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현대적 민족주의와 민족국가의 미래

문화인류학이론 16주차 발제문

by 페르마타

7장. 원초주의 이후의 삶


7장에서 아파두라이는 민족성(ethnicity)이라는 개념에 대해 현대적인 관점에서의 재검토를 시도하고 있다. 미주(353-354쪽)를 통해 아파두라이는 이 글이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가 엮은 <구사회와 신생 국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현대성에 대한 탐구Old Societies and New States: The Quest for Modernity in Asia and Africa>(1963)에 실린 글들과의 대화”의 성격을 갖는다고 밝히고 있다. 아파두라이에 따르면 해당 단행본에 실린 논문들 중 일부는 민족성에 관해 원초주의(primordialism)적 접근을 취하고 있으며, 기어츠를 필두로 한 몇몇 다른 논문들은 “언어, 인종, 친족관계처럼 사회적 삶의 근본 원리로 보이는 것”들, 즉 민족성의 문제를 “신생국가의 정치가들이 호소하고자 하는 자연과 역사, 뿌리라는 수사학의 한 부분”으로 다시 설명하고자 했다. 아파두라이는 이 글에서 기어츠의 입장에 가까운 관점을 취하며, “원초주의 이론에 매우 큰 이론적 결점이 있음”을 논하고, “사회적 삶의 기본 동력이라고 잘못 인식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사회적 분류”, 즉 민족(성)이 “실상은 역사적으로 구성된 형식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한다(242).


아파두라이는 기존에 민족성을 설명하는 거대한 조류였던 원초주의 이론을 검토하면서, 이것이 20세기의 민족성들, “특히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양상을 보이는 민족 운동”을 “평가하는 데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242). 원초주의자들은 민족성과 같은 “집단 감정은 작고 친밀한 집단성들과 강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보통 친족 관계나 그것의 연장선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민족을 ‘본질적’인 것과 연관시키고 있다. 이는 “구식민지였던 신생 국가들에 적용되었던 미국 정치학자들의 현대화 이론”과 관련을 맺는데, 그러한 이론은 “집단 폭력과 문화 말살(ethnocide), 테러”, “반현대적인 것으로 보이는 일체의 행동 양식들”을 “비이성적인 것으로 간주”한다(243). “원초주의적 시각은 이른바 세균 이론에 입각해 있고, 특정한 구성원들과 그들의 정체가 갖는 미성숙성을 중요 원인으로 지목한다.”(248)


원초주의자들은 “비서구 국가에 대해서 비아냥”거리는 식으로 그러한 논리를 사용해왔으나, 아파두라이는 “원초주의적 논리에 입각한 서구와 비서구 사이의 경계선을 모호하게”(244) 만드는 다양한 사례들을 참조하면서 반박한다. 인도, 구소련, 스리랑카, 영국, 이집트 등 “문화적 다원주의를 경험했던 사회들조차도 작은 조각들로 분열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247), “가장 견실한 자본주의적 민주 국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 프랑스, 미국, 일본 등도 ‘원초주의적 세균’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248). “유럽과 미국에서의 극우 인종주의자들과 파시스트, 근본주의적 운동들은 그들이 대놓고 경멸하는 소수 민족들보다 행동 면에서 훨씬 더 원초주의적인 것처럼 보인다.”(248) 원초주의적 관점은 “제2차 대전 이후, 사회주의권에 속한 사회들을 포함한 대다수의 사회들이 민주주의라는 관념에 동의하고 있고, 현대화에 무게 중심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민족적 원초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 기승을 부리고 있는가?”라는 질문, 즉 “다양한 종류의 계몽주의적 기획들이 실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민족적 감정은 강화되고 확장되고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249). 이러한 근거를 들어 아파두라이는 민족성에 관한 원초주의적 관점 그 자체를 재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각주1) 사회운동에 관한 초기 이론인 집합행동(collective action)에 관한 이론이 이러한 현상을 예외적이고, 일탈적이며, 비이성적인 ‘심리학적인’ 자극-반응 모델로 설명하려 했던 것과도 상통하는 ‘감정’에 관한 이론으로 여겨진다. 예컨대, 집합행동을 기능주의적으로 설명한 스멜서(Smellser, 1962)는 일반적인 사회적 행동에 관한 탈콧 파슨스의 모델에 기대어 집합행동에 관한 설명을 전개하면서도, 집합행동을 일반적인 사회적 행동에 비해 압축된(compressed) 형태의 행동으로 표상한다는 점에서 심리학적인 설명으로 귀결된다.


