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합행동과사회운동 12주차 RP
E. P. 톰슨의 유명한 글은 노동자들의 운동에 대한 몇 가지 관점들과 단절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첫째, 톰슨은 계급의 이해관계나 투쟁 목표, 정당성에 대한 합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함으로써 노동자라는 계급은 생산관계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는 관점을 반박한다. 둘째, 톰슨은 경제에 대한 시장주의적인 이해가 아니라 관습적인 이해에 기반을 두는 도덕경제(moral economy)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노동자들의 계급적 정체성의 형성이 반드시 경제적으로 그들이 유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셋째, 여기서 도덕경제는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사회에 관철시킬 수 있는 헤게모니 투쟁의 도구가 될 수 있는데, 공통의 관습(customs in common)을 통해 대중적인 동의(popular concensus)가 조직된다는 사실은 노동운동이라고 하는 게 반드시 노동자와 자본가라는 이분법적 계급 구조에서의 적대와 대립에 의해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계급을 넘어서 공유하고 있는 신념 체계를 경유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넷째, 톰슨은 노동자들이 일으킨 집단적 쟁의들을 단순히 ‘폭동(riot)’과 같은 단어로 설명함으로써 그것의 돌발성이나 일시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해석에 반박하면서 노동자들의 운동에 다분히 의식적이고(self-conscious), 자율적인(self-activation) 측면이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톰슨의 주장들은 교조주의적(orthodox)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을 공유하고 있는 계급/집단의 형성에 관한 다양한 이론들과 공명한다. 예컨대, 이탈리아 자율주의 맑시스트들의 ‘계급구성’에 대한 이론이나 피에르 부르디외의 집단 구성에 관한 이론, 즉자적 세대로서의 ‘세대 위치’와 대자적 세대로서의 ‘실제 세대’를 구분한 사회학자 칼 만하임 등의 이론은 계급을 비롯한 집단을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성되어 나가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18세기 영국 노동자들의 사례와 1970년대 이후 한국 노동자들의 사례는 모두 노동자들이 노동자들의 정체성을 수행적으로(performativity) 형성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들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노동자 개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차원에서도 노동과 자본 혹은 민중과 국가의 적대로 형상화되곤 하는 투쟁의 전선들은 투쟁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 과정에서 형성되어 가는 것이라는 점을 역사적인 서술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 노동자들의 투쟁사에 대한 구해근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87년 이전의 시대를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내가 알지 못했던 노동운동의 생생한 현장들, 저자가 서문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지금의 사회를 만들기까지 수많은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텍스트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목격하면서 감정의 동요를 느끼고 일종의 부채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여공들의 투쟁 현장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사람들이 투쟁 과정에서 죽어 나가고 인분이 몸에 발리고 무자비한 폭력을 당하는 과정을 보면서는,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도 연대 의식을 잃지 않고 투쟁의 의지를 불태웠던 것으로 ‘숭고하게 재현된’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면서는 마치 이화여대 시위에서 학생들이 모두 함께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는 장면을 보고서, 100만 촛불의 파도타기 안에 있으면서 느꼈던 것보다도 더 큰 ‘전율’이 느껴졌다.
그러나 동시에 다시 침착하게 생각했을 때 나는 그러한 전율이나 노동자들의 희생에 대한 ‘영웅화’나 ‘낭만화’가 가진 위험한 측면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었다. 레드-콤플렉스 때문에 그러한 방식의 투쟁적인 노동운동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투쟁, 실질적으로 노동자들에게 더 도움을 줄 수 있는 혹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노동운동의 투쟁 방식 내지는 노선을 고민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노동운동의 투쟁 방식을 ‘개량’해야 한다고 보는 모든 노선과 입장을 레드-콤플렉스라고 호칭하는 것 자체도 레드-콤플렉스일 수 있다.) 사실 맑스주의와 같은 ‘투쟁론’의 세례를 받아서 자신들이 가진 위치에서 직접 혁명을 조직하지 않고 노동자들에게 혁명 의식을 심어주고 그들을 통해서 무언가를 조직하려고 했던 지식인들이 가졌던 ‘특수한 신념’이 수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고, 생계를 잃고, 삶 전체를 희생하게 만드는데 역할하지 않았다고, 지식인들에게 책임이 없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E. P. 톰슨이 이야기한 도덕경제와 같은 개념이나 그람시 이후 발전되어 온 헤게모니라는 개념을 통해서 사유한다면, 또 노동 투쟁이 아니라 박근혜의 실정을 통해서 정치적 국면을 전환시키게 된 최근의 사례를 통해서 생각한다면, 나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조금 더 논의해야 할 필요성이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여전히 촛불시위가 끝나고 나면 ‘원래 투쟁과 시위는 폭력적이고 저항적이어야 한다’면서 ‘평화적인 촛불시위’ 담론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 이상으로 공격을 퍼붓는 이야기들이 넘실대는 이 상황에서 말이다.
참고문헌
Thompson, E. P. (1991). The Moral Economy of the English Crowd in the Eighteenth Century. In Customs In Common (pp. 185-258).
Koo, Hagen (2001). Korean workers: The Culture and Politics of class formation. Cornell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