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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인간극장 Dec 27. 2015

이것은 장소와 사람에 대한  기억이다. 사실은

성인챇방_첫 번째 대화록_ W. G. 제발트의 「현기증. 감정들」


용자 엄마가 이 책 읽고 나면 뭐라고 하실까.

'문과 망했으면' 하실 듯.






별다른 생각 없이 펼쳐든 소설 한 구석에서 이런 눈을 마주친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정확히 가로 7센티미터, 세로 1.6센티미터의 이 그림이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성자 이게 완전히 본문인 거지. 참고자료나 그런 게 아니라. 그래서 내가 자꾸 페이스북, 블로그  얘기하는 거야. 포스팅한 거 같아. 사진 넣고 글자 넣고. 그리고 여기, 이것도 엄청 좋았어. 딱 눈만 확대해서 보여준 게.

맹자 그러니까 이 그림에 대해서 글이 설명을 하는 게 아니라, 글이 진행이 되다가 그림이 글처럼,

성자 그림이 나한테 말을 해.

맹자 일부처럼 그냥 읽혀서, 그림이랑 글 사이에 괴리가 적어. 그 느낌이 엄청 좋았어.



2015년 마지막 성인챇방에서는 독일 작가 제발트의「현기증, 감정들」을 읽었다. '현기증'이라는 단어에 나는 자주 시선을 빼앗긴다. 그래서 이 책도 줄곧 염두에 두고 있었다. 맹자는 작가 이름이 너무 좋다고 했다. 제발트. 제발... 제발 제발트 읽자는 얘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2015년 12월 26일 오후 한 시

광진구 군자동 어느 카페에서

등장인물: 용자 맹자 성자







장소와 사람에 관한 이야기,

기억과 사실에 관한 이야기


성자 나는 이 소설을 장소와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고 정의를 하거든

맹자 나는 기억과 사실에 관한 이야기

성자 왜 장소와 사람이냐면, 이 책에는 시간도 많이 나와. 옛날에 스탕달이 살던 시간, 1813년, 1913년... 그런데 그게 나올수록 점점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는 거야. 오히려 장소가 진짜 중요해. 중간에 화자가 어떤 두 남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의식을 하잖아. 근데 저녁에 다른 장소에 가서 또 똑같은 경험을 해.  아니면 어떤 장소를 시간 텀을 두고 자꾸만 방문해. 가야한다는 강박이 있어. 이 사람이 장소와 사람을 인식하고 의식하는, 기억하는 방식이 나랑 비슷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

맹자 장소에 관해서 두려움과 호기심이 공존해. 구체성은 달라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런 유머에 터지는 사람이라면


성자 유머도 있어. 여기 이 발로 그린 그림 보여주면서


아래의 스케치는 벨이 속해 있던 부대가 포화에 휩싸인 바르 요새와 마을 인근을 지나갈 당시를 생생하게 되살려 그린 것으로,

그는 이 그림으로 현실감각을 되찾고자 했던 것 같다.



'생생하게 되살려 그린 것으로...'


'생생하게 되살려 그린 것으로...'

'생생하게 되살려 그린 것으로...'






작가는 무엇으로 몰락하는가?


성자 이 게 스탕달 얘기지? 여기 보면 ‘그는 한동안 마비되어 꼼짝도 않은 채 타오르는 불길이 자신의 몸마저 집어삼켜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면서, 그 몰락하는 과정을 온전히 겪은 거잖아. 아름다운 기억이 다 파괴되는 걸 끝까지 목격하고 받아들이고 나왔는데, 이 질문을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면서 하고, 이 질문을 이후 수십 년 동안 작가로 살면서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고 한 거잖아.

맹자 응, 나는 이 질문이 부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이 질문이 스탕달이라는 사람의 문학관이 된 거잖아. 이제. 때문에 몰락을 한 번 해야지, 몰락을 한 후에 작가가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어.

성자 아... 그러네.

맹자 더 과장하자면, 갖고 있던 아름다운 기억이라는 게 기억으로만 간직되지 않고 기억들이 파괴되는 순간에 그 걸 포착해서 그 질문을 떠올리고,

성자 거기에 대한 답을 찾아 가는 게 작가의 과정이다?

