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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마타 Sep 26. 2016

'공기 반 소리 반'의 리얼리티

Technology and Everyday Life 4주차 리딩로그

Katz와 Tacchi의 글은 모두 소리(sound)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회문화적인 현상을 다루고 있다. 두 글에서 얻을 수 있는 핵심적인 통찰을 세 가지 정도로 구분하여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소리정경(soundscape)은 물질문화의 일부를 실질적으로 구성한다. 소리(청각)는 영상이나 텍스트로 구성되는 시각이나 면대면 상호작용에 해당하는 촉각 등의 다른 감각들과 마찬가지로 상상/가상(imaginary)의 구성과 적지 않게 관련되어 있다. Tacchi의 글에 나오는 주부인 라디오 애청자인 Trisha의 예를 통해 대표적으로 볼 수 있듯이, 물질성이 없으며 면대면 관계가 아닌 라디오를 통해 사회성(sociality)이 매개되는 것을 가상적인 것으로만 치부하는 시각이야말로 실질적이지 못하다. 특수한 종류의 소리(음악)와 소리(음악)에 관한 기술은 소리(음악)에 대한 문화를 특수하게 변형시키는 데 일조할 뿐만 아니라, 친밀성과 사회성의 영역을 비롯한 사회, 문화 전영역이 특수한 형태로 형성되어가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둘째, 소리와 관련된 기술의 도입과 수용은 기술결정론적인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라, 개인/사회/문화/제도적인 기타의 요인들과 기술이 협상하는 과정이다. 이는 음악 녹음 기술의 동일한 발전이 다른 문화권에서 음악 산업과 관련해 다른 결과를 낳았다는 것을 통해서 증명되기도 하고, 라디오의 수용자들이 자신들의 상황이나 다양한 요구에 따라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자유롭게 전경(foreground)화와 배경(background)화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현재 나타나고 있는 소리와 관련된 현상을 그 현상을 가능하게 한 기술적인 발달과의 인과관계로 섣불리 설명하는 것은 오류가 되기 쉽다. 기술은 오히려 가능성들의 장을 확장시키거나 특수하게 구조화하는 제약 요인 정도로 보고, 그 기술과 인간사회가 협상해나가는 과정을 경험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협상의 과정 속에서 두 텍스트에 드러난 가정화된(domesticated) ‘라디오 문화’라든지, 턴테이블리즘, 샘플링 등 다양한 소리/음악문화들이 생성되고 전파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것이 기술의 결과가 아니라 유동적인 협상의 잠정적인 형태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추가적인 창조적 변형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확률이 있다. 


일례로 우리에게 친숙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의 음악 연주/가창에 대한 심사위원이나 청중평가단들의 평가를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K팝스타>에서 박진영이 ‘공기 반 소리 반’이라고 할 때, 또 ‘말하듯이 노래하라고’ 주문할 때, 이것은 예능프로그램에서의 재미를 부각시키기 위한 일종의 아포리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음악 녹음 기술과 라이브 장비 등의 기술적 이슈에 능통한 프로듀서가 체득하고 있는 일종의 암묵지(tacit knowledge)이기도 하다. 어떤 식으로 불러야 녹음 장비를 통해서 0과 1의 디지털 음가로 목소리가 변형될 때, ‘잘 부르는 것처럼’ 들리게 되는지, 또 어떤 식의 발성이 ‘감정’이라는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을 물질화하여 청자들에게 가장 잘 전달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스튜디오형 가수/래퍼’나 ‘라이브형 가수/래퍼’를 구분하여 이해하는 대중음악 수용자들도 박진영과 같은 프로듀서들이 제작 과정에서 사용하는 노하우들을 비슷하게 공유하고 있고, 이것이 대중음악의 성공적인 수용 혹은 실패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공기 반 소리 반’의 리얼리티는 여기에서 발생하고 증명된다. 다만, 대중음악 소비자들은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며, 또 창조적인 생산자가 나타나서 일반적인 가요의 ‘흥행 공식’을 비틀면서 창조적으로 새로운 음악문화의 코드를 만들어낼 수도 있는 일이다.


셋째, (꼭 소리와 관련된 것이 아니더라도) 기술의 변동이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 – good or bad –을 가져오게 될지는 기술로 인해 사전에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Katz의 글은 라디오와 같은 공중/대중 매체가 일반적으로 받게 되는 ‘의문스러운 눈초리’를 반박하기라도 하듯, 라디오가 얼마나 다양한 형태로 사회성(sociality)을 실현하는 매체로서 기능하고 있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특정한 기술의 등장이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가져올 것이라는 식의 단정적인 예측은 아주 과거로부터 많은 필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져 왔고, 그러한 예측은 대부분 정말 ‘예측’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같은 기술의 같은 특성에 대해서도 동시에 비관론과 낙관론이 공존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반복되어 왔다. 예컨대, 영화의 주의산만(distraction)적인 특성은 어떤 필자들에 의해서는 메시지에 집중하지 못하는 영화의 ‘가벼움’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반면, 어떤 필자는 주의산만을 해방적인 가능성을 지닌 영화의 매체적인 특성으로 논의하기도 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턴테이블리즘이나 샘플링과 같은 새롭지만 논란의 소지가 있기는 있는 음악의 형태 혹은 음악문화를 일방적으로 폄하하는 것은 상당히 편협하고, 소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문화적인 즐거움을 상당히 제한적으로만 해석하는 보수적인 입장으로 여겨진다. 앞의 예에서, 박진영이 ‘공기 반 소리 반’을 강조하는 것이 다소 엉뚱하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듯이 랩하는 형태’로 하는 것이 ‘힙합’의 본래적인 스웨거를 해친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음악 자체를 폄하하거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 할 일은 아니다. 그러한 음악은 ‘다른 음악’이지 ‘틀린 음악’이 아닌 것이다. 턴테이블리즘이나 샘플링이 기존에 있었던 음악 소스들을 가져와서 활용한다고 해서 또 그것이 새로운 창조가 아닌 것은 아니다. 턴테이블리스트나 샘플링 작곡가들이 그 원래의 소스를 가져와서 새롭게 작업하지 않았다면, (경제적, 문화적을 포괄하여) 새로운 가치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Katz의 언급처럼 저작권법의 측면은 일단 뒤로 밀어두더라도, 턴테이블리즘이든 샘플링이든 새로운 창조적인 형태로 만들어지는 음악을 즐길 수 있다면 즐기고, 즐길 수 없다면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즐기는 것에 훼방을 놓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된다. 다만 여기에서 합의가 필요한 지점은, ‘다른 음악’ 말고 ‘틀린 음악’도 있을 수 있다는 지점일 것이다. Katz의 텍스트에서 턴테이블리스트들의 디스 문화에서 활용되는 여성혐오적 가사까지도 남성성의 건전한(?) 분출구로서 긍정적으로 해석해주는 부분이 약간 고민스럽게 느껴졌는데, 물론 특정한 행위에 ‘여성혐오’의 낙인을 찍어서 억압하려고 하는 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혐오적 혹은 인종혐오적인 음악 생산과 수용이 조응하는 현장을 시장이 알아서 하도록 그대로 두자는 입장은 더더욱 무책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참고문헌

Mark Katz (2004). Capturing Sound: How Technology Has Changed Music. 허진 옮김 (2006). <소리를 잡아라>. 서울: 마티. pp. 13-79, 177-242.

Jo Tacchi (1998). Radio texture: between self and others. in Miller, D. (ed.) Material Cultures: Why some things matter (pp. 2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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