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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왜 노동이란 말인가

Technology and Everyday Life 12주차 리딩로그

by 페르마타

자율주의 맑시스트들의 논의는 자본이 노동을 규정하거나 혹은 노동을 완전히 종속시킨다는 도식을 완전히 뒤집어 노동이 자본을 규정하고, 노동은 자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본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더불어 노동-자본의 관계가 부단히 변화하는 것이고 따라서 계급이라는 것도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지적한 점은 생산관계를 사유하는 데 있어서 의미 있는 단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기술이 자본의 도구이지만 동시에 노동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본 점도 일방적으로 행사되는 권력 개념과 단절하고 이중적이고 상호적인 권력의 메커니즘을 잘 포착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기술에 대한 이러한 논의는 이전에 읽었던 신체/몸(body)이 권력이 작용하는 곳이자 저항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이론화되었던 것과도 공명하는 듯하다. 기술을 다루는 능력을 노동자 혹은 민중이 습득하면서 기술을 오히려 저항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텍스트 안에서는 네그리가 정보사회라는 투쟁주기에서의 저항을 전망하기 위한 목적에 맞게 현대 정보사회와 하이-테크놀로지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기술이 자본의 도구이자 노동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모호성이나 비결정성이야말로 ‘초역사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문학/문화 연구자인 임태훈이 쓴 <우애의 미디올로지>라는 책의 9장에서는 (일반적으로 하이-테크로 여겨지지는 않는) ‘복사기’가 1980년대의 학생 운동, 민주화 운동과 어떠한 관계 위에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역전시킨 자율주의 이론은 노동의 자율성이나 저항 가능성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의 임금노동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라면 자본이 노동을 완전히 파괴할 수 없다면 노동도 자본을 완전히 파괴할 수 없을 것이고, 자본이 노동을 필요로 한다면 노동도 자본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텍스트에서는 “노동은 자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언급한다. 게다가 어쨌든 맑시스트로서 자본 일반과 노동 일반 사이에서 벌어지는 ‘기나긴 싸움’에 관해서 이야기하는데 자율주의자들이 예시하고 있는 해적 라디오나 컴퓨터 네트워크 등 기술의 창조적 사용과 같은 저항들은 어딘가 자본주의에 대한 의미 있는 저항으로 여겨지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소박하다는 인상이 든다. (어쩌면 구조에 맞서는 행위자들의 작은 저항이라도 발견하고 싶어했고, 그런 면에서 곧잘 비판을 받는 문화연구 진영에서 자율주의자들의 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이것을 자본-노동의 관계에 한정해서 보았을 때는 자율주의자들도 포착하고 있듯이 노동에 대항하는 자본의 전략이 점점 더 고도화되면서, 둘 사이의 관계의 기울기가 점점 더 가파르게 되고 있는 상황은 아닌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느꼈다. 2000년대 초반 이전에 쓰인 텍스트들에서 완전히 고려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2016년 초 세계의 이슈였던 인공지능 ‘알파고’의 등장과 같이 노동과 인간이 가졌던 밀접한 관계가 분리되는 현상일 것이다.


더불어 ‘사회적 공장’, 그리고 ‘사회적 노동자’라는 개념에 대한 의문이 든다. 텍스트에서는 1960년대 이후 등장했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폭발들’ - 아마도 신사회운동으로 해석되기도 했을 것 같다. - 에 대해서 “노동자 계급의 투쟁이 부흥된 것”이라고 이야기하거나, 적어도 이러한 다양한 폭발들이 노동과 분리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계속해서 노동을 거의 모든 사회적 현상의 중심으로 복권시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사회를 ‘공장’으로 비유할 수 있다고 논의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자율주의자들도 어쨌든 맑시스트였기 때문에 갖게 되는 한계점 내지는 일정하게 편향된 렌즈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사회구성체를 생산관계로 환원하고 모든 모순과 억압의 해결 방안을 노동 – 그것이 ‘다중’으로 다시 정리되었을지라도 – 이 주도하는 자본에 대한 저항에서 찾는 것은 나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는다. (혹은 노동자를 선험적인 혁명주체로 보는 시각에서는 벗어났을지라도, ‘끊임없이 구성되는’ 노동을 여전히 특권적인 혁명주체로 보고 있다고 여겨진다.)


내게는 하나의 커다란 고민이 있는데, 나의 맑스주의에 대한 태도나 입장을 정확하게 어떻게 만들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바깥이 잘 상상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세상은 계속해서 달라져 왔고, 달라져 있을 것이라는 전제에는 동의하지만, 실제로 현재의 억압을 해결하기 위한 운동의 방향이 자본주의 바깥을 상상하거나 자본을 넘어서기 위한 운동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이러한 생각은 곧잘 세대론적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그래서 그러한 태도를 내가 체현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낀다. 87년 이후에 태어나, ‘이데올로기의 종언’ 시대를 편안하게 살다가 비판적 학문을 하겠다고 기웃거리는 나이브한 어린 연구자로 여겨질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서 그렇다. (자본주의를 철폐하면 억압이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더 나이브하다는 생각도 일부 하면서. 다만 이 지면이 논문이나 공식적 학술대회가 아니라 쪽글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쓸 뿐이다.)


다만 나는 현 시대의 자본주의(혹은 신자유주의)가 낳고 있는 억압들을 해소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은 그나마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잘 이용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원리 안에서 노동자 혹은 다수의 민중에게 유리한 적대(antagonism) - 이것은 절대로 노동자/자본가의 이분법이 아니다. - 를 잘 조직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광범위하게 공유된 취약성’의 연대를 통해서 새로운 정치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전망과 어느 정도 부합하는 것 같다. 오히려 기술의 창조적 가능성에 주목했던 몇몇 논의들은 다소 허무한 순환주기를 갖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터넷의 가능성에 주목하다가 이후에 갑자기 인터넷의 부정적인 성격을 논의하면서 기술 낙관론에서 기술 비관적으로 넘어가는 사례가 보여주는, 하나의 기술에 대한 논의가 끝나면 또 다른 기술 혹은 또 다른 일상의 전략에 대한 ‘낙관론’으로 넘어가는 끝나지 않는 순환 고리가 내게는 감각된다.



참고문헌

Dyer-Witheford (1999). Cyber-Marx: Cycles and Circuits of Struggle in High-Technology Capitalism. 신승철, 이현 옮김 (2003). <사이버-맑스>. pp. 137-198.

채석진 (2016). 테크놀로지, 노동, 그리고 삶의 취약성. <한국언론정보학보>, 79, 226-259.

임태훈 (2012). <우애의 미디올로지 : 잉여력과 로우테크(low-tech)로 구상하는 미디어 운동>. 서울: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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