맹자 그렇지.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맹자 현기증이 엄청 묘한단어야, 내게는. 숭고라는 단어는 내가 읽은 책들에서는 거대한 걸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감정이란 말야. 파도 같은 걸 마주했을 때, 거대 자연이 나를 덮칠 것 같은 두려움 같은 게 숭고하다에 포함된단 말야. 그래서 숭고하다는 말에는 타자와 나라는 존재의 괴리가 전제돼 있지. 얘랑 나는 다른데 다른 존재가 나를 덮치려는 것에 대한 감정. 그런데 현기증은 어떤 복잡하거나 거대한 걸 목격했는데, 그 거대한 거에 내가 동질감을 느끼는 감정이라고 봐. 거기서, 내가 타자화하는 상태에서 나는 사실 타자가 아닌데, 내가 타자화하며 그 대상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 거기서 느껴지는 어지러움이 내게는 현기증이야. 묘한 단어야. 제목도 그런 의미라고 봐.

성자 현기증은 나한테는 더 작아. 사람들은 현기증을 느끼고 싶어 할 때가 있어. 쉽게 말하면, 어렸을 때 한 여름에 운동장  조회하면 쓰러지는 애들 있잖아.  한두 명씩. 나는 절대 그런 연약한 소녀는 못되었지만 가끔은 쓰러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단 말야. 유혹이지. 작게는 유혹에서 크게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아 쓰러져버리고 싶다- 이게 현기증이야 나한테는

맹자 내 식으로 하면 나는 사실 쓰러지지 않아도 돼. 근데 쓰러진다는 상황은 나와 다른 상황인데, 그 타자에 동일시를 하게 되면 현기증이 이는 거지.

성자 유혹이 강해. 현기증이 스스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내가 현기증을 느끼고 싶어서 불러낸다. 정신을 놓고 싶어서.

맹자 그건 한편으로는 그 단어가 갖고 있는 문학성에서 기인하는, 그 외연에 위치한 경외감에서 비롯한다고 봐.


성자 글로 정리하면 뭔가 보일까.

맹자 이건 정리할 수 없어. 이 책을 읽고 정리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인 것 같아. 제발디언이 되느냐 안 되느냐.







아래부터는 대화록 전문입니다. 네, 길~다는 얘기예요:)





용자 이렇게 읽고 나서 기억이 안 나는 책은 처음인 것 같아.

맹자 아, 일단 그거부터 하자. 이 책이 본인 스타일인 사람?

성자 나, 나 맞는 거 같아

맹자 나는,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용자 너무 맞아?

맹자 변곡점이라는 게 있잖아. 책을 읽어 오는 동안 독서 방향을 변화시켜준 지점들. 처음에 ‘야~ 문학을 읽어’하고 끌어당겨준 게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였어. 소설이 재밌으면서도 이렇게 철학적일 수 있구나 싶었던 게 성인 누나가 추천해 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고. 그러고 나서 또 한 번의 변곡점, 한국 소설이 진짜 재밌을 수 있구나 싶었던 게 천명관의 고래였고,

성자 나도 그런  생각해봤어. 어느 기점으로 자기한테 영향을 끼친 책들을 정리해 봐도 좋겠다는.

맹자 고래 다음에, 한국 소설이 깊을 수가 있구나 생각한 게 김승옥의 무진기행이었거든. 그럼 이게 다섯 번째인가? 나한테 변곡점 비슷하게까지 다가왔어. 고래를 읽을 때는 재밌고, 진짜 진짜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는 이런 글은 못 쓰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런데 이 책은 읽는 내내 이렇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엄청 많이 했어. 작가의 문체 같은 거에  설득당했다기보다는 약간 이 책이–이런 생각까지 들었어-, 내 삶의 연장선상에 제발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용자 네가 그렇게 될 거 같다는 얘기야?

맹자 그렇게 될 거 같아... 뭐 그렇게 되면 좋겠지. 내가 만약 픽션을 쓴다면 이런 지향점을 두겠다는 생각을 했었어. 그래서 굉장히 재밌게 읽었어. 근데 솔직히 재밌게 읽으면서도 잘 읽히지는 않았어. 잘 읽히는 책은 아니야.


