 인상적이라고 느꼈던 부분은 ‘네가 보고 싶어 했던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노력할게’ 라는 식의 다짐을 자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법조인이 되려고 준비를 하던 사람들인데, 그런 글을 보면서 나는 마치 그 죽은 사람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을 통해서 그 사람을 알던 다른 사람들을 일종의 지향/이념 공동체로 묶어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와 불특정 다수가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페이스북 같은 플랫폼이 아니었다면, 만약 주소를 입력하고 들어가야 하는 특정한 추모용 웹페이지였다면 혹은 그런 곳이 전혀 없었다면, 나는 가족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학연이나 지연으로 묶여 있는 것도 아니었던 그 친구들을 생각나게 하는 일상의 덜컹거림을 이렇게 비정기적으로라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유명한 사람’들을 통해서만 만들어지던 현상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개인들의 죽음을 통해서도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이겠지만, 결국 죽은 사람을 통해서 산 사람들의 사회에 무언가 영향력 있는 현상이 만들어지는 것은 여전히 셀러브리티를 통해서, 또는 글로벌 뉴스를 통해서 심각하게 다루어진 특정한 사건들을 통해서 더 현저하게 나타나는 듯하다. 최근에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개봉되었지만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가 가장 대표적이라고 여겨지는데, 우리는 없는 그를 추억하고 추모하고, 그의 생각들이나 그가 남겨진 유산, 가치 같은 것들을 끊임없이 재발견하려고 노력하면서, 또 반대편에서는 그러한 현상을 ‘시체팔이’로, 그의 죽음을 숭고하지 않은 것으로 폄하하려고 노력하면서 죽은 그의 몸 혹은 그에 대한 관념이 하나의 투쟁의 장소로 만들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강남역 살인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졌던, 여성살인(Femicide)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과 페미니즘 운동의 발생 역시 비슷한 맥락에 있고, 세월호 사건이나 백남기 농민의 죽음 등도 그러하다.


쓰다 보니 더 분명해지는 것이지만, 결국 두 글을 읽으면서 나는 계속해서 이 죽음과 추모의 문제와 관련해서 사이버스페이스나 온라인 미디어의 자리가 그다지 크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던 듯하다. 조금 덜 공적인 인물의 죽음이 매개되는 방식은 추모의 동기나 특성적인 측면에서 물리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추모 행사와 별달리 다른 점이 없고, 공적인 인물의 죽음이 매개되어 벌어지는 현상들은 그 자체가 매개의 특성으로 인해 생긴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집합 기억이나 역사를 둘러싼 오래된 투쟁의 과정 그 자체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쓸쓸하게 느껴졌던 것은 어쨌든 이 모든 논의 속에서 ‘죽은 자’는 결국 완전히 사라지게 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죽은 자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죽은 자는 실제로 매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매개되는 것이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상상이 매개되는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오히려 내가 죽은 뒤를 생각해 보면서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이 느껴졌다.



참고문헌

Veale, K. (2004). FCJ-014 Online Memorialisation: The Web As A Collective Memorial Landscape For Remembering The Dead. Fibreculture, 3.

Hutchings, T. (2012). Wiring death: Dying, grieving and remembering on the internet. In Davies, D. J. & C. W. Park (eds.) Emotion, identity and death: Mortality across disciplines (pp. 4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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