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가트(Richard Hoggart)의 <교양의 효용> 1부를 읽고
레이먼드 윌리엄스, E. P. 톰슨의 저서와 함께 문화주의(culturalism)로 묶이는 대표적인 저작, 리비스주의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리비스가 이상화된 과거로 설정했던 17세기를 1930년대로 바꾸어 놓았을 뿐 같은 형식의 리비스주의를 반복하는 데 그친 저작. <교양의 효용>을 읽어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이 정도의 '종합시험 모범답안' 형식으로 외워둘 수 있었던 것은, 존 스토리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과 아마도 관련된 '교과서'들의 영향을 받았을 요약 설명들을 여러 번 들었던 경험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방식으로 형성된 선입견은 이 책을 심리적으로 멀리 하게 되는 원인이 됐다. 어차피 당대(1950년대)의 대중문화에 대해서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한계가 있는, '스튜어트 홀 이후의 문화연구(the Cultural Studies)의 전사(prehistory) 정도에 그치는' 두꺼운 번역서(심지어, 2년 전만 해도 그냥 원서(!))에 굳이 손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읽어보니 생각보다 흥미롭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고, 읽었던 다른 논문/책이나 보아 왔던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쓰인 시기와 읽는 시기의 시차 탓인지 아무래도 다소 아쉬운 지점들도 눈에 들어왔다. 문화연구 내지는 민속학적 현장연구의 이론, 방법론, 태도 등과 관련해서 독서를 하면서 내가 고민하게 됐던 부분들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쪽글을 적고자 한다.
이 책은 영국의 ‘노동자계급’에 관한 연구서다. 따라서 어떠한 기준으로 노동자계급을 정의할 수 있는지가 문제가 되는데, 호가트의 접근이 흥미로운 것은 "소득만을 기준으로 노동자계급과 노동자계급이 아닌 직종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바탕으로(24쪽) 결국 ‘문화’의 문제를 그가 정의하는 노동자계급의 핵심 요소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계급에의 소속의식, 주거지, 주택유형, 소득, 교육수준, 직업, 말투, 의류,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삶을 인식할 수 있는 수천 가지의 일상생활 아이템”을 바탕으로 노동자계급은 “개략적으로”만 정의되고 있다(26쪽). 문화라는 요소는 소득이나 직업과 같은 다른 기준에 비해서 명확히 파악하기 힘든(slippery) 것이지만, 호가트의 서술을 읽으면서 알 수 있듯이 누군가가 왜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핍진한 설명을 제공해준다는 면에서 매력적이다.
다만 못내 이러한 정의의 불충분함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 것은 아마도 내가 영국의 역사/사회적 맥락에 대해서 무지한 독자이기 때문일 텐데,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기도 하지만 분명하게 차이가 나는 것으로 서술되고 있는 ‘중하층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는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 것인지, 또 정말로 책에 서술되어 있는 문화적인 특성들이 ‘노동자계급’을 변별할 수 있게 해주는 유별난 특성인지, 그렇다면 ‘노동자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당시 영국 인구에서 어느 정도나 되는 비율이었는지 등 궁금해지는 면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서 서술하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특성들 중 일부 - ‘그들’과 ‘우리’의 분리,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것에 대한 취향과 가십, 윤리적 진정성의 추구 등 - 는 오늘날 한국의 맥락에서 중산층의 문화를 떠오르게 했다. 만약 영국의 현재에도 그러한 문화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노동자계급’ 문화의 일부가 "사고방식의 변화는 언제나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느리게 진행"(14쪽)되기 때문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까, 혹은 호가트가 이미 1930년대에 존재하고 있었을지 모르는 대중문화를 ‘노동자계급’의 문화로 설명하는 일종의 범주 오류를 범했다고 볼 수 있는 여지는 없을까?