맹자 우선, 신비로운데 환상적이진 않은 느낌이 좋았고

성자 어어- 그거 나 동감, 완전 동감.

맹자  그다음에, 이건 사실 작품 해설 보면서 영향 받은 건데, 제발트가 글을 쓰기 전에 참고 문헌이나 관련 책들을 엄청 많이 본대. 그러면서도 이 책에는 어떤 지식인의 냄새나 수사적인 문체가 담겨 있지는 않은 것 같거든. 기본적으로 자전적이고, 쉽게 말하면 어렵지는 않은데 그냥 굉장한 문장이 많아서 그런 것 같긴 한데...


디스트릭트 나인이란 영화 있잖아. 아니면 페이크 다큐 같은 거. 영화  중간중간 실제 인터뷰가 들어간다든지. 그런 느낌도 받았고, 한 편으로는 영화적이라는 느낌도 받았거든. 왜 이런 글을 쓰고 싶은 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정리를 해봐야겠지만, 아무튼. 그런 느낌들이 좋긴 했어, 이건 내가 더 생각을 하고 다시 말을 할게.

성자 맞아 나도 여기에 대해서 어떤 단어를 사용해서 말해야 할지 어렵기는 해.

맹자 딱 그거 같긴 해. 신비로운데 환상적이지는 않은 느낌.

성자 나는 그걸 어떻게 표현했냐면, 아이러니가 엄청 많은데 아이러니하지 않고. 뒤죽박죽인데 혼란스럽지는 않은. 그런 느낌이라고 적었어. 그리고 막 경계를 넘나든단 말야. 소설 같다가도 문득 일기 같다가, 다른 때는 에세이 같다가. 그렇게 막 넘나드는 데, 사실은 그게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겠다-하는 생각이 들었어.


성자 첫 페이지 넘기자마자 그림이 나오잖아. 나는 여기서 진짜 충격을 받았어. ‘유년시절과’, ‘소년 시절이’ 이 배치까지. 내 뇌리에 탕! 탕! 박혔어.

맹자 이게 사실 엄청 단순한 시도잖아. 문학작품에 사진을 넣는 것 자체가 그렇게 획기적인 건 아닌데, 글이라는 텍스트에다가 그림을 넣었는데도 그 문학성이 훼손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엄청 좋았어.


성자 그런 이유로 나는 첫 번째 편이 제일 좋았어.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맹자 나도 첫 번째 편이 제일 좋기는 했어.


맹자 분량은 짧은데,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이번 주 내내 읽어서 겨우 끝냈어. 그런데, 기행집인데, 엄청 집중을 해서 읽어야 해. 집중을 안 하면 정말 기억에 남는 게 하나도 없어.

용자 이게, 둘이 너무 극찬을 하니까 내가 말하기가 조금...

성자 아냐 나는 처음에만 극찬했지, 처음에 그림 딱 마주한 순간.

용자 내가 이걸 조금 더, 완전 정독을 했으면 다른 느낌으로 왔을지도 모르겠어. 그렇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거는, 내가 어제 언니한테 카톡도 했지만, 서사성이 너무 없으니까 못 읽겠는 거야. 그래서 그냥 중간에 ‘아 이게 소설이라는 생각을 버리자’ 이렇게 생각을 전환하니까 조금 낫더라고. 막 계속 뭔가 이야기를 찾으려고 하다 보니까 더 안 읽혀. 그래서 그냥 문장들 자체에 집중을 하려고는 하는데,  막 무슨  얘기했다가, 저  얘기했다가 그러잖아. 근데 이게 내 취향이 안 맞았던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보면서 ‘아 진짜 못 읽겠다’ 이 생각을 많이 했어.

맹자 취향의 문제를 엄청 부각하는 책이지.

성자 그래서 이 게 좋다는 사람들의 의견이 궁금한 거야. 막  찾아봤어 읽고 나서. 혹시 팟캐스트에라도 있을까 싶어서. 근데 창비에서 이 책에 관한 건 아닌데,

맹자 창비에서 제발트에 관한 팟캐스트를 했었지.