정치학과 연관된 감정의 이론은 원초주의를 고수하는 모델이지만, 아파두라이는 여기에 대해서도 다양한 학제적 맥락에서 나온 광범위한 이론들 – 자본주의 발전의 기획이 발생시킨 새로운 엘리트 계층으로 인해 전통적인 신분 제도와 현대적 계급들 사이에 불일치가 산출된다는 마르크스주의자와 자본주의의 발전에 대한 민족주의자들의 입장(249), 베네딕트 앤더슨의 저서와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있는 정치에서 상상의 역할을 강조하는 사회 및 정치 이론(250), 일상생활론(세르토)이나 하위문화론(헵디지), 약한 자의 무기(제임스 스콧), 도덕적 경제학에 대한 정서(E. P. 톰슨)(251), ‘발명된 것’으로서의 전통(홉스바움, 랑거)(252), 감각적 경험과 육체적 기술을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 ‘지식과 권력을 배분하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장의 부분’으로서 보는 논의들(푸코, 모스, 부르디외, 엘리아스)(255), 감정의 구조(윌리암스)(264) - 을 끌어들이면서 비판하고 있다. 일종의 ‘사회적 구성’을 강조하는 이같은 이론들은 “원초주의가 영향을 발휘하도록 하는 현실적인 기반이 존재한다는 생각”(250)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현대 세계에서 나타나는 민족 및 집단 정치학의 대다수가 원초주의적 정서의 기계적 작동의 결과가 아니라, 아파두라이가 ‘상상력의 작업’이라고 불렀던 것의 산물이라는 점”(252)을 보여준다. 아파두라이에 의하면 “원초주의적인 정서의 창조가 국가의 현대화에 장애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현대 국민국가 기획의 중심”에 있으며(252), 민족성이라는 범주는 현대 국민국가에 의해서 동원된다(253).


아파두라이는 문화주의(culturalism)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이전에 원초주의적이라과 설명되어 있는 현상들을 재정의한다. 문화주의적인 ‘현대 민족주의’는 “문화적 차이를 ‘의식적인 대상’으로 간주”하며 “원래 자기 표현과 자율성 그리고 문화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향해 나아가지만, 형식상 부정적인 것들, 예컨대 증오와 인종주의 혹은 다른 집단들을 지배하거나 말살시키려는 욕망에 의해서 추동될 수도” 있으며(254), 따라서 “모든 문화주의 운동이 민족 집단 사이의 폭력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폭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아주 많으며,” 아파두라이는 “국민국가의 문화적 공간이 이민과 대중 매체의 외재성에 종속되어 있는 시기에는 특히 그러하다”고 분석한다(269). 또한, “현재 문화주의 운동을 이끌고 있는 주요 집단들은 국민국가의 실천을 넘어서 초국가적(transnational)”이다(254).


아파두라이가 보기에 원초주의적으로 설명되어 온 ‘계획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인종적 폭력을 연출한 각본들에는 분명히 질서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고 주장하며(257), 원초주의적 관점에서 연상되는 외파(explosions)에 대하여 제시된 일종의 수사로서 “민족의 내파(implosion)라는 모델”을 제시한다(258). 인종 폭력에 관한 에피소드들은 구조적 의미에서 “정치적 투기장에서 산출된 압력들과 파장들을 지역의 정치 속으로 집어넣는 과정을 재현”하며(270), “행동과 의사소통, 해석, 논평이라는 장기적인 과정들의 산물”로서 형성된 “지역의 정치적 상상력”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내파적이다(271). 아파두라이는 로제노(Rosenau)의 전 지구적 정치학이라는 관점을 통해서 ‘민족의 내파’를 사고한다. 로제노는 “현대 정치학에서의 구조와 과정이 다중심적 체계와 국가 중심적 체계로 분기된 체계들의 동요하는 내적 놀이의 산물”이라고 설명하며, “사건이라는 개념을 ‘운동량을 모으고 그것에 칸막이를 치며, 과정을 역전시키고 새롭게 시작함으로써 자신의 역량이 전체 체계와 그 하위 체계들 사이에서 계속 반복되게끔 만드는’ 행위 – 이것은 탐비아(Tambiah)가 제안한 초점화(focalization)와 가치 변환(transvaluation)이라는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듯한데, 두 가지 전략은 이슈들과 당사자들을 점진적으로 양극화시키고 이항 대립화하는 것에 기여한다(261). - 의 연속을 뜻하는 캐스케이드(cascades)라는 이미지로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259).


