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chnology and Everyday Life 2주차 리딩로그
나미수(2001) 선생님의 논문 초록을 읽다가 눈에 들어온 문장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 연구는 뉴테크놀로지의 도입이 전통적인 젠더이데올로기와 젠더관계와 같은 기존의 가족구조와 사회관계를 변화시키기보다는 강화시키고 있음을 논의함으로써 뉴테크놀로지의 보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연구자가 문장에서 오해를 살만한 요소들 하나 하나를 다 고려하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이것 자체가 연구자의 생각인 것인지 불명확하지만 어쨌든 ‘뉴테크놀로지의 보수성’이라고 명확하게 정의를 내려버리는 저 문장만 보고서는 본문에서 연구자가 그렇게 피하고자 했던 ‘기술결정론’의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구조와 행위 사이의 변증법을 제대로 서술하는 것은 사회과학의 오래된 난제이지만, 이는 미디어/기술에 관해서 무언가를 논의할 때 더 어려워지는 듯하다. 기술결정론을 피하기 위해서 기술의 사회적 구성을 강조하다 보면 ‘사회적 결정론’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생긴다. 기술(구조)과 사회(행위) 사이에서 균형을 잡다가 어느 지점에서는 분명히 멈춰서서 서술을 하게 될 터인데, 둘 중 어디로든 아예 쏠려 있지 않기는 힘들 것이다.
이것이 개인적인 감상이기는 하지만 Moores(2000/2008)의 글이나, 예전에 읽었던 요시미 순야의 <소리의 자본주의>에서는 그러한 결정론적인 ‘느낌’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던 것 같다. 차이를 생각해보자면, 일단 ‘현재진행형’의 기술변동과 사회변동이 아닌 이미 정리된 과거를 재구성했던 작업이라는 면이 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논의를 풍부하게 하는 데 다양한 자료들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도움이 되었을 테고, 게다가 나 같은 ‘젊은’ 독자에게는 특히 살아보지 못한 과거에 대한 서술을 읽으며 ‘진위 여부’를 비판적으로 따져 볼 수 있는 배경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단순하지 않은 서술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서술에 고려되고 있는 변수나 행위주체가 더 복잡하고 자세하고 치밀하게 그려져 있는 글에서 결정론적인 느낌을 덜 받게 되었던 것 같다. 나미수(2001)의 연구에서는 질적 연구방법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적인 사회질서와 홈컴퓨터 이용의 성차 사이에 단선적인 인과관계(여기에서는 사회적 결정론의 느낌)가 그려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경제권과 홈컴퓨터 이용의 성차를 엮어서 해외 사례와 한국 사례를 비교하는 부분에서는 사회라는 독립변인에 따라서 기술 이용이라는 종속변인이 달라지는 듯한 인과적 설명이 연상된다.) 3절에서 광고담론이나 미디어담론, 정부정책담론 등을 어느 정도 검토하고는 있지만 대부분이 젠더질서-기술이용의 가설에 맞게 자료들이 배치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뉴테크놀로지의 보수성을 귀납적으로 선언하는 데서 멈추는 것에서는 반대로 다시 (아마도 저자가 의도하지는 않았을) 기술 결정론적인 시각이 느껴진다.
아마도 이는 Moores(2000/2008)의 연구가 먼 과거를 오히려 ‘크게, 크게’ 다루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텐데 각각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고 자세하지는 않지만, 젠더질서, 시간성, 방송국이라는 행위자, 기술 자체의 발전/변형, 기술 이용자/수용자의 주체성, ‘가정’이라는 관념, 노동자 문화의 쇠퇴 등 조금 더 다양하고 복합적인 요인들이 서술에 동원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이렇게 다양한 요인들을 통해 풍부하고 두껍게 서술함으로써 단순한 인과로 연구의 결론이 제한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방지하고, 여기에 더해서 특정한 명제로 포괄할 수 없는 예외나 변이들을 충분히 서술에 포함해주려는 노력이 ‘결정론을 피하고 싶어서’ 거기에 기준을 두고 서술했다는 인상을 주는 연구결과물로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참고문헌
나미수 (2001). 홈컴퓨터의 소비를 통해 본 젠더와 테크놀로지에 관한 연구. <한국언론학보>, 46(1), 72-115.
Moores, S. (2000). 초기 라디오: 뉴미디어 테크놀로지의 가정화. In 임종수, 김영한 (역) (2008). <미디어와 일상> (56-76쪽).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