성자 맞아. 그리고 이 책 번역한 배수아도 창비 라디오에 나온 적이 있고.

맹자 배수아의 소설은 한 번도 안 읽어 봤지만, 기행문은 한 번 읽어봤단 말이야, 잠자는 남자와 일주일을. 사실 그 책은 엄청 실망했어. 내가 한 달 동안 읽은 책들을 페이스북에 올리는데, 가장 좋은 문장 한 줄을 골라 적거든. 그 책은 내가 느끼기에 좋은 문장이 하나도 없었어. 그 책이 유일했어.  그렇게 느끼면서도, 아 이 사람 삶의 정조와 「현기증. 감정들」은 참 잘 어울린다는 느낌은 있더라고. 이 책을 읽고 나니 오히려 배수아가 쓴 소설은 한 번 읽고 싶어 지네.

성자 소설 되게 특이하대.

맹자 그니까. 소설이 만약 이런 느낌이 있다면, 나는 동의할 것 같아. 그 사람의 문학관에 대해서. 그런데 산문은 내가 느끼기엔, 엄청 자유로운 사람인 거를

성자 스스로 의식하고?

맹자 응, 스스로 의식하고 쓰다 보니까, 오히려 거기서 독자인 나는 자유를 느낄 수 없는 거야. 독자에게 자유를 느끼게 해줘야 하는데, 혼자 너무 자유로운 거야.

성자 그 사람이 제발트를 읽는 방법에 대해서 얘기하는 건 딱 그 거더라고. 그냥 이 책에서 한 문장이라도 다른 친구한테 말해줄 수 있으면 그 걸로 된 거 아니겠냐고.


맹자 영화 평론가 정성일이 이런 얘기를 했어. 정확히 이 영화들은 아닌데 일단 예를 들어보자면 <와일드>라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저수지의 개들>을 좋아할 수 없다, 이런 식의. 이동진 평론가를 비판하면서 한 말이야. 이동진의 경우, 그 사람이 항상 듣는 말이 이거야. 취향이 없다.

성자 다 좋아.

맹자 모든 걸 다 좋아하다 보니까, 그걸로

용자 아... 별 걸ㅋㅋㅋㅋ

맹자 왜냐면, 평론가는 자기의 평론관이 있을 텐데 정성일 생각에는 A를 좋아하면 B는 좋아할 수 없는 게 분명히 존재해. 평론관은 자신의 사상이기 때문에 모든 걸 좋아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거지, 정성일에 따르면. 나는  그것도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생각하는데, 책으로 치면 이건 거 같아. 「현기증. 감정들」을 좋아한다고 치면 어떤 책은 좋아할 수 없겠다는 기준점이 될 수 있는 책 같거든. 그래서 이 문학관에 동의하는 사람과 동의하지 않는 사람 간에 이 책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갈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성자 새벽에 베네치아 역 앞에 앉아서 글 쓰는 얘기가 나오는데, ‘아 이 사람 거기서 실제로 글 쓰는 그대로 책에 옮겨 놓은 거구나’ 생각했어.

용자 그치. 그런 게 되게 많아. 이 게 그만큼 생생했다는 뜻이 아니라, 정리가 안 된 느낌. 제발트가 대단한 작가냐 아니냐를 지금 평가할 수는 없겠어. 그저 이 사람이 구상을 안 하고 내지른 건데, 이거에 공감을 하면 좋은 작품인 거고 아니면 아닌 거고 하는 생각이야.


맹자 ‘이 책은 소설인가?’ 여기에 동의하냐, 동의하지  않느냐부터 봐야 할 것 같아. 나는 소설이라고 생각하거든 이 책이. 근데 이것부터가 다를 것 같아, 사람마다. 서사라는 것을 어디서 발견하느냐가 사람마다 다를 테니까. 이게 만약에 소설, 아니 문학 작품이라면, 문학 작품에 공감한다는 게 뭘까 생각도 해봤어. 우리가 보통 공감이라고 하면 어떤 부분이 감명 깊거나 아니면 이 이야기에 설득되거나 그런 느낌인데, 이 건 그렇지 않다는 말이지. 여기 어떤 부분이 딱 좋다고 말하기도 힘들고

성자 난 진짜 말하고 싶은데도

맹자 응, 말하고 싶은데도. 이 스토리에 설득됐다고 말할 수도 없어. 근데 공감이 됐어. 그게 엄청 굉장한 거라고 생각을 했고, 이 부분에 대해서 굉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제 이 책을 별로라고 말할 것 같아. 그 말도 당위가 있다고 생각하고.