각주2) 아파두라이가 인용하고 있는 미국 정치학자 로제노(James N. Rosenau)와 스리랑카 태생의 사회인류학자 탐비아(Stanley Jeyaraja Tambiah)는 내게는 상대적으로 생소한 저자였는데, 텍스트에 소개되고 있는 캐스케이드, 초점화, 가치 변환과 같은 개념들은 일반적으로 상징적인 영역에서 벌어지는 의미작용의 정치를 이야기하는 이론들 – 스튜어트 홀(Hall, 1986/2015)의 절합(articulation), 라클라우와 무페(Laclau, 1996; Laclau & Mouffe, 2001/2012)의 등가 사슬(equivalence chain)과 헤게모니적 관계(hegemonic relationship) - 을 떠올리게 했다.


“도시의 정치적 담론을 끊임없이 웅얼거리며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이는 “지역적 사건과 전 지구적 사건의 캐스케이드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내는 상호작용의 산물”로서 “감정의 지역적 구조들을 생산”한다(265). 아파두라이는 “인종 전쟁에 존재하는 최악의 폭력은 일상적이며 개인적인 관계들과, 현대 국민국가에 의해서 생겨났고 광범위한 이산에 의해서 더욱 복잡하게 된 거대한 규모의 정체성들 사이의 왜곡된 관계들 때문”이라는 가설을 제기한다(266). 또한 아파두라이는 사람들의 분노와 폭력을 “국가나 여론조사, 언론, 다른 큰 규모의 폭력들에 의해서 규정되는 집단 정체성”(267)과 관련하여 야기되는 “배신감과 친밀성, 정체성과 관련시켜 설명”하려고 시도한다(269). 아파두라이는 이어서 “정체성을 재현하는 것은 이민자와 대중 매체의 세계에서 보다 더 용이”함을 언급하는데, 미주(355쪽)를 통해 이러한 시각이 “국가 중심의 관점에서 현대의 인종 폭력을 보고 있는 관점들과는 엄격하게 분리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각주3) 부르디외의 상징 폭력(symbolic violence)에 관한 설명을 함께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다. 부르디외(Bourdieu, 2014)에 따르면, “국가는 사회세계에 있는 여러 관점들 중의 하나의 관점을 강화한다. 이 관점은 관점들에 대한 관점(the viewpoint on viewpoint)이며, 관점들의 기학학적 중심이다. 따라서 올바른 관점(the right point of view)이다. 이것은 신성화 효과(divinization)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 관점을 관점이 아니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당신이 사회적 공간 안에 있는 한, 당신은 관점을 갖게 되고, 이 관점은 상대적이다. 탈특수화(de-particularization) 효과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국가’라고 부르는 일련의 제도들은 공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을 무대화해야 하고, 공적 진리들에 대한 경의의 스펙터클을 상연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국가의 가장 일반적인 기능은 사회적 분류 체계(social classifications)를 생산하고 정전화하는 것”이다.


7장의 결론부에서 아파두라이는 문화주의적인 현대의 민족 운동이 “국민국가(nation-state)의 위기와 연결”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272). 현대의 민족성은 “공간적 넓이와 수적 강세 측면에서 전통적인 인류학에서 말하는 민족 집단들보다 훨씬 더 큰 집단들을 포괄”하고 있으며, “현존하는 국가 구조들에 대해, 그리고 민족 집단을 대규모로 구획하려는 여타의 방식들에 대해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는데(241), 국민국가들은 여전히 “민족의 자치란 일종의 천부적인 관계들이라는 전통에 기반해야 한다는 오래된 생각의 한계 내에서 대응”하고 있으며, “현대 국민국가의 개별적인 프로젝트들은 집단적 관계들에 대한 육화된 경험들의 잠재적인 범위를 증가”시키며, “권리와 자격에 관련된 언어는 점점 보다 큰 규모의 정체성과 필연적으로 결합”하고 있는 상황이다(272).



