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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마타 Aug 19. 2018

부채통치 (1)

문화연구 스터디 8월 1일 코멘트 페이퍼

Text: 

Lazzarato, Maurizzo (2014). Gouverner par la dette. 허경 (역) (2018). <부채통치>. 서울: 갈무리. 9-112쪽.     


이전에 읽었던 자율주의의 다른 저자들과 라짜라토가 다른 점은 아직까지 읽은 바만 가지고 보면, ‘다중’ 내지는 ‘노동계급’과 같은 어떤 집합적 주체에 대한 근거 없는 기대감이나 자신감이 덜 하다는 지점에 있는 것 같다. 라짜라토는 “그들은 더 이상 하나의 정치적 계급을 구성하지 못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구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며, 동시에 “노동 운동은 자본/노동 관계에 의해 지속적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고, 또 규칙적으로 패배한다”(21쪽)는 역사관을 보여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노동이 자본에 우선한다고 보는 자율주의 맑시스트들의 역사관과 확실히 차이가 있는 것으로 느껴지고 굉장히 비관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또한 2008년 이후의 어떤 주기에서 세계 곳곳에 발생한 투쟁의 순환들에 대해서도 섣부르게 기대를 품기보다는 오히려 도대체 이 일시적인 정동적 열정이 그 다음에 무엇을 생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다소 차분하게 평가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네그리, 클리버 등과 함께 대의(representation)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면서 ‘정치’를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대단히 다른 영역으로 구성하려고 한다는 것, 또한 경제논리가 통하지 않는 미학적이고 예술적인 영역과의 관계 속에서 사유하는 흐름에 있다는 것은 비슷하게 느껴진다. 그동안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이 대의를 포기할 수가 없었고, 대의가 아닌 방식의 민주주의가 실제로 가능한지에 관한 의문을 많이 품었었는데, 라짜라토가 “정치적 대의제는 대변되는 이의 정체성을 전제로 하는 반면, 탈-동원 선은 정확히 이미 확립된 ‘정체성’의 중단을 생산한다”(32쪽)고 쓴 지점에서 왜 대의를 극복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서 한 번 고민해 볼 여지가 생겼다. 라짜라토에게 정치는 경제와 같은 방식으로 일어나는 미분화(différentiation)와는 다른 것이며, ‘좌파’ 사회과학자들도 많이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함께 살기’의 조직화 혹은 ‘공동 세계의 설립’”(64쪽)과도 다르다. 그러한 공동 세계가 근본적인 전유와 분할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한. 그래서 라짜라토의 정치는 다소 선언적이고, 절대적인 질적 단절을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무언가 아득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어떤 방식의 ‘뉴딜’도 불가능하다고 본 것, 세금은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것처럼 재분배의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채권자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조직된다고 보는 것 등에서 다소 막막한 감정이 든다. 하지만 아마도 이러한 통찰을 통해 한국의 좌파-민주진영에서도 일반적으로 ‘선’으로 여겨지는 어떤 것들에 대한 재검토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대학생들을 통해 부채의 현실을 보여주는 3장에서는 사실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학생-채무자에 대한 분석이 백진영, 천주희 등의 연구를 통해 이루어진 바가 있기 때문에 익숙한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이들이 주체화되는 과정에 대한 인류학적(?) 논리 분석에서 이 과정에서 채무자들이 “권력관계를 내면화”하고 “죄책감과 책임감”을 갖게 되어 “호모 에코노미쿠스”(86쪽)가 된다고 쓴 부분은 일견 동의되지만 다른 생각도 좀 해 보게 되었다. 국가장학금이나 학자금대출 제도가 생산하는 주체성 내지는 감정이 반드시 유순한 주체이기만 한지, 탈주선은 없는지, 예컨대 그러한 제도가 ‘계급’이라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제도와 국가에 대한 불만을 생산하는 작용도 하지는 않는지, 그래서 신용카드를 막 써서 채무자가 된 경우가 아니라 학자금대출이나 주택담보대출을 통해 채무자가 된 사람들의 기본 감정이 “죄책감과 책임감”일 것인지가 궁금했다. 더불어 예전에 강자의 전략과 약자의 전술이 아닌 약자의 전략과 강자의 전술은 불가능한지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약자인 이 채무자들은 전략을 짜보려고 하는 경우는 없는지. (자신에게 유리하게 설계 – 이건 물론 자기경영 주체 같은 느낌도 들지만) 


초월적인 것에 대한 거부는 네그리와 이어지는 부분인 것 같다. 르네 지라르와 데이비드 그레이버를 비판하는 부분은 매우 흥미로웠지만, 동시에 지라르와 그레이버를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평가를 중단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어판 해제는 해제로 보기에는 너무 별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뼈때리는 통찰을 담고는 있었다. 이런 책은 1,000부도 팔리지 않는다. 주류 경제학을 배운 학자의 눈에 보기에는 경제 얘기가 어설프다. “경제문제에 관심이 있는 철학자들이 수학, 통계학, 경제이론을 배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13쪽). 그로스버그.는 경제학자보다 경제학을 더 잘하는 문화연구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던데. 그거, 나든 누구든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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