성자 나는, 첫 번째 단편은 엄청 좋고, 뒤에 건 그 정도는 아냐. 그런데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이유는 앞에 나왔던 사람이나 장소가 뒤에서 연결이 돼. 그래서 읽을수록 뒤섞이는 게 있어.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장소와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고 정의를 하거든

맹자 나는 기억과 사실에 관한 이야기

성자 왜 장소와 사람이냐면, 이 책에는 시간도 많이 나와. 옛날에 스탕달이 살던 시간, 1813년, 1913년... 그게 나올수록 점점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는 거야. 오히려 장소가 진짜 중요해. 중간에 화자가 어떤 두 남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의식을 하잖아. 근데 저녁에 다른 장소에 가서 또 똑같은 경험을 해.  이 사람이 장소와 사람을 인식하고 의식하는, 기억하는 방식이 나랑 비슷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 그리고 빈 얘기 나오잖아. 그래서 친근하지 않았어?

용자 그래서 그 부분이 나는 다른 데보다 반가웠지. 아는 지명이 나오고 그러니까.(빈에서 산 적 있는 용자) 두 번째 단편 <외국에서>에 빈이 많이 나오지 않아? 이 사람이 오스트리아에 살았나? 그랬지 아마.

성자 여기서 크게 이동하는 공간이 오스트리아랑 이탈리아잖아. 계속 왔다 갔다 하고.


성자 빌 브라이슨 느낌도 나. 빌 브라이슨 여행기 쓸 때, 불평을 엄청 많이 하거든

맹자 <발칙한 유럽산책>?

성자 응. 여행기마다 다 그래. 독일인들은 이모냥이다 영국 날씨는 저따위다 맨날 툴툴대면서도 평생 여행을 하거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사실은 여행을 되게 좋아하는 거야. 암튼, 빌 브라이슨은 불평하면서도 부지런히 다니는데, 제발트는 불평은 안 하지만 둘이 비슷한 느낌이 있어.

맹자 기본적으로 회의적인데, 그 회의에서 독자가 느끼는 유쾌함이 있어.

성자 회의적인데 좀 착한 거! 비관적이거나 욕하지 않고, 베로나의 그 피자집에서 뭐라 하니까 쭈구리처럼 나와서는 7년 동안 다시 못 가잖아. 근데 그 걸 극복하기 위해 다시 가야 한다는 목표가 마음속에는 계속 있고.

맹자 내가 만약 부산엘 갔어, 혼자. 명소를 찾아갔는데, 사람들이 엄청 모여 있는 거야. 그걸 보고 내가 저길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이 많아지는 거야. 그러다가 아, 그냥 가지 말자하는 경우가 있거든.

성자 나도 그런 거 있어. 줄 길게 서 있으면 포기하고.

맹자 저 사람이 나를 보기에, 내가 여기 단순히 관광하러 왔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내가 남들과 같은 관광객으로 치부되는 게 싫어서 안 가는 경우가 있어. 그런 복잡한 생각 때문에 미처 가지 못한 곳이 많은데, 그런 느낌들이 이 책에 드문드문 녹아 있어서 공감이 많이 됐어.

성자 아침에 붐비는 지하철역에서 샌드위치 사러 가서는 죽어라 사람들 밀치고 겨우 하나 샀는데, 그러면서도 머릿속엔, 와 이 사람들 이거 하나 먹자고 여기 달려드는구나 하면서도 문득 아 근데 다른 사람 눈엔 나도 그렇게 보이겠지, 깨닫는 거지.

맹자 그런 거지. 장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같아. 구체성은 달라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용자 처음에 그림 안 산다는 부분 있잖아.

