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 스터디 8월 8일 코멘트 페이퍼
Text:
Lazzarato, Maurizzo (2014). Gouverner par la dette. 허경 (역) (2018). <부채통치>. 서울: 갈무리. 113-224쪽.
랏짜라토가 앞부분에서도 푸코를 몇 번 언급하며 한계가 있다고 말하기에, ‘통치성 비판’이라는 장의 이름이 당연히 푸코의 통치성 개념 자체를 전면적으로 비판하거나 크게 수정하려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신자유주의(자본주의) 국가의 통치성 그 자체를 비판하려는 맥락에서 쓰인 제목인 것 같다. 물론 푸코에 대한 비판도 일정 부분 존재한다. 랏짜라토는 푸코가 “통치의 자유주의적 기술을 원래 존재하는 것 혹은 원래 존재해왔던 것으로 가정”(114)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비판하며, 이를테면 주권 메커니즘에서 규율, 안전 메커니즘으로의 ‘이행’을 시사했던 푸코와는 달리 “자본주의는 언제나 국가자본주의”라는 것, 따라서 그것은 “주권의 작용 없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115)는 것을 강조한다. (물론 푸코 또한 오늘날 주권이 아예 사라진 것이 아님을 명확하게 그의 강연과 글, 인터뷰를 통해 지적한 바 있다.)
통치성 개념을 맑스주의와 절합시키는 것이 랏짜라토가 이 부분에서 하고 있는 작업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게 다시 만들어진 통치성 개념은 사실상 오늘날 한국 학계에서 가장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그 개념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통치성은 언제나 신자유주의라는 한정어와 함께 사용되는 개념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랏짜라토는 “국가와 자본이 이질적이던 시절도 분명히 있었”(119)겠지만, “국가의 원리를 자본의 평가 과정에 종속시키는 재설정 작업”(120), 아마도 즉 신자유주의 이후의 통치성은 이전의 그것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그는 ‘신자유주의 국가’라는 표현을 잘 사용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신자유주의 국가는 “경제(와 통화)의 전제가 아니라, 결과이다”(137). 랏짜라토는 푸코가 통치성 비판을 했던 시기와 현재 시기의 차이점을 들면서, 오늘날의 위기가 통치성의 형태를 변화시켰다는 식의 근거를 들고 있다. 푸코는 통치성을 “개인으로 하여금 이런저런 방식으로 이에 대응하게 만드는 환경의 정돈을 촉진할 뿐”(197)으로 보았으나, 위기 상황에서 통치성의 작동 방식이 다시 개인에게 무언가를 강제하게 만드는 조금 더 강한 형태로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맥락에서 랏짜라토는 푸코가 “자본과 자본주의를 구분”(157)하고 “본래적 자본주의가 존재한다는 관념을 거부”(158)한다는 점을 비판한다. 내가 읽기에 랏짜라토는 자본주의의 역사를 결국에 자본에 의한 사회의 전유 가능성이 확장해 나가는 식의 전개로 그려내려고 하는 듯하다. 신자유주의 통치성, 즉 “금융 공리계의 전유 가능성이 산업자본주의의 공리계와 비교해 볼 때 크게 확장되었다”(183)는 설명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부채통치는 “노동만이 아닌 모든 사회적 행위에 대한 평가․측정․포획 장치를 구성”(127)하는 포괄적인 것이다. 경제와 노동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자본화되는 과정인 것이다. 이 부분에서 물론 “자본주의는 개별화된 주체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예속화와 탈주체화를 만들어 내는 기계적 종속화라는 두 가지 상이한 장치를 통해 주체성의 생산과 통제를 조직한다”(214)는 이중적 포획 작용에 대한 설명은 매우 흥미로웠다. 반대로 정동이라는 개념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정념들’을 언급하면서, “신자유주의적인 자기와의 관계”의 핵심적인 ‘정념들’로 “좌절, 원한, 죄책감”을 드는 부분은 내가 정동 이론에 대해서 갖는 이질감의 크기 딱 그만큼 싱겁게 느껴졌다(215). 궁극적으로 나는 랏짜라토를 읽어도 여전히 자본의 ‘기계적’ 본성이 존재하고, 인간 관료의 ‘정치적’ 선택이 언제나 자본의 본성에 이끌려가게 된다는 설명보다는 푸코의 입장에 더 마음이 가는 것 같다. 이전에 읽었던 ‘실제로 존재하는 신자유주의(actually existing neo-liberalism)’ 개념이 “자본주의는 늘 특이한 것”(158)이며 일종의 이념형적인 신자유주의가 실재할 수는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더불어 랏짜라토를 읽으면서 마음이 어려워졌던 것은 그가 워낙 모든 것을 ‘비관’하는 것처럼 보이는 탓에 저항의 실마리를 찾기가 난망해지는 마음이 들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시민 사회’와 국가 사이의 신화적 투쟁”(134)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시민사회 기획도 비판하고, “대중소비뿐만 아니라 복지의 수단화”(165)도 문제라고 말하면서 ‘부의 재분배’ 기획으로 여겨지는 복지도 비판한다. 심지어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그렇다. 노동운동이 “국가에 통합”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이전의 어떤 자본주의하에서도 이루어진 적이 없는 초유의 안정적이고 견고한 재영토화․예속화를 자본에 보장”(189)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앞부분에서 본 바와 같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투쟁 순환주기에 일어난 다양한 투쟁들에 대해서도 다소 비관적으로 보는 편이다. 오히려 “대의제는 경제의 입장에서는 아직도 너무 민주적”(126)이라고 짧게 쓴 부분에서, 그나마 희망을 찾아야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랏짜라토의 논리대로라면 그것 또한 점점 더 자본화되어갈 것이라고 볼 것 같지만 그나마 자본에게 아직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모든 실천에서 한계를 먼저 보는 사람과 대화를 할 때의 피곤함이랄까 그런 게 느껴졌다.
아직 읽은 부분은 아니지만, 랏짜라토가 ‘게으를 권리’를 언급하는 걸 봤을 때 이것은 왠지 결국 자본주의(신자유주의)의 공리계가 개인의 주체성을 조작하는 방식에까지 왔다는 데 대한 반대급부로서 결국 우리가 우리의 주체성을 돌보는, 푸코가 소위 ‘윤리적 전회’ 이후 펼쳤다고 여겨지는 입론과 비슷한 방식의 저항법을 암시하는 것 같다. 물론 권력과 저항은 항상 붙어 있어서 비슷한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아무튼 이런 저항법이어야 말로 개인, 그리고 개인의 역능(능력)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신자유주의적인 공리계에서 빠져나가기 가장 어려운 방법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더불어 그가 사회적인 것이나 복지 제도와 같은 사회적 수준에서의 해결책을 모두 비관적으로 본다는 점은,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랏짜라토가 공리계 그 자체도 “자동적 혹은 초월적 기계가 아니”라(193), “하나의 정치적 장치에 관련”(194)되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의 지배를 “알고리듬의 대상”이 아닌 “정치학의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236). (얼핏 모순 같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