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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마타 Jan 13. 2016

어떻게 '문화연구자'가 될 것인가?

문화연구자의 에토스에 대하여 - 대학원 신입생세미나 토론문

* 저는 문화연구를 전공하는 대학원생입니다. 문화연구를 공부하게 될 신입생을 독자로 가정하고 썼으나, 어쩌면 다른 학문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요. 사실 문화연구만 엄청 특별한 그런 게 아닌 것입니다.


Text

(1) 吉見俊哉(요시미 순야). (2000). カルチュラル・スタディ-ズ. 박광현 역 (2008). <문화연구>.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1장: 문화를 문제화하다.

(2) Storey, J. (1993). An introductory guide to cultural theory and popular culture. 박모 역. (1994).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서울: 현실문화연구. 8장: 대중성의 정치학.



신입생 분들에게는 다소 황당한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우리 전공 대학원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문화연구자’가 되었다.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프로필에 문화연구자라고 쓰기는 좀 민망하고 자신이 부족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학위논문을 향해 달려가는 와중에 쓰게 될 수많은 글들과, 수행하게 될 수많은 조사/연구(research) 과정에서 최소한 우리는 이미 문화연구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각자 A나 B나 C를 공부하고 싶어서 ‘영상커뮤니케이션(visual communication)’ 전공에 왔더니 신입생스터디 초장부터 ‘문화연구’를 얘기하고 있는 이 상황은, 우리 학과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문화연구라는 분야 내에서는 어느 정도 보편성을 가진 상황이기도 하다. 문화연구라는 단어를 듣지 못했거나, 최소한 나처럼 문화연구가 단순히 문화를 연구하는 행동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대문자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라는 비판적인 학문 기획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상태에서 대학원생이 된 많은 사람들이 문화연구 논문을 쓰고 졸업하는 형편이다(Cf. 김선기, 이상길, 2014).


어쩌면 아이러니라고 할 법한 이런 상황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는 별도의 문제로 두고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문화연구가 애초에 분과학문이라는 체제를 비판 및 거부하는 간학제적(interdisciplinary), 탈제도적 학문 기획임을 스스로 선언하면서 시작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화연구에 대해 설명하는 수많은 책들과 논문들은 대부분 문화연구의 특성으로 1) 비판적 학문 기획, 2) 현실 참여적, 실천적 학문 기획, 3) 간학제성 등을 들고 있는데, 이중에서 문화연구의 학제적인 성격은 대학원생의 입장에서는 특히 전공의 모호성의 차원에서 현실이 되기도 한다. 비판적이지 않은 학문이 있을까? 현실 참여적, 실천적 학문이 꼭 문화연구여야만 할까? 통섭과 융합의 시대에 간학제성은 모든 학문에 적용되는 상수 아닐까? 문화연구에서 문화를 삶의 총체로 정의한다고 보면, 모든 학문은 결국 문화를 연구하는 것 아닐까? 문화는 자꾸 빠져나가고, 미끄러지고, 레이먼드 윌리엄스도 문화를 하나로 정의하지 못해서 그것의 용법만을 늘어놓은 판에, 문화연구에서의 ‘문화’는 어떻게 한정적으로 정의하여 설명이 가능할까? 영상커뮤니케이션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문화연구라는 이름으로 설명하더라도 (“문화를 연구해” 까지만 이야기하고 황급히 화제를 돌리는 수준 이상으로, 혹은 스튜어트 홀까지 들먹이며 장광설을 풀어놓지 않고서) 자신의 전공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쉬운 과제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공의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문화연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문화연구자라는 사실을 입증해야만 하는 상황에 (가끔) 처하기도 한다. 예컨대, 중앙대 문화연구학과(협동과정)의 대학원생들은 논문 심사 과정에서 교수들에게 왜 이 논문이 영문학 논문이, 사회학 논문이, 언론학 논문이 아니라 ‘문화연구 논문’인지를 입증하라는 식의 요구를 받는다(정원옥, 2015). 우리가 읽은 두 텍스트가 문화연구에 대해서 실정적으로(positively) 정의를 내려서 우리가 문화연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또는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게, 다른 학문과의 정확한 차별성을 변별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같지는 않다. 혹은 어쩌면 그런 일은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두 텍스트에서 문화연구를 정의하기의 난감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문화연구자가 되어야 하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문화연구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문화연구자의 에토스(ethos)는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에 관한 힌트를 제공하고 있다고 느꼈다. 더 많은 목록들은 토론을 통해서 만들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이를 두 가지 정도만 정리하였다.