성자 어, 여기  체크해놨어 나도

용자 근데 나는 다른 생각이었어. 나는 기억하려고 사거든. 근데 이 사람은 이걸 삼으로써 자기 기억이 지워진다고 하잖아. 근데 나는 기억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망각이 무서워ㅋㅋㅋㅋ 그래서 나는 가는 데마다 엽서를 사는 편인데, 이 사람 얘기도 맞아. 한 편으로는

맹자 망각에 대한 양상이 두 종류가 있는 것 같아. 물건을 사서 기억을 뇌에 저장시키지 않는 동시에 망각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내는, 기억을 물건에 상징화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마르케스가 자기는 인터뷰에서 녹음하는 걸 정말 싫어한다. 인터뷰를 들은 기자가 나중에 떠올려서 글로 푼 것이 진정한 인터뷰라고 하거든. 그런 사고를 지닌 사람들은 애초에 사람 입에서 나온 사실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한 번 왜곡을 겪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이란 있을 수가 없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것 같아. 제발트도 그렇고. 애초에 기억이란 건 왜곡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억이란 건 어디에 저장시키는 것 보다 왜곡된 자체를 내 시선으로, 내 머릿속에 왜곡된 채로 담아놓는 것 자체가 더 정확한 기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아.

성자 나는 그냥 쉽게 생각했어. 나는 예전에 찍은 사진들을 자주 펼쳐 보거든. 결과적으로는 이래. 지금 내가 아일랜드를 떠올리면, 아일랜드 갔던 상황이 떠오르기 전에 내가 찍은 몇 장의 사진들, 그게 딱 생각나버리는 거지. 기억해낼 틈도 없이 메꿔 버려. 아 그리고, 아는 사람들이 자기 옆을 스쳐 지나간다는 느낌을 받는데, 아마도 죽었음이 확실한 사람들이다-하거든

용자 어어, 그 게 한 번밖에 안 나오나?

성자 이 걸 내가 아마 여기서 얘기했던 것 같아. 몇 년 동안 안 본 사람들은 사실은 죽은 사람들이 아닌가? 만나지 않고 기억하지 않았으면 죽은 것과 뭐가 다른가. 이 생각을 내가 오래 잡고 있었어. 이 책에도 나와서 또 생각해보게 됐어.



나를 비웃는 나를 보는 나

맹자 지하철에서 내 옆을 지나간 게 엘리자베스 3세라고 확신했다- 이런 부분 몇 번 있잖아. 재밌었어.

성자 어떻게 쓴 걸까?

맹자 난 이거는 문헌이라고 생각해. 애초에 이 사람이 책을 굉장히 많이 읽는다고 해. 자료 조사도 충실하고. 그래서 문헌적 상상력에서 나왔다고 생각해. 이 사람이 원래부터 엘리자베스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거나 아니면 그에 대한 책을 읽었을 거야. 그걸 글로 쓸 때 이런 식으로 풀어냈을 거라고 생각해.

성자 우리가 길을 가다가 진짜로 아는 사람인 줄 알고 멈칫할 때가 있잖아. 그래서 나는 실제 경험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거야.

맹자 그니까. 엘리자베스에 대한 생각을 계속 갖고 있던 차에 마침 지나가는 사람이 그와 비슷한 거지. 그래서 하나의 이야기가 됐다고 보는 거지.

성자 카프카 어린 시절 닮은 애 나오잖아.

용자 사진 달랰ㅋㅋㅋ졸라 웃겨

성자 근데 거기서 애들이 되게 키득키득 댄단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일까. 그냥 다른 사람들은 그런 화자를 우습게 본다는 은유인가. 그런데 그 부분에서 특히 더 그랬어, 다른 닮은 사람 만났을 때보다. 뭔가 있는 것처럼 키득키득 대잖아, 뭔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약간 무섭기까지 했어.

맹자 분위기가 묘했어

성자 맞아 묘했어. 그런 데서 환상성이 나오는 것 같아. 어느 정도의 자연스러운 선을 넘어버리는 인물들에서.

맹자 그 애들이 화자의 행위를 비웃는다는 느낌이 드네. 그래서 얘네를 작가가 실제로 본 건 아닐까 생각도 했어. 자기 행위에 대해 또 다른 자아가 보는 비판적 시선 같은 게 아닐까.