8장. 애국심과 그 미래


8장에서 아파두라이는 민족(nation)을 넘어서는 ‘탈민족적 사회 형태들’에 관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아파두라이는 이미 “민족이라는 형식은 다양한 측면에서 공격받고 있다”는 전제(276)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민족과 국가를 연결시키는 하이픈에 내재하는 담론을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는데, - 아파두라이는 베네딕트 앤더슨(상상된 공동체), 발리바르(국민의 생산), 바바(담론으로서의 민족), 채터지(민족주의적 담론의 식민주의적 논리) 등을 언급한다. - 아파두라이가 보기에 “국가라는 병 속에 결코 완전히는 포획되지 않는 민족주의”는 “이제는 그 자체로 이산적”이다(279). 인쇄자본주의, 전자자본주의와 관련된 “현대적 국민국가는 본질적으로 문화적인 산물, 즉 집단적 상상력의 산물”이며(280), “소수 집단(혹은 타자)”들이 만들어내는 ‘민족성’도 “다수 집단”의 ‘민족주의’만큼이나 “인위적인 존재”(283)라고 보는 입장에서 아파두라이는 생물학주의를 복귀시키는 ‘부족의 수사’ - “피와 친족관계, 종족, 땅이 덜 상상적인 것이며, 집단적 이익이나 연대를 상상하는 것에 비해 더 자연스럽다고 가정”하는 것 - 전체와 급진적으로 단절해야 할 필요성을 상기시킨다(281).


각주4) 레이먼드 윌리엄스(Williams, 1974/1996)가 그의 저서 <텔레비전론>(Television: Technology and Cultural Form)에서 제시한 개념인 유동성의 사사화는 20세기 중반 “복잡하게 분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더욱 부각되는 공공성의 문제와, 거꾸로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사적 삶의 가치가 높아져 가는 이율배반적 상황에서, 유동적이면서도 가정 중심적인 생활방식에 텔레비전이 기여하는” 상황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임종수, 2015, 24쪽). 샤언 무어스(Moores, 2000/2008)는 윌리엄스의 유동성의 사사화 개념이 “근대 가정의 외부 지향적 성격을 예리하게 강조했다”고 평가한다. 가정이라는 사적인 공간은 텔레비전과 같은 미디어를 통해서 공적인 영역과 연결된다. 따라서 방송은 “가정과 가정이 속한 상징적 공동체 사이의 관계를 매개”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텔레비전의 전자적 영토는 전통적으로 국가의 영역과 일치”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아파두라이도 초국가/탈국가의 맥락에서도 여전히 국민국가의 영향력이 발휘되는 현상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텔레비전은 여전히 전지구적인 담론, 국가적인 담론, 지역적인 담론, 방송제작자의 담론, 문화매개자의 담론, 수용자의 담론 등을 모두 함께 매개하고 있다. 조슈아 메이로위츠(Meyrowitz, 1989)는 ‘텔레비전의 지역성’에 대하여 논박하는데 그는 텔레비전이 ‘구체적인 장소들’을 보여주지만 결론적으로는 ‘일반화된 다른 장소(generalized elsewhere)’에 대한 느낌을 확장해 지역적 커뮤니케이션이 중앙 집중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아파두라이는 탈민족, 탈영토적인 형성물들이 이미 존재하고,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인 것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예컨대, 그는 민족성/정체성과 관계된 것으로 보이는 ‘폭력’에서도 “국민국가가 결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게임의 유일한 대상이 아니”며, 이러한 폭력은 “탈영토적 연대 원리를 탐색하는 일에 수반되는 불안감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287), “영토에 기반한 민족주의는 이러한 운동들의 알리바이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기본 동기나 최종 목표는 아니”라고 단언한다(288). 아파두라이에 따르면 “많은 반국가 운동들이 고향과 흙, 장소라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이것은 “영토적 민족주의가 가진 헤게모니”가 아닌, “정치적 언어의 빈곤함을 반영”하는 것이다(289). 그에 따르면, 이미 “탈영토화한 많은 집단들이 여전히 국민국가라는 이미지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대안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해방과 정체성을 향한 많은 운동들은 현존하는 국민국가에 대한 투쟁 과정에서 그들이 벗어나고자 그토록 애쓴 바로 그 국민국가의 이미지를 재현”한다는 점에서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의 원인”이 된다(289).


