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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은 행위자성을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문화인류학이론 기말페이퍼 일부

by 페르마타

인류학 수업에서는 텍스트들이 사회의 변동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부분과 구조와 행위자성의 관계에서 행위자성을 강조하는 식의 기술지를 써내려가고 있는 지점들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류학에서 다루어지는 주된 테마 중의 하나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텍스트들을 읽으면서 꾸준하게 내가 생각했던 것은 어찌됐든 그러한 부분들이었고, 인류학자들이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어떠한 전략들이나 위치를 취하고 있는지가 눈에 많이 들어왔던 것 같다. 우선 초반에 읽었던 말리노브스키의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이나 루스 베네딕트의 <문화의 패턴>에서는 상대적으로 ‘사회의 변화’를 설명하는 부분이 약하다고 느꼈다. 말리노브스키가 묘사하고 있는 트로브리안드 제도의 경우도 그렇고, 베네딕트가 비교하고 있는 네 가지의 사회도 그렇고 그들이 제시하고 있는 사회와 사회 사이에서는 비교가 가능할 만큼 충분히 다른 특성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각각의 사회는 마치 그러한 사회에 지금 진입하더라도 두 사람이 묘사했던 당시의 모습을 취하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으로 텍스트 안에서 그려지고 있다. 이것을 기능주의(functionalism)적인 인류학의 한계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에게 그들이 연구한 원시부족의 사회는 현대 사회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그 구성이나 운영 원리가 매우 단순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내적으로 통합적인 사회로 여겨지는 것 같다. 그들의 민족지에서는 이러한 사회가 어떻게 지금의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실마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 원시 사회의 변화는 원시 사회의 내적인 동력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외부 사회의 침략에 의해서 설명되기가 쉬운 상태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에 비해 에드먼드 리치가 <버마 고산지대의 정치 체계>에서 묘사하고 있는 카친 족의 사회는 상당히 내적으로 역동적인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으로 여겨져 인상적이었다. 리치는 레비스트로스가 “인간의 마음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사실을 확립하는 것(즉 ‘자연스러운 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지점에서 그 자신이 세웠던 “인간을 동물 상태의 인간과 구별 짓는 것은 곧 문화와 자연을 구별하는 것이라는 가정”과 역설을 일으킨다고 비판한다(Leach, 1970/1998, 170쪽). 더불어 그는 기존의 민족지들이 사회 내부의 ‘평형 모델’에 근거하여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원시 부족사회를 묘사했던 데 반대하면서 “현실 상황은 대부분 불일치와 모순으로 가득하고, 이 불일치와 모순이 사회변동 과정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고 보았다(Leach, 1964/2016, 42-43쪽). 굼사와 굼라오라는 ‘이념형적 모델’을 설정해 놓고, 카친 사회가 그 사이를 진동(oscillation)한다고 본 것으로 만도 리치는 인류학에서 사회의 변동을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어느 정도 제공하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진동이 발생하는 원인을 ‘권력’에 관한 인간 행위자들의 욕망에서 찾고 있다는 점은 구조의 변동을 촉발하는 일종의 행위자성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느꼈다. 다만 구조가 일정한 한계 내에서 진동한다고 봄으로써 행위자들이 아예 새로운 사회 형식으로 나아가기 위한 실천을 할 가능성을 어느 정도 배제한 채로 설명하고 있고, 실제로 그러한 사회 변동이 어떠한 시기에는 일어난다는 것을 리치도 인지하고 있지만 그의 모델 하에서는 조금 더 총체적인 사회 변동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클리포드 기어츠는 <문화의 해석>에서 인류학적으로 사회 변동을 설명할 수 있는 흥미로운 이론적 틀을 제공하고 있다. 그는 사회에 대한 기능적인 접근이 가장 취약한 영역을 ‘사회변동의 문제’로 꼽으며(Geertz, 1973/1998, 176쪽),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인간 생활의 문화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을 분석상 구분하고 독립변수이기는 하지만 상호 종속적이기도 한 요인으로 양자를 취급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같은 책, 177쪽). 여기에서 기어츠는 문화와 사회를 완전하게 분리할 수 있다고 보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분석상의 차원에서 문화를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고, 행동의 지침으로 삼기 위한 의미의 틀”로, 사회구조를 “행위의 형태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관계의 네트워크”라고 정의하고 있다(같은 책, 178쪽).


