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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마타 Sep 25. 2017

교양은 누구에게 효용인가?

<교양의 효용> 2부와 <구별짓기> 7장을 읽고

<교양의 효용> 2부를 읽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지레짐작했으나, 내게는 1부보다 2부가 오히려 읽기 편했고 더 인상적이었다. 지난주에 읽었던 1부가 다소 노동자계급의 ‘자생적인’ 문화가 ‘있다’는 사실만을 강조하면서 다소 비판적(critical)이지 않은 방식으로 그것을 찬양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면, 2부에서는 물론 호가트 자신도 마지막 챕터에서 스스로 언급하고 있듯이 엄밀하지 않고 다소 ‘인상비평’에 가까운 수준일지언정 동시대 문화나 노동운동 등에 대한 본인의 비평적인 생각들이 잘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러한 생각들은 오늘날 한국의 맥락에서도 어느 정도 유효하다고 여겨지면서도 동시에 잘 지적되지는 않는 부분들을 건드리고 있어서 생각해 볼 지점이 많았다.


대중문화에 대한 호가트의 비판 지점은 이것이 (호가트가 직접 이 단어를 쓰지는 않지만)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적인 문화를 부추기고 그러한 방식으로 잡지나 소설, 대중음악을 비롯한 문화 소비재와 저널리즘은 물론이고 심지어 인문학과 정치까지도 바꾸어 놓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호가트에 따르면 노동자계급은 물론 다수의 중산층들까지 취하게 된 “자신과 같은 보통 사람의 상식이 ‘먹물’들의 복잡하고 상세한 의견보다 더 낫다고 이야기”(262쪽)하는 이 태도는 최근 톰 니콜스(Tom Nichols)가 <전문지식의 죽음>(The Death of Expertise)이라는 책을 통해서 짚어낸 바 있는 현상과도 일맥상통한다. 1950년대 시기 대중문화가 하향 평준화되고 있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정말 그런가?’라고 딴죽을 걸고 싶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 “‘뻔뻔스럽고’ ‘명랑한’ 저널리즘”(293쪽), 즉 뉴스의 연성화 경향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담론적 무기로 ‘대중의 취향, 선호구조, 선택’ 따위를 이야기한다는 점, - 최근의 온라인 미디어, 페북 저널리즘, 리스티클, 카드뉴스 등이 생각난다. - “위대한 척하지 않고 보통 사람인 양 행세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는 “컬트적인 지지를 받는 지도자”들이 출현하는 “부적절한 정치적 민주주의”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지적(271쪽) - 이 부분을 읽으며 생각한 것은 두 사람이었는데 한 명은 김어준이었고, 다른 한 명은 이명박이었는데 그가 국밥을 참 맛있게 말아먹던 장면이 떠올랐다. - 등을 보면 호가트가 대중문화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보는 것을 단순히 정통을 고집하는 꼰대의 시선으로만 치부하기는 어려워진다.


다만 앞서 언급한대로 노동자계급 혹은 대중들이 향유하는 문화 생산물들을 단순 비교하여 과거의 것이 오늘날의 것보다 나은 면들이 있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서술은 텍스트 자체에 대한 분석만이 갖는 한계, 그리고 문화연구에서 맥락(context)과 국면(conjuncture)과 같은 층위를 강조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드러낸다고 여겨진다. 물론 호가트도 계속해서 ‘뉘앙스’ 따위를 강조하기는 하지만, 드러난 글로서만 판단하자면 호가트는 이미 새로운 문화생산물들이 갖는 의미를 정당하게 판단할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한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노동자들이 향유하는 음악의 가사가 갖는 의미가 ‘참아라’는 것에서 ‘꿈을 가져라’는 쪽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 이런 식의 분석 방식은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감정 구조’ 개념을 떠올리게도 한다. - 이것이 갖는 정치성에 대해서 어떻게 가사만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칼럼니스트 곽정은(2017)은 최근 자신의 연재글에서 보아가 걸스 온 탑(girls on top) - “모든 게 나에게 여자가 여자다운 것을 강요해” - 을 부르던 2005년과 트와이스가 “여자가 쉽게 맘을 주면 안 돼”라고 이야기하는 2017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라고 언급하면서 대중음악의 젠더 재현이 오히려 퇴보한 것이 아니냐고 지적하고 있는데, 사실 이런 ‘분석’은 트위터리안들도 100번은 넘게 했던 분석인 데다가 텍스트 자체를 가지고 매우 쉽게 할 수 있는 일반론에 가깝다. 텍스트와 텍스트의 뉘앙스 분석으로 예컨대, 소녀가 수줍게 ‘건강한 사랑’을 외치는 것 같은 뉘앙스를 주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같은 곡이 오늘날 투쟁의 현장에서 불리고 있다는 사실, 내가 이제 그 노래를 들으면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호가트가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전한’이나 ‘진정한’ 같은 한정어들은 도대체 실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 (모조 섹시함과 진짜 섹시함을 핀업 걸들에게서 구별할 수 있다는 식의 서술(344쪽)은 정말로 황당하였다.)