하필이면 다른 종류의 문화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문화를 다룬 것은, 추측컨대 호가트 역시도 공유하고 있었을 노동자계급에 대한 좌파적 관심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1장에서 호가트는 “‘노동자’와 ‘일반 대중’에 대해 논의하는 사람들의 낭만적인 태도”(15쪽)에 대해서 경계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1930년대 노동자 문화의 ‘건강한’ 성격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그의 서술에서 여전히 이들에 대한 낭만화 혹은 ‘나이브’한 태도 같은 것을 느꼈다. 텍스트에 드러난 노동자계급의 문화가 그다지 긍정적이고 ‘건강하게’ 묘사되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는데, 그것은 다소 ‘객관적’인 시점의 서술인 것으로만 느껴지는 호가트의 글에 독자인 (문화연구 전공 대학원생으로서의) 내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지식/관점들이 합쳐졌기 때문이지 호가트가 그러한 방식으로 분석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예컨대, 노동자계급이 지닌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고 ‘그들’을 배척하는 태도, “뭐 그 정도면 괜찮지”(132쪽)라는 말로 대표되는 그들의 보수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반지성적(anti-intellectual)인 것처럼 보이는 태도,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것에 대한 취향 같은 것들에 대해서 호가트가 취하는 입장은 이러한 문화의 특성을 설명하고 노동자계급의 특유한 ‘자생적인’ 문화가 존재한다는, 유지되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도에 그쳐 있다. (왜인지 이러한 노동자계급에 대한 재현은 작년 개봉했던 켄 로치(Ken Loach)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2016)>를 떠올리게 한다. 신자유주의 국가에서 삶이 어려워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료/이웃들과의 연대 그리고 자기 자신의 자존을 잃지 않는 노동계급 신사 댄(!).)
호가트가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이를테면 이들 계급의 문화적인 특질이 오히려 지배 체제와 계급 분리가 더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는지, - 예컨대 폴 윌리스(Wills, 1978/2004)는 <학교와 계급 재생산>에서 ‘저항’적으로 보이는 노동계급 청소년들의 문화가 어떻게 체제에 의해서 제약당하고 오히려 성차별주의와 같은 문화가 재생산하는데 기여하는지를 논의한다. - ‘그들’에 대한 반감이 어떻게 보수 이데올로기가 ‘하층 계급’에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침투의 지점이 될 수 있는지, - 최현숙(2016)이 수행한 70대 남성 노인들에 대한 구술사 자료는 호가트의 책과도 비교해 볼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여겨지는 흥미로운 자료다. “‘내가 많이 배웠다면 벌써 맞아 죽었을 거다’라는 대목에서 저항은 배운 사람들 몫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은 저항이나 사회 참여보다는 생존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과 자기 방어다.”(64-65쪽) 구술자 김용술은 온갖 장사를 통해 자산의 축적 없이 계속해서 벌이를 하고 버는 만큼 쓰면서 살아온 계급적으로는 하층 계급에 가깝지만 자신을 ‘보수’로 이해하고 있다. - 가정이라는 테두리 내로 침윤하는 것이 어떻게 저항의 가능성을 잠식할 수 있는지, - 호가트는 “집대문을 잠그고 나면 적어도 ‘나만의 개인적인 삶’ ‘나 스스로가 되는 삶’을 즐길 수 있다”(45쪽)는 점에서 가정생활을 강조하는 경향이 노동자계급에서 나타난다고 쓰고 있는데, 여기에서 최근 읽은 ‘중국적 통치성’에 관한 논문이 떠올랐다. 중국 도시의 국내이주 노동자들 역시 “부부간 특유의 친밀감이 표현되는 독립된 공간”에서의 생활을 ‘작은 행복’으로 추구했지만, 이는 결국 근본적인 저항보다는 자기규율적인 노동에 대한 태도를 통해 현 지배 상태의 유지에 기여하는 순응적인 주체성에 가 닿고 있었다. 1930년대 영국에는 노동자들의 공동체문화가 있었다는 점을 차이로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중국의 노동자들도 “다른 부부들과 함께 노래방이나 마을의 광장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기는 한다(김재석, 2016). - 교육이나 지식에 대한 불신과 적당한 생활과 적당한 윤리적 삶의 추구가 어떻게 이들의 계급 상향이동을 방해하는 문화적 기제로 작용하는지 - 이를테면, 최종렬(2017)은 ‘지방대생’이 서울/수도권의 명문대생들과는 다르게 ‘적당주의 집단 스타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험에 한계가 발생하게 되며 “집단 스타일이 다른 집단에 들어가 상호작용하는 체험을 넓혀야 한다”(288쪽)고 주장한다. ‘지방대생’ 대신에 ‘노동자계급’, ‘명문대생’ 대신에 ‘엘리트계급’을 넣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와 같은 것들이다. 이와 같이 노동자계급의 문화를 어떠한 구조적인 맥락에 넣어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기보다는 이들의 자생적인 문화의 서술에 집중하는 글쓰기는, 물론 이 문화기술지 자체가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됨에도 불구하고 호가트의 글에도 문화연구 전반에 대해 지적되곤 하는 대중주의(populism)의 혐의를 제기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한다.