하나, 문화적 실천이 이루어지는 원리가 그러하듯이 더 좋은 문화연구를 위해서는 아마도 끊임없는 사유들 간의 접합/절합(articulation)을 연구자가 수행해야 할 것 같다. “차라리 문화연구의 비판적 다양성을 예찬하자”(Storey, 1993/1994, 287쪽)는 말과도 아마도 접점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에 대한 논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구조와 행위의 변증법에 대한 논의는 문화연구의 출현기에 문화주의와 구조주의 간의 대립으로 나타났고, 이와 같은 현상에 관해 아예 다른 부분을 취하려고 하는 관점의 대립쌍들을 문화연구를 공부하면서 숱하게 만나게 된다. 텍스트 안에서만도 문화주의-구조주의, 해석학-정치경제학, 문화연구-정치경제학, 보편적 미학-미학적 상대주의, 낭만적 예찬-이데올로기적 힘의 인식, 명목론-실재론, 객관주의-주관주의, 양방-질방과 같은 식으로 정리된 학자(혹은 선행 연구자)들의 대립 구도를 만날 수 있었고, 어느 한쪽이 승리함으로써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한쪽이 우세할 수 있어도, 다른 한쪽도 언제나 잔존하는 형태로 그 대립 구도들이 계승되고 있다. 문화연구는 어떤 연구대상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이론적, 방법론적 자원들과 연구대상 자료들을 정말로 그 어디에서라도 빌려올 수 있다. 또한 수많은 문화연구자들은 다양한 관점과 다양한 위치에서 각자의 문화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써 간 논문에 대한 토론은 많은 경우 이런 부분은 잘 보셨지만, 저런 부분을 더 보실 필요가 있다는 식으로 흘러가(서 심신이 힘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로, 이론/방법론적 측면에서 최대한의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고 그러한 유연성이 학문 공동체 내에서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진다는 사실 자체가 문화연구의 큰 강점/장점이기도 하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내가 관심있는 연구대상/주제에 대해 더 잘 이야기할 수 있는 재료가 어디에서 튀어나오게 될지 알 수 없다는 얘기도 된다. 영화를 연구하는 중에 읽은 정치경제학의 논의에서 힌트를 얻어 연구의 새로운 단계로 넘어갈 수도 있고, 청년세대 문제를 연구하는 중에 페미니즘의 지적 자원이 연구를 발전시키는 자극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사실 문화연구 학계 그리고 관련 학과 내의 구성원들이 이야기하는 문화연구가 제각기 다르고 또 아주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저것과 나는 상관없어 보이는 경우가 많지만, 그러한 선 긋기가 문화연구자에게는 위험한 태도 내지는 스스로에게 핸디캡을 갖게 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둘, 연구자로서 문화나 대중을 쉽게 지식화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텍스트에서 읽었던 것처럼 문화나 대중에 대한 지식은 현재와 다른 어떤 과거, 혹은 이상을 유토피아화하고 현재의 문화와 대중을 타자화시키는 방식으로 만들어져왔던 측면이 있다. 그리고 문화연구는 그러한 “낡고 새로운 확실성들에 도전”(Storey, 1993/1994, 288쪽)해 온 학문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과학 담론을 통해 문화와 대중을 대상으로 만들어 지배하려는 학자들의 행동은 문화연구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여전히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문화와 대중을 적절히 연구대상으로 대우하는 방법은, 그것의 불균질성, 모호성, 다면성, 중층성 같은 것들을 가능한 한 다각도에서 포착하려는 노력에 다름 아닐 것이다. 문제의식만 가득하고 제대로 연구하지 않은 게으른 문화연구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구자 스스로뿐만 아니라 모든 행위자들을 “문화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이들로 볼 필요”가 있으며, “왜곡에 대해 웃고 즐길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왜곡’이라고 말하는 정치적 입장을 지지할 수도 있다”는 사실(Storey, 1993/1994, 288쪽)에 대해서 잊지 않고 충분히 검토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선기, 이상길 (2014). 어떻게 ‘문화연구자’가 되는가? : 문화연구 전공 대학원생들의 정체화 과정에 대한 탐구. <언론과 사회>, 22(4), 95-156.

정원옥 (2015). 학제간 연구를 통한 `문화연구자` 양성 기획의 현주소. <문화과학>, 81, 7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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