다만 호가트도 11장 결론에 가서는 노동자계급의 생래적인 ‘회복력’을 강조하면서, 젊은 세대의 노동자계급도 무언가 ‘새로운 도덕’을 만들어내면서 끊임없이 대중문화의 공습에 대한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첨언한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대중문화를 너무 관대한 시선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마치 엇갈리는 심사평을 잔뜩 받고 수정원고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누더기가 되어 버린 듯한 글이 출판되었는데, - 그러니까 도대체 호가트가 무엇을 주장하고 싶은지, 끝에 가서는 도대체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린다! - 아마 그러한 ‘흔들리는’ 입장이 호가트 본인의 가장 정확한 입장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다소 너무 방어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대중문화는 비판해야겠지만, 노동자계급을 긍정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지켜야겠고, 그런데 이 두 가지 입장을 함께 가져가다보면 대중문화가 어떻게 하든 노동자계급이 어쨌든 회복해 낼 것인데 무슨 문제란 말인가? 라는 생각을 독자가 하게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적당한 근거가 될 만한 분석들을 하지 않고 비평적인 글쓰기를 했을 때 갖게 되는 필연적인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가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궁예질’해 본다면, 나는 그것이 제목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호가트는 결론에서 “문맹률이 낮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과거와는 다른 문맹 측정 방법이 필요”(509쪽)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 한국에서도 몇몇 논자들이 ‘실질적 문맹률’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고, 새로운 미디어들이 나왔을 때 이것에 대한 ‘리터러시 교육’이 필요하다는 담론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호가트가 이 책의 이전과 이후 대중교육과 관련된 행보를 보였다는 사실을 몰랐더라도, 결국 결론에서 ‘진지한 소수’에 대해 반복적으로 강조하며 교양 인문학 강좌 따위를 ‘진정한 교양’으로 설명하는 부분에서(480쪽) 나는 <교양의 효용>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결국 교양 혹은 실질적인 문해율(리터러시)에는 효용이 있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진지한 소수가 이것을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읽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노동운동에 대해 간략히 논의하는 부분에서 노동운동이 물질적 조건들의 개선을 중시하면서 실질적으로 그것을 이루어낸 것은 맞지만 “노동자계급이 물질중심주의 그 자체를 자신들의 사회철학으로 여기게” 함으로써 문제가 생겨났다고 비판하면서, 호가트는 “만일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이들 소수가 계속 당면한 정치경제적 목표만을 추구하게 된다면 그들이 이뤄온 성과들이 자신들의 등 뒤에서 문화적으로 팔려나가버리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 부분(484쪽)에서도 교양, 혹은 문화적인 접근의 (노동운동에 있어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호가트에게 교양의 효용은 노동자계급의 것으로 전유될 수 있는 어떤 것인 반면, 이러한 교양의 효용은 부르디외에게 있어서는 전적으로 지배계급의 효용으로 환원되어 버리는 어떤 것이다. 이것은 필요로부터의 거리를 바탕으로 생성되는 계급에 따라 다른 하비투스(habitus), 혹은 지각과 평가의 도식은 주관적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객관적인 것이라는 사실, 그러나 주관적인 것으로 위장된 취향과 행동 양식의 차이가 학교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기관에 의해서 위계적으로 판정되는 상징 폭력(symbolic violence)의 체계에 이미 기입되어 있다는 사실 - “학교시장의 인증행위로 사전에 정통화되는 직업상의 지위와 수입이라는 사회적 가치의 기호”(699쪽) - 로부터 비롯된다. 따라서 학교에서 배우게 되는 소위 ‘교양’은 물론이고 ‘여성적’인 대중문화에 배태되어 있는 상징적 폭력의 성격은 계속해서 노동자계급이 지배계급의 지배적인 정의에 의해서만, 그리고 그것과의 거리에 의해서만 자신을 인식(혹은 오인)하도록 함으로써 사회적인 위계 구조를 계속해서 재생산하도록 한다. 그러한 이유로 “문화적 정통성에 대한 가장 전면적인 승인이 정치적 정통성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도전과 공존할 수 있”으며(715쪽), 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구별되는 문화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이들이 지배계급 혹은 계급체계에 대한 저항을 효과적으로 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불충분하다.


