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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위의 시민들

Technology and Everyday Life 14주차 리딩로그

by 페르마타

아직 훈련 중인 대학원생에 불과하지만, 좋은 문화연구자 되기 혹은 좋은 문화연구자로 살기는 참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기본적으로 학제 자체가 간학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 인문학 지식과 사회과학 지식을 어느 정도는 고루 갖추어야 하고, 이론에 능통하고 경험연구를 잘 할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지식인’의 성격까지도 가지면 좋다는 분위기나 주장이 어느 정도 문화연구 학계에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다. 게다가 문화연구 연구자로서 우리가 말해야 하는 것은 극도로 전문화된 학제적 지식이라기보다는 지금 여기의 세상을 읽어내는 이야기에 가깝다.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매스미디어에도 SNS에도 넘쳐나기 때문에 어쨌든 문화연구자로서 말하기의 정당성이 발현되려면 문화연구자만의 무언가가 필요하긴 할텐데 그것이 보통 국면(conjuncture)이나 문화(culture)와 같이 모호성이 높은 분석 범주와 연결되기 때문에 남들도 들을만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진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면 세월호에 대해서 빠른 시간 내에 이야기해야 하고, 최순실 게이트가 일어난 즉시 이 시기를 놓치지 말고 학문적/실천적 개입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도 존재하기 때문에 마냥 제대로 분석할 수 있을 때까지 생각만 하고 있을 수도 없다.


이러한 존재조건들을 따져 보았을 때 문화연구자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 있다면 자신이 무언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식이 존재하는지, 그 방식은 다른 방식들과 비교해 어떤 장단점을 갖는지 등에 대해서 스스로 잘 이해하고 그것을 잘 벼리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현상을 들이대도 같은 사고 틀을 사용함으로써 비슷한 이야기만 반복하게 될지언정, 다른 연구자나 다른 평론가에 의해서 보이지 않을 현상의 측면을 발견할 수 있는 사고회로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자원(혹은 무기)들을 충분히 갖는 것은 (모든 현상을 각각의 특이성에 맞게 단시간 내에 분석해낼 빠르고 유연한 사고력이라는 게 사실상 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차선으로라도 추구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국가’라는 개념을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그동안 다른 많은 사람들은 국가를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해왔는지를 공부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도움이 되는 일일 것이다. 내 경우엔 부끄럽게도 석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국가’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무언가 고민해볼 기회를 얻지도 만들지도 못해서 조금이라도 국가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한 것이 매우 뒤늦었지만 말이다.