여기에서 기어츠가 명시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내가 볼 때는 기어츠가 아마도 상대적으로 조금 더 간주관성의 영역일 사회에 비해서 ‘의미, 상징’으로 보고 있는 문화의 영역이 상대적으로 주관성이 강한 영역이며 따라서 행위자성이 발현되기에 조금 더 쉬운 영역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보게 되었다. 이러한 식으로 해석하였을 때 우리는 하나의 공유된 사회구조 내에서도 다양한 복수의 문화의 형식들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문화의 영역에서의 갈등과 투쟁이 사회구조의 변동에 영향을 끼쳐 나가는 측면들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식의 설명은 세대사회학에 있어서 하나의 세대(더 정확하게는 연령/출생코호트) 내에서도 다양한 분파들(세대단위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카를 만하임의 설명과도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며(Mannheim, 1929/2013), 라클라우와 무페나 스튜어트 홀과 같은 내가 주로 참조하는 저자들의 담론 정치나 절합(articulation)에 관한 논의와도 ‘의미의 정치’를 통한 사회 변동의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연결된다. 또한, 기어츠가 기존의 기능적 접근을 비판하면서 “사회적 평형 혹은 시간을 초월한 것으로 구조를 묘사하는 것 등에 대한 강조”가 “안정된 균형 상태에 있는 ‘잘 통합된’ 사회를 선호하게 한다”는 비판을 하는 부분은(Geertz, 1973/1998, 176쪽), 앞서 이야기했던 문제의식 – 청년에 대한 연구가 결국에는 기존의 질서를 승인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 과도 이어지는 지점이 있다. 객관적임을 스스로 강조하고 있는 연구들이 오히려 보수적인 학문으로 귀결되어버릴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아르준 아파두라이의 <고삐 풀린 현대성>은 저자 자체가 인류학자이지만 문화연구나 지역학과 같은 다른 분야에서도 많이 인용되는 저자인 만큼, 또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학문들이 탈분과적 성격을 보이는 것과도 관련되는 점을 보았을 때, 사실 하고 있는 논의들이 내가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는 문화연구 분과의 논의와도 크게 다른 논의는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아파두라이가 묘사하고 있는 역사의 변동은 근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비결정성을 전제한다. 그는 탈민족적 질서가 도래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국가의 영향력이 사라지지 않았으며 탈민족적 질서와 국민국가 사이에서 현대적인 민족성(ethnicity)의 폭력성이 내파하고 있다는 것을 사실으로서 분석한다.


그러나 동시에 어떠한 미래가 펼쳐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약간은 의도적으로 보이는 낙관을 드러내는데, 그는 “초국가적 사회 형식은 탈민족적 갈망뿐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탈민족적 운동과 조직, 공간을 창출해 낼 것”이라고 예측한다(Appadurai, 1996/2004, 308쪽). 어쩌면 ‘과학적’인 분석과 그것을 통해 도출한 일종의 사회에 대한 객관적 모형을 바탕으로 미래를 유토피아적으로 혹은 디스토피아적으로 예측(predict)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의지적인 서술을 하는 아파두라이는 내게는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는 말을 했던 안토니오 그람시를 떠올리게도 하면서 이러한 서술의 방식이 어쩌면 인간의 행위자성을 가장 급진적으로 고려하는 방법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했다.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힘은 사회의 특정한 조건이 아니라, 그 사회의 조건을 분석하고 이해하여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인간의 힘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자성의 관점 취하기는 아파두라이가 인도에 관해서 탈식민적 논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아마도 청년들을 비주체가 아니라 주체로서 다시 읽어내는 과정에서도 결국 중요한 것은, 역사를 만들어온 것은 자본이기도 국가이기도 하지만, 또 기성세대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청년 행위자들의 몫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것을 망각하지 않고 되살려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참고문헌


Appadurai, A. (1996). MODERNITY AT LARGE: Cultural Dimensions of Globalization. 차원현, 채호석, 배개화 옮김 (2004). <고삐 풀린 현대성>. 서울: 현실문화연구.

Geertz, C. (1973).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s. 문옥표 옮김 (1998). <문화의 해석>. 서울: 까치글방.

Leach, E. (1964). Political Systems of Highland Burma: a Study of Kachin Social Structure. 강대훈 옮김 (2016). <버마 고산지대의 정치 체계: 카친 족의 사회구조 연구>. 서울: 황소걸음.

Leach, E. (1970). Lévi-Strauss. 이종인 옮김 (1998). <레비스트로스>. 서울: 시공사.

Mannheim, K. (1929). Das Problem der Generationen. 이남석 역 (2013). <세대 문제>. 서울: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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