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모란(Joe Moran)의 <학제적 학문 연구>를 읽고
독서를 마치고 난 뒤 이 책을 문화연구라는 분과학문의 새로운 입문서/개론서로 사용하는 것의 장점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되었다. 기존에 주로 읽혀 왔던 책들 - 존 스토리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요시미 순야의 <문화연구>, 정재철이 편역한 <문화연구이론> 등 - 에 비해 <학제적 학문 연구>는 1) 문화연구 입문서들이 주로 이 책의 2장에 해당하는 내용을 전체 책 분량에 걸쳐 설명하는 것과 비교해 다루고 있는 범위가 포괄적이며, 2) 문화연구라는 어떤 학문적 조류나 경향 혹은 분과를 가리키는 언표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모호성에 대하여 분명하게 지시하고 있다.
책의 표제도 간명하게 ‘간학제성(interdisciplinarity)’이고, 분명하게 문화연구라는 명사를 사용하고 있는 지면도 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내가 일종의 문화연구 입문서로 전용하여 독서하는 이유는 내가 문화연구를 주요한 정체성의 자원으로 삼는 학문 분과 체제에서 다년간 훈련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 책에 등장하는 거의 대다수의 논의들을 수업과 세미나, 학회 등 곳곳에서 직간접적으로 접해 왔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저자는 문화연구와 언어학, 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 정신분석, 페미니즘, 퀴어 이론, 새로운 역사학, 지식/권력론, 경험주의 비판, 문화지리학 등을 별도의 흐름으로 배치하고 있으나 실제로 이와 같은 다양한 조류들은 문화연구라는 분과 내에서 활발하게 결합되고 있다. 나 역시 한 사람의 문화연구자 혹은 문화연구 대학원생으로써 전통적으로는 문화연구자로 분류되지 않을만한 학자들의 논의들을 빌려와 나의 문화연구 혹은 분과학문으로서의 문화연구를 풍부하게 하는 데 사용해 왔다.
이러한 간학제성이 발현되는 공간은 문화연구 분과뿐만이 아니다. 여성학, 비교문학, 지역학, 비주얼 컬처, 스튜디오 아트 등 수많은 간학제적 분과학문들 내부에서, 그리고 영문학, 사회학, 인류학, 지리학 등 상대적으로 전통적이라고 볼 수 있는 분과학문들 내부에서도 다양한 분과에서 주로 생성된 이론적, 방법론적 자원들이 통합적으로 사용되는 모습들을 관찰할 수 있다. 발제자의 언급대로 시대적으로 유행하는 키워드인 융합과 통섭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은 경영학과 같은 주류 학문일지도 모른다. 책의 3장에서 언급되고 있듯 주로 메타적인 위치에서 분과학문을 비판하고 간학제성을 강조해온 ‘이론’들은 다시 각각의 분과학문의 내부로 끌려들어가 분과학문 내부의 다양성, 혁신, 경쟁과 같은 현상에 기능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간학제적 이론은 상위분과학문이면서 동시에 하위분과학문이기도 하다.)
저자는 분과학문에 대한 비판과 간학제성을 추구하는 시도들이 언제나 스스로를 분과학문화하고 기존의 분과학문들 위에 위치 지으려는 욕망과 분리될 수 없음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들의 결과물이 오늘날 전통적인 분과학문들 주위에 더불어 자리를 잡고 있는 간학제성을 주요한 정체성 중의 하나로 삼는 (상대적인 의미에서) 신생 분과학문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분과학문으로서의 문화연구 역시 이 범주에 낄 수 있다고 여겨지는데, 여기서 분과학문이 된 상태로 수십 년의 자기 역사를 만들어온 분과학문으로서의 문화연구와 간학제적 기획으로 등장한 영국의 문화연구(the Cultural Studies)를 구별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요컨대, 이 책의 2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문화연구는 (르페브르, 세르토, 부르디외 등이 왜 함께 쓰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영국 문화연구의 기획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많은 문화연구 입문서들이나 문화연구의 전통과 관련해 오늘날의 문화연구를 비판하는 기획들이 문화연구라는 단어로 지시하는 것 또한 영국 문화연구에 가깝다. 반면 문화연구 입문서를 읽고자 하는 사람들 혹은 문화연구자라는 정체성을 실제로 습득하는 사람들에게 문화연구는 분과학문(학과 혹은 학과 내의 세부전공)에 가까운 것이어서 의미의 불일치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불일치 상황에 대해서 문화연구가 그 기원에 있던 급진성/정치성을 상실했다는 류의 자기비판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나는 그러한 비판이 다소 허무하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영국 문화연구의 문제의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이미 우리가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이미 영국→미국→한국의 번역 과정을 거쳐 자리 잡은 한국의 문화연구 분과에게는 실질적으로 돌아갈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중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가 ‘학제적’이라는 용어를 “서로 다른 분과학문들 사이의 간극에 일종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30쪽)의 의미로 사용한다면, 이미 대중적인 것, 현대적인 것, 일상적인 것 등에 연구대상의 위치를 부여하는 것은 분과학문들의 사이공간에서 새롭게 창출되어야 하는 기획이 아니라 분과학문들 내부로 포섭되어 버린 어떤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즉, 과거의 학제적 기획으로서의 문화연구는 이미 그 소임을 다했다고도 볼 수 있다.
