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chnology and Everyday Life 13주차 리딩로그
자율주의 맑시즘의 영향을 받은 텍스트들이 진행하고 있는 논의들은 결국 노동과 자본이라는 두 축을 상정해놓고 ‘자율적인’ 노동이 자본으로부터 이탈하고 또 그것을 자본이 다시 포섭하기 위해서 전략을 짜는 과정으로 역사를 다시 서술하고 있다. 그 맥락에 들어가서 역사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일단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고 더불어서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일방적인 착취 관계로만 설정하는 것으로 보였을 이를테면 소위 ‘교조주의 맑시즘’의 논의보다는 훨씬 더 나아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율주의의 설명에 부합한다고 여겨지는 사례들도 떠올랐다. <제국의 게임>을 읽으면서 유학을 떠난 ‘미래설계를 열심히 하는’ 친구가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이라는 요즘 유망한 분야를 공부하러 가겠다고 했던 생각이 났고, 컴퓨터 기술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노동자/소비자들의 편의를 위한 간단한 아이디어들을 실현시키는 경우들(회사 내에서 몰래 카카오톡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엑셀 모양의 카카오톡 스킨 제작, 국가 내 저작권 보호가 걸려 있는 동영상들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도록 하는 데 사용되고 있는 IP위장 서비스(VPN) 등)도 생각났다.
동시에 사실 노동과 자본의 두 축이 서로를 제한하고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하는 이러한 ‘관계적인’ 설명 방식은 꼭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서가 아니더라도 가능한 역사 서술의 방식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됐다. 참여를 강조하는 기업 내에서의 노동 관리기법 대체는 오늘날 정치 영역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사람들에게 참여하게 함으로써 체제 밖으로 이탈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통치되도록 하는 국가의 기술이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바탕으로 많이 논의되고 있다. 반대로, 국가주의를 다지는 방식으로 이용됐던 행사인 월드컵 길거리 응원의 경험은 사람들이 분노할 때마다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나서는 문화행사의 방식으로 전유되기도 했다. 어쩌면 전유와 재전유라는 개념 자체가 혹은 아이디어의 타 분야로의 전이, 확산과 같은 개념 자체가 자율주의자들이 하고 싶어했던 설명을 이미 다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를 구속하고 길들여가는 관계의 역사는 꼭 자본과 노동이 아니더라도 국가와 국민, 목자와 신도, 부모와 자녀 혹은 연인이나 친구 같은 관계에서도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자율주의자들 논의의 핵심은 자본의 자율성만을 강조하면서 노동에 대한 일방적인 폭압을 강조했던 기존 이론에의 도전이고, 결국 그것은 ‘자본과 노동’이라는 테제를 새롭게 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들이 노동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독자로서 나는 조금 더 특별한 ‘해방의 가능성’ 따위를 제시해주기를 기대하게 되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자율주의 맑시즘 조류의 글들을 보았을 때 내가 느끼게 되었던 감정은, 텍스트가 특수한 저항의 전략들을 중심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경우에는 너무 낭만적이라는 생각(박건하의 글에서 나는 마치 과거에 노동자들이 건강하고 이상적인 주체로 재현되는 경향이 있었던 것처럼, 여기서 감독이라는 기업가적 주체와 대비해서 초기의 PC방 죽돌이 게이머들을 ‘경제적인 이해’를 전혀 갖지 않는 순진한 주체로 표상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텍스트가 저항에 대해서 굳이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에는 조금 허무하다는 생각(테라노바가 “it does neither”라고 말할 때)이었다. 테라노바는 글의 말미에서 이탈리아 자율주의자들의 실패 사례를 들며, 비판 이론이 할 수 있는 일은 현재의 언제나 부분적인(partial) 경향성(tendency)을 보여주는 것이지 직접적인 사회 변화를 위해 곧바로 사용할 수 있는 전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언급한다. 이러한 일종의 이론(연구)과 실천의 ‘선 긋기’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또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론을 하고 경험연구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나는 계속해서 글을 읽으면서 자꾸 내 감상이 노동을 너무 낭만화하고 있다는 느낌 혹은 허무하다는 느낌으로 빠지게 되는 까닭은 내가 글들을 조금 걸러 읽는 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면서, 동시에 ‘자본과 노동’이라는 이분법의 틀 자체가 조금 실질적인 분석이나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헐거운 틀이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푸코가 국가 대신에 통치성 개념(국가 바깥에서 국가의 통치화를 파악)으로 나아갔던 것처럼, 부르디외가 국가를 ‘물리적 폭력과 상징 폭력을 독점’하고 있는 장소로서 그러나 선험적인 권력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권력들의 총체(summation)로서 바라봄으로써 기존의 국가 개념을 해체했던 것처럼, 또 부르디외가 자본이라는 개념을 경제 자본, 사회 자본, 문화 자본, 상징 자본 등으로 분리해서 바라보았던 것처럼, 어쩌면 자본 바깥에서 자본이라는 개념 자체를 조금 더 복잡하게 사유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이 든다. 노동의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논의가 많이 복잡하게 전개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반면에, 무언가 자본은 단일한 총체로서만 다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컨대, 최근 한 원우가 ‘메이커 문화’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들의 문화는 그들 스스로에 의해서 ‘메이커 운동(movement)’이라고 불리고 있다. <제국의 게임>에도 개발자들이 정치적인 활동가와는 다르지만 무언가를 개혁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주체들로 묘사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메이커 운동’이라는 언표가 단순히 사회운동의 언표만을 업어온 상당히 기만적인 기표라고만 생각했다가 어찌 보면 꼭 운동이 주체라는 게 노동자이거나 사회적인 주체여야만 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보게 되었다. 최근의 사회적 경제 논의나 ‘사회 혁신가’와 같은 단어들을 보면 그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운동가 혹은 노동자 주체와는 상당히 다른 양상으로 재현되고 있지만 그들 모두 ‘사회가 달라지기는 원한다’고는 명시적으로 이야기한다. 이때 그러한 사람들은 노동자인가? 자본가인가? 혹은 노동인가? 자본인가? 자율주의자들도 이야기하고 있듯이 점점 더 노동과 자본의 경계 자체가 흐릿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과 자본이라는 틀 자체가 얼마나 유효할 수 있을까? 고민해보아야 할 지점이다.
참고문헌
Terranova, T. (2000). Free Labor: producing culture for the digital economy. Social Text, 18(2), 33-58.
박건하 (2007). PC방에서 프로게임리그까지: 게임폐인의 프로게이머 되기. In 조한혜정 외 (2007). <인터넷과 아시아의 문화연구>(159-197쪽).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Dyer-Witheford, N. & De Peuter, G. (2009). Games of empire: Global capitalism and video games. 신승철 옮김 (2015). <제국의 게임: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비디오게임>. 서울: 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