현재 시점에서 내가 국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아주 단순하게 정리한다면 1) 나는 국가를 근본적으로 억압적인 것으로는 보지 않고, 2) 그렇다고 국가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3) 국가는 국민 혹은 비-국민들에게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권력항이지만, 4) 국가라는 권력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와 힘이 시민들에게도 존재한다고 보는 것 같다. 내가 이러한 식으로 사고하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내가 ‘국가’의 문제를 처음 진지하게 사고하게 된 것이 마르크스가 아닌 부르디외나 푸코의 텍스트를 통해서였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문화연구라는 학제에서 학술적인 훈련을 받아온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이렇게 국가의 문제를 현재 사고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른 저자들의 국가론을 읽을 때도 일정한 영향을 줄 것임이 틀림없는데, 이번 주의 텍스트들에서 버틀러, 스피박, 그레이버가 국가를 이야기하는 혹은 특정한 국가를 전제하는 방식들은 내 머리 속에 있는 국가 개념을 특별히 괴롭히는 정도로 이질적인 것들은 아니었다고 느꼈다. 구체적으로 ‘민족-국가’ 개념이 민족주의를 어떻게 활용하여 권력을 행사하는지와 같은 세부사항에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겠지만, 나는 다소 거칠게 이들의 논의에서 공통점을 뽑아본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국가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능력 혹은 잠재력이 있다는 것에 세 저자가 모두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버틀러는 권력이라는 것 자체가 수행적(performative)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예컨대 멕시코 언어로 미국 국가를 부르는 수행적 행위가 ‘역동적인 창조의 공간’이 될 수 있으며, 기존의 개념들이 ‘이전에 허가받지 않은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의 ‘가능성을 막을 수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동시에 버틀러는 ‘비민족주의적인 소속양식’의 존재론적인 가능성을 긍정하는 듯하다. 버틀러에게는 어쩌면 국가권력의 선험적인 영향력보다는 권력 관계를 수행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 (따라서 어쩌면 국가나 초국가적 기구들의 제도/구조적 영향력을 상대적으로는 덜 다루는 것처럼 느껴지는) 데 반해, 스피박은 ‘비판적 지역주의’와 같은 개념을 활용하면서 전지구화라는 맥락에서 상대적으로 권력의 피지배항에 위치하는 제3세계 등에서는 현실화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일종의 추상적인 구조체로서 재발명하려’ 하는 프로젝트가 중요한 전략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아나키스트로서 정체성을 스스로 선언하는 그레이버의 논의는 어쩌면 가장 극단적일지도 모르겠는데, ‘정부가 없다고 상상된 사회의 삶과 행동에 관한 원리 또는 이론’이라는 아나키즘의 정의에 맞게 그레이버가 이야기하는 많은 사례들은 마치 국가의 불필요성을 깔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나키스트들의 실천을 단순히 국가라는 존재의 실체성을 무시하거나 이미 만들어져 있는 국가 단위를 바탕으로 한 세계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동시에 드는데, 실제로 네트워크, 직접민주주의, 평등주의와 같은 가치들을 바탕으로 운동을 하는 세력들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이들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국가 혹은 정치체, 정부 등과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스페인의 포데모스와 같은 네트워크 정당의 사례들도 결국 의회민주주의와 결부를 맺게 된다. 그레이버의 글에 나오는 아나키스트의 사례들이 대부분 인류학의 연구대상인 소규모의 ‘원시사회’ 사례나 어쩌면 게토화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작은 단위들의 사례들일 뿐이라는 것은 그러한 형태의 국가 자체를 배제하고 가는 극단적인 무정부주의가 오늘날과 같은 빠르고 커다란 전지구적 사회라는 맥락에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오히려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논의들은 결국 법보다도 위에 존재하는 근대국가 위에서 다시 소위 ‘시민들’이 국가를 활용할 수 있다는, 그러한 정치 과정의 결말은 아직 정해져있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된다. 현대의 국가는 분명히 ‘벌거벗은 삶’ 혹은 ‘예외상태’ 혹은 ‘사회적 배제’와 같은 방식으로, 민족/인종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할선들을 활용해서 안의 바깥을 만들어내는 권력 작용을 행사하지만 – 어쩌면 내가 연구관심으로 꾸준히 두고 있고 앞으로도 둘 수밖에 없는 ‘청년’에도 비슷한 논의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국가라는 제도를 종국에는 이용할 수 있다는 믿음 같은 것을 두 글을 읽으며 생각했다. 완전한 희망을 품기에는 아직 부족하지만 광장에서 사람들이 박근혜 퇴진뿐만 아니라 다양한 차이들을 횡단하자는 이야기들을 주최 측에서, 또 직접 해 가는 양상들을 보면서 아예 이런 쪽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대책없는 낙관을 해 보기도 한다. 내가 아직 특별히 지식인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러한 지식인관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의 문제와는 별개로, 스피박이 “노래를 온전히 설명해낼 수 있는 언어는 ‘우리가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했던 것, 그리고 그레이버가 지식인의 역할로 “사람들의 습관과 행동에 감춰져 있어 스스로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의미를 발견하려 하는 것”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지식인이든, 혹은 미리 정해지지 않은 ‘우리’ 중 누군가이든, 총체적인 ‘우리’이든 그러한 언어들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참고문헌

Butler, J. & Spivak, G. C. (2007). Who Sings the Nation-State? 주해연 옮김 (2008).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서울: 웅진씽크빅.

Graeber, D. (2004). Fragments of an Anarchist Anthropology. 나현영 옮김 (2016).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 옥천: 포도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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