세계가 단일화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동시에 다중심화(네트워크)”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는 이중성을 강조(290)하는 아파두라이는, 난민 문제나 다국적 기업 모델 등의 내부에서 이미 ‘탈민족적 질서’와 ‘국민국가’가 충돌하고 있음을 언급한다(291-292). 아파두라이는 ‘비정부 기구’와 ‘전투적 복음주의’와 같은 ‘새로운 조직의 형식’을 논의하며(292-293) 탈민족적 질서를 승인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다가도 국민국가의 여전한 영향력에 다시 방점을 찍으면서 균형을 잡는다. 아파두라이에게 탈민족적(postnational)이라는 개념은 몇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어떤 의미도 “영토에 기반한 고전적 형식으로서의 국민국가가 이제는 파산 상태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294)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아파두라이는 미국의 상황과 현실에 개입하는 논의를 전개하는데, 그는 인종 정치학의 그물이 광범위하게 펼쳐지고 있는 미국을 “탈민족적 세계 질서가 등장하고 있다는 주장을 허위로 만드는 현존하는 예”로서 묘사한다(295). 미국은 “새로운 세계 질서를 지배하며, 해마다 수천의 이민자들을 끌어들이고, 영토를 기반으로 한 국민국가가 승리한 예”처럼 보이는 국가인 것이다(295).


그러나 아파두라이가 보기에 미국에서 ‘부족의 수사’의 작동은 여전히 문제적인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인종으로 여겨지고, 생물학적인 존재가 되며, 소수자 취급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부족적 수사는 “미국의 신체정치에 동화되어 온 타자들에 대해 널리 퍼져 있는 인종주의를 숨기기도 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297) 부족의 수사는 “미국의 시민사회가 평화로운 다문화주의와 관련해서 특별한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환상을 조장”하지만(298), “다양성이야말로 미국적인 정신의 진수라는 생각과 다양성을 통합하며 뛰어넘는 미국다움이 있다는 생각을 다 함께 수용”하는 미국은 여전히 “이산적인 다양성의 도전이 이제는 전 지구적인 것이 되었으며 미국식의 해결을 고립된 상태에서는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고집스러울 정도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299).


아파두라이는 “미국이 이민자의 나라가 된다는 것과 이산적인 것들이 구성한 탈민족적 네트워크의 새로운 결절점이 된다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을 강조한다(299). 그는 “모자이크, 무지개, 퀼트 등과 같은, 다양함 속의 복잡함이라는 수사”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302). “자신의 영토 내부에서 국민국가의 정당성이 점차 위협받게 되는 바로 그 시점에 민족 개념은 민족들을 횡단하여 번성하고” 있는데, “이산적인 공동체는 모국의 약탈에 영향받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태어난 모국에 두 배로 헌신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미국에 대한 그들의 충실성은 양가적인 것이 된다.”(300) 지역성이 제거된 초국가(transnation)는 언제나 “소문으로만 알고 있는 고향과 특수한 이데올로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이산적 다양성은 비영토적 초국가에 우선 충성”하는 성질을 갖는다(301).


“계몽의 보편주의와 이산의 복수성을 결합시켜야 한다는 새로운 도전” 앞에서 미국은 “다원주의를 핵심적인 원리로 삼는 현대적 정치 이념에 입각하여 사회를 조직한 유일한 국가”라는 특수성을 갖는다(302). 따라서 아파두라이는 “새로운 탈민족적 질서에는 ‘문화적 실험실’으로서 미국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존재할 것”이라고 본다(303). 아마도 아파두라이는 8장을 마무리하는 부분에서 ‘의도적으로’ 낙관적인 서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미국이 혹은 세계가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분석이라기 보다는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는 당위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아파두라이는 애국심의 위기를 상연하는 ‘초국가’라는 조건 자체의 많은 부분들에서 이미 ‘탈국가적 이미저리의 요소들’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며, “초국가적 사회 형식은 탈민족적 갈망뿐만 안이라 실제로 존재하는 탈민족적 운동과 조직, 공간을 창출해낼 것”(308)이라고 낙관한다.)