여담이지만 이러한 계급에 따른 하비투스 차이, 그리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어떠한 갈등이나 사건은 한국 드라마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최근 KBS2 주말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에는 ‘부잣집에서 잃어버려 가난하게 자란 딸’이라는 소재가 또 등장했고 드디어 부잣집에서 딸을 찾은 뒤로, 어머니(나영희 분)가 딸(신혜선 분)에게 3천만 원을 용돈으로 주면서 오늘 하루만에 그 돈을 다 쓰는 게 숙제라고 얘기하는 놀라운 장면이 나왔다고. (그 3천만원 나에게 주오...)


두 사람의 교양에 대한 생각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고, 그것은 두 사람의 ‘가치’에 대한 관점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영상학이론의 대표적인 종합시험 단골문제 중의 하나인 칸트 미학과 부르디외 미학을 비교하는 그 문제의 답안과 비슷한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어쨌든 호가트에게는 ‘좋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도덕적, 미학적인 관점에서 구별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고, 부르디외에게는 그것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기보다는 체계적으로 좋은 것 혹은 나쁜 것으로 구성된 것이지만 자연스러운 혹은 본질적으로 좋거나 나쁜 것으로 인지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이로 인해 부르디외의 문화 개념이 “단지 여러 계급이 참여하는 상징적 투쟁의 결과로 환원”되기 때문에 “비판을 정당화할 준거의 상실”로 이어졌다는 비판(김종엽, 2008, 346쪽)이 등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관점에 이르면 두 사람이 실질적으로 얼마나 입장 차가 있을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호가트는 특히 오늘날 대중문화가 계급의 구분을 흐릿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미심쩍은 시선을 던지면서, (마치 노동계급이란 없다는 것과 같은 인상을 남기는) ‘보통 사람’이라는 말에 문제를 제기한다. 게다가 노동자 계급 내의 “지적인 소수들”을 “열한 살 무렵 선별”해서 “다른 계급으로 소속이 옮겨”지도록 하는(503쪽) 방식의 교육 제도 또한 ‘노동자계급도 능력이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강화하지만, 동시에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줄 “비판적인 사고 능력을 갖춘 소수”가 노동자계급 내에 남아있지 않도록 함으로써 오히려 노동자계급을 궁지에 몰아넣게 되는 역효과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문제는 어떻게 ‘진지한 소수’에게 교양을 교육함으로써 개인적이지만은 않은 집단적인 효용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부르디외에게도 그럴 것이다. 결국 구조 자체를 파악하고 탈신비화함으로써 위계 자체를 바꿔내기 위해서는 내 무지를 인정하고 내가 이미 가진 것들을 게임에 투입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게임의 룰을 알아야 하고, 그 게임에서 통용될 수 있는 자본들을 충분히 갖추어야 다윗이 골리앗과 붙어볼만 하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는 단어를 오늘날 한국의 ‘서민’ 담론과도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서민’이라는 기표는 실제로는 서민이 아닌 사람들이 서민을 동원해 정치적인 우위를 점하기 위해 선거 국면에서 더더욱 강조되는, 더더욱 ‘어려운 사람들’로 의미화 되는 단어다. (cf. 남찬섭, 김수정, 송유진, 장세훈, 최영준, 2013; 이종명, 2017) 유사하게 문화인류학자 김현경(2017)은 ‘1 대 99 사회’라는 단어가 상위 10%와 하위 90%의 차이를 지워버림으로써 상위 10%의 이익이 여론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현실을 은폐하는 기제로 쓰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참고문헌

Hoggart, R. (1957). The Uses of Literacy. 이규탁 (역) (2016). <교양의 효용>. 파주: 오월의봄.

Bourdieu, P. (1979). Distinction. 최종철 (역) (2005). <구별짓기 下>. 서울: 새물결.     

곽정은 (2017, 9, 6). “성관계를 허락해서 그가 떠난 걸까요?” <한겨레21>.

김종엽 (2008). 문화 개념의 역사적 변동과 지형 : 문화 연구의 지향점 재검토를 위하여. <동향과 전망>, 72, 326-356.

김현경 (2017, 5, 10). 10%를 위한 사회. <한겨레>.

남찬섭, 김수정, 송유진, 장세훈, 최영준 (2013). 서민(庶民)의 집합적 의미의 시대적 변화에 관한 탐색적 고찰. <비판사회정책>, 39, 44-82.

이종명 (2017). 대통령 선거에서의 ‘서민’ 담론과 미디어의 담론 정치 : 제 16, 17, 18대 대통령 선거 보도를 중심으로. <한국소통학보>, 16(3), 119-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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