<교양의 효용>이 흥미로운 또 다른 이유는 오늘날 학계에서 나오는 연구논문이나 연구서였다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연구방법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인데, 즉 호가트는 아무런 거짓말도 보태지 않고 자신이 “20여 년 전 내가 어린 시절에 겪은 기억에 의존”하여 책을 서술했음을 공개한다(28쪽). 특히 여기에서 아주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자신의 연구에 대한 최소한의 방법론적 성찰과 일반적으로 진행되어 왔던 노동자계급에 관한 연구가 갖는 방법론적인 문제들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사회학자들의 설문조사와 통계연구의 한계, - “맞는 부분도 있고 잘못된 부분도 있다”(19쪽) - 중산층 마르크스주의 연구자의 위치성 등에 대한 문제제기 - “자신들이 속한 계급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16쪽)하는 편향된 노동자계급 표집, “동정하면서 동시에 깔보는 경향”(19쪽) - 는 더 치고 나가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오늘날 연구의 관점에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노동자계급 출신의 저자”인 자신이 가진 당사자성도 “나름의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위험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언급한다(20쪽).
저자가 직접 사용하는 용어는 아니지만 이 책의 1부는 일종의 자문화기술지(autoethnography)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며 심지어 그때그때 만들어둔 필드노트에 바탕을 둔 기술이 아니라 기억에 의존한 기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학계에서 곧잘 적용하는 기준에 따른다면 방법론이 체계적이지 않기 때문에 비판받을 여지가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호가트 자신이 주장했던 것처럼 사회학자들의 통계적인 논의보다 어떤 면에서는 노동자계급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호가트의 기억과 글쓰기가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는 부분이 있으며(문학의 힘(?)),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적 경험에 바탕을 둔 1930년대의 서술이 나름의 학문적 연구에 바탕을 둔 2부의 1950년대 서술에 비해서 더 높게 평가받는 지점이 있다. 스토리(Storey, 1993/1999, 71-76쪽)는 1930년대의 ‘살아있는 문화’와 1950년대의 ‘문화적 쇠락’이라는 이분법이 나타나는 호가트의 서술이 “1930년대의 대중문화를 다루는 직관으로 1950년대의 대중문화를 다루지 못하는 무능함”을 드러내며 그가 “1930년대에 대해서는 정확히 보았으면서, 1950년대는 잘못 보았을 수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아마도 2부가 1부에 비해서 그렇게 별로인지, 또 리비스주의의 한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인지는, 아마도 다음 주에 더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to be continued...)
참고문헌
Hoggart, R. (1957). The Uses of Literacy. 이규탁 (역) (2016). <교양의 효용>. 파주: 오월의봄.
Storey, J. (1993). An Introductory Guide to Cultural Theory and Popular Culture. 박모 (역) (1999).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서울: 현실문화연구.
Wills, P. (1978). Learning to labour. 김찬호, 김영훈 (역) (2004). <학교와 계급 재생산: 반학교문화, 일상, 저항>. 서울: 이매진.
김재석 (2016). 중국적 통치성과 자기규율적 노동주체성의 형성 - 베이징 모범촌 거주 중국 여성 농민공들을 중심으로. <비교문화연구>, 22(1), 227-264.
최종렬 (2017). ‘복학왕’의 사회학: 지방대생의 이야기에 대한 서사분석. <한국사회학>, 51(1), 243-293.
최현숙 (2016). <할배의 탄생: 어르신과 꼰대 사이, 가난한 남성성의 시원을 찾아>. 서울: 이매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