미국은 “탈민족적 세계의 문화 정치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이는 국내적으로 “정부의 보호와 보장 하에서 문화적인 차이를 추구할 권리의 정당성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근본적으로 포드주의적이며 제조업 중심이었던 미국 경제로부터 고통스럽게 결별”하고, “새로운 시도들의 수입과 판타지 생산, 정체성의 직조, 스타일의 수출, 다원주의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 등을 우리 생계의 일부로 감싸안는 것”을 의미한다고 아파두라이는 이야기한다(306). 이어서 지금은 “국민과 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하이픈으로만 향해 있는 ‘단일한 애국심’에 대하여 재고해야 할 시간”이며, “우리가 그것을 위해서 살고자 하고 때로는 기꺼이 죽을 수도 있는 새로운 관념들을 정의해야 할 시간”이라고 주장한다(307). 이러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애국심’ 혹은 ‘애국심의 미래’는 “정당이나 정부, 국가와는 완전히 결별한 애국심”으로(307), “국경선이 그어진 영토는 이산적인 네트워크에, 민족은 초국가에게 자리를 양보할 것이며, 애국심 그 자체는 다원적이고 계열적, 문맥적이며 유동적인 것”이 될 것 혹은 되어야 할 것이다(308).



논의거리


아파두라이의 국민국가에 대한 입장은 내가 해석하기에는, 국민국가는 여전히 영향력이 강하게 존재하지만 그것은 종국적으로는 초국가/탈민족/탈국가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일종의 당위적 주장이 담겨 있는 것처럼 읽혔다. 그러나 이렇게 국민국가를 과거의 자리에 두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버틀러와 스피박의 대담을 기록한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Butler & Spivak, 2007/2008)에서 민족국가에 대한 두 사람의 입장은 아파두라이와는 조금 다른 듯하다. 버틀러는 2006년 캘리포니아에서 일어났던 ‘불법 거주자들의 대규모 거리 시위’에서 거리에 모인 사람들이 자신들의 모국어(스페인어)로 미국의 국가를 부른 행위를 ‘수행적 모순’이라는 언어로 해석하면서, 이들이 노래하는 ‘국가’를 부정하지 않는다. 아파두라이는 미국이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우를 이야기하는 데 비해 스피박은 제3세계를 바탕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준거가 다르기는 하지만, 스피박은 ‘비판적 지역주의(critical regionalism)’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제3세계에서는 ‘국가를 일종의 추상적인 구조체로서 재발명하려는 프로젝트’가 중요한 탈식민 전략이 될 수 있음을 논의한다. 비판적 지역주의는 스피박이 제시하는 전략적 본질주의(strategic essentialism) 개념 만큼이나 모호한 개념이지만, 어쨌든 국민국가(민족국가)의 미래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이고 다른 현실(들)을 바탕으로 사고해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니는 것 같다.




참고문헌


Appadurai, A. (1996). MODERNITY AT LARGE: Cultural Dimensions of Globalization. 차원현, 채호석, 배개화 옮김 (2004). <고삐 풀린 현대성>. 서울: 현실문화연구.

Bourdieu, P. (2014). On the state: Lectures at the Collège de France, 1989-1992. P. Champagne, R. Lenoir, F. Poupeau, & M. C. Rivière (Eds.). London: Polity.

Butler, J. & Spivak, G. C. (2007). Who Sings the Nation-State? 주해연 옮김 (2008).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서울: 웅진씽크빅.

Hall, S. (1986). On Postmodernism and Articulation: An Interview with Stuart Hall. 임영호 (역) (2015). 포스트모더니즘과 접합: 스튜어트 홀과의 대담. In <문화, 이데올로기, 정체성: 스튜어트 홀 선집>(159-194쪽). 서울: 컬처룩.

Laclau, E. (1996). Emancipation(s). London: Verso.

Laclau, E. & Mouffe. C. (2001). 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 Towards a radical democratic politics. 이승원 (역) (2012).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급진 민주주의 정치를 향하여>. 서울: 후마니타스.

Meyrowitz, J. (1989). The Generalized Elsewhere. Review and Criticism, 326-334.

Moores, S. (2000). 텔레비전, 지리학, 그리고 유동성의 사사화. In 임종수, 김영한 (역) (2008). <미디어와 일상> (129-142쪽).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Smelser, N. J. (1962). Theory of Collective Behavior. London: Routledge.

Williams, Raymond (1974). Television: Technology and cultural form. London: Fontana. 박효숙 옮김 (1996). <텔레비전론>. 서울: 현대문학사.

임종수 (2015). 디지털TV의 양식성 – 형식, 존재, 수용. <커뮤니케이션 이론>, 제11권 2호, 18-55.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큰 그림에 놓고 보는 사회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