분과학문으로서의 문화연구가 그냥 이대로도 괜찮다고 보기도 어렵다. “문화연구 논문으로 볼 수 있는가, 없는가”의 기준으로 논문 심사가 진행되는 경우까지 보고된 바 있지만(정원옥, 2015, 85쪽), 문화연구 분과에서 공유하는 문화연구의 의미가 실질적으로 무엇인지에 관해서 진지하게 토론되는 경우는 많지 않고 오히려 앞서 언급했듯 영국 문화연구의 전통에 천착하거나 해외 문화연구의 흐름이라 여겨지는 무언가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을 받고는 한다. 그러나 문화연구가 무엇인지를 모호하게 남겨두면서 동시에 문화연구 분과에서 생산하는 연구물과 인접 학문 분과에서 생산하는 연구물들이 실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상황은 문화연구 분과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분과학문의 정치에서 불리한 것은 학문 장 내의 하위 장의 총 자본량이 가장 적은, 즉 역사가 길지 않은 쪽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대로라면 문화연구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그 누구보다도 생산적이 되려는 자기계발의 전략을 취해야 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장이론(field theory)의 관점에서 보자면 문화연구 분과가 취해야 할 전략은 학문 장 내에서 통용될 수 있는 특수한 상징자본을 구축해 나가는 것일 텐데, 나는 책에 인용된 할 포스터(Hal Foster)의 “학제적이고자 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분과학문적이어야 한다”(279쪽)는 언급이 단순히 제도화와 분과학문화 자체를 지지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무엇이라는 측면에서 문화연구의 분과학문화를 지지한다. (융합/혼합/혼종에 가까운 의미에서) 간학제성 그 자체나 정치적 급진성에 분과학문의 정체성을 두는 것은 실질적으로 다른 학문과의 차이화 전략으로서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하거나 딜레탕티즘에 빠져버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고, 연구대상(예컨대 노동자 계급연구)으로 분과학문을 한정지으려는 시도는 다소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여겨진다. 문화연구라는 분과학문이 매 시기마다 열어내어야 할 사이 공간, 간학제성의 자리에 기존의 지식 담론 체계에 균열을 내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련의 실천, 즉 과학적/학문적 급진성을 둔다면 어떨까?
여기서 ‘과학적 급진성’이라 표현한 것은 구체적으로는 간학제성의 의미를 단순히 두 개 이상의 분과학문적인 전통이나 연구방식을 물리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을 넘어서서, 오히려 모든 분과학문들의 접근방식을 상대화하면서 학술 담론에서 ‘말해지지 않는 것’을 탐구하려고 하는 일종의 ‘태도’를 의미한다. (“‘지식으로서의 문화연구’와 ‘태도로서의 문화연구’를 구분할 수 있으며, ‘지식으로서의 문화연구’는, 설령 그 내용이 아무리 급진적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비판적’이지 않을 수 있다.” (이상길, 2015, 68쪽)) 적당한 결합이나 혼종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단적이고, 급진적인, 창의적(?)인 방식으로 과학성의 새로운 지평을 선취하고자 하는데 목적을 두는 태도. 이러한 태도는 특히 지식 생산을 ‘거인의 어깨 위에서’ 아주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거나, 누군가 만들어 놓은 이론을 경험적으로 시험(test)하는 데 만족하거나, 우리가 밝혀낼 수 있는 객관적 진리가 있고 그것의 탐구되지 않은 부분을 메워가는 식으로 과학의 임무를 설정하는 것과는 거리를 두고 ‘과학적 인식론’ 자체를 문제적인 토론 대상으로 보는 것과 관련된다.
과학적 급진성을 문화연구의 주요한 정체성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제안은 다소 몇 가지 면에서 어색하게 들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 분과학문(제도)으로서의 문화연구 진영에서 생산되고 있는 연구물들의 다수는 전통적인 경험주의/실증주의 과학관이나 ‘과학의 객관성 신화’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문화연구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서 규범화된 연구형식과 방법론(‘질방’)에 연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제기되기도 했다(이상길, 2010, 40쪽). 게다가 ‘문화연구’라는 분과학문의 이름은 다소 ‘문화’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분과라는 식으로 소박하게 정의되든, 영국의 대문자 문화연구 전통을 참조하든 간에 과학적 급진성과 필연적으로 맞닿지 않아도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개념으로서의 ‘문화’가 정치, 경제, 사회 등 다른 영역들에 포함되지 않는 잔여적인 것(the residual)으로 정의되거나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사실상 영국의 문화연구 전통이 대중적인 것, 현대적인 것, 일상적인 것과 같이 기존에는 학문적 탐구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들을 연구하는 맥락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문화연구라는 분과학문의 ‘간학제성’이라는 정체성을 맥락화할 수는 없는 것일까? 물론 이러한 기획이 반드시 문화연구라는 분과학문 아래에서 이루어질 필요는 없지만, 그럴 수 있는 가능성, 잠재성, 개연성 같은 부분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문화연구자’로 되어 가고 있는 나의 문화연구에 대한 편애 때문에 생겨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존의 분과학문 체계에서 생산되는 많은 지식들에 대해서 비판적 혹은 회의적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연구와의 만남을 통해 학문 장과 일종의 화해를 하게 되었던 나의 경험, 또 문화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나와 비슷한 경험이나 성격들(혹은 하비투스)을 통해 어느 정도는 근거가 있는 희망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Moran, J. (2002). Interdisciplinarity. 장경렬 (역) (2014). <학제적 학문 연구>.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이상길 (2010). 문화연구의 연구문화 - 언론학계에서의 제도화 효과에 대한 성찰. <민족문화연구>, 53, 1-63.
이상길 (2015). 탈식민 상황에서 ‘비판적 문화연구’를 가르치기: 부르디외 이론의 사례. <한국방송학보>, 29(5), 67-99.
정원옥 (2015). 학제간 연구를 통한 ‘문화연구자’ 양성 기획의 현주소. <문화과학>, 81, 75-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