성자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실제로 누굴 보고 착각했는데 그 사람이 이상하게 쳐다봐서 제발트가 이렇게 쓴 것 같다고도 생각해. 그 사람이 카프카를 닮았다는 건 제발트가 꾸며낸 걸 수도 있지만, 누군가 닮은 사람들을 보고 착각한 경험을 변용시킨 거지.

맹자 자기가 카프카에 대한 생각을 계속 갖고 가면서 글을 쓰고 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던 거야. 그래서 어떤 아이를 보고 아 정말 카프카의 어린 시절과 닮았다고 제발트가 생각을 하면서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사진을 좀 줄 수 있겠느냐’고 말을 했어. 근데 한편으로는 이 행동 자체가 너무 작위적인 게 아닐까 하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던 게 아닐까. 그 비웃음이 쌍둥이의 키득거림으로 발현된 거라는 생각이 들어. 어제 브런치에 글을 쓴다는 생각을 하면서 계속 세상을 보니까, 뭔가 진짜 뭐가 봐지지가 않는다는 글을 올렸거든. 그 감정과 비슷한 게 아닐까.

성자 걔네가 쌍둥이었지?

맹자 어어

성자 근데 한 명만 닮았다고 강조했어. 한 명은 닮았는데 한 명은 아니야. 그 게 이상해 사실. 쌍둥이면 똑같이 생겼는데.

맹자 그러니까, 그러니까 더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똑같이 생겼어야지 쌍둥이면, 물론 뭐 이란성 있을 수 있겠지만

성자 문맥상 당연히 일란성이었어.

용자 그치, 책에서 이란성으로 읽힐 여지가 없지.

맹자 이 사람이 쌍둥이 중 한 명을 카프카로 보는 거는 이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 시선. 그런 행위들에 대한 화자의 또 다른 자아가 보는 비웃음의 시선이 나머지 한 명이라는 거야. 그래서 키득키득 거리는 거지.

성자 좋은 해석이다. 하여튼 그 버스 안이며, 어딜 지나 어디로 향해 가는 거며 상황 자체가 되게 묘한 분위기가 강했어 그 부분이.

맹자 그 부분에서 딱 느꼈어. 장르파괴적인 글을 쓰거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딜레마가, 아 그냥 나 혼자 괜히 대단한 걸 쓴다고 착각하는 게 아닐까? 하는 고민이 있을 거라고 보거든. 그런 고민이 이 글에 녹아 있는 것 같고. 아이들을 바라본, 아이들 시선에 비친 화자에게 그 게 녹아있다고 봤어.

성자 그렇게 우리가 해석할 수 있게 글을 써놨으니 좋은 작가라는 평을 받는 거겠지,

용자 그렇게 칭찬해주면  안 될 것 같은데ㅋㅋㅋㅋ




작가는 무엇으로 몰락하는가

성자 내가 적어 놓는 부분은 사실 사소한 것들이 많아.

그러므로 나무들 중에는 천 년을 넘게 살거나 아예 죽음의 개념 자체를 모르는 종도 있을 것이다.

용자 아 맞아 맞아. 아 근데 기억이 난다, 말하면. 나 솔직히 이거 읽으면서 기억 하나도 안 날거라 생각했거든.

맹자 그게 신기하지.

용자 읽으면서, 아 진짜 머리에 들어오고 있는 건지 이러면서 읽었거든ㅋㅋㅋㅋ

맹자 나도 말하면서 신기해. 내가 말한 것 중 아이 부분도 줄 친 데는 아니야. 근데 말하니까 바로 기억이 나.

성자 그래서 좋은 소설인걸......까...ㅋㅋㅋㅋ

용자 아냐 우리가 열심히 읽어서 그래 ㅋㅋㅋㅋ

맹자 나 이 부분이 문장 자체로는 제일 좋았어. 처음 부분.

한 세기가 시작되는 것을 기념하여 벨은 스칼라 극장에서 다시 한 번 <비밀결혼>을 보았으나, 무대장치의 완벽함과 카롤리네 역을 맡은 여배우의 뛰어난 미모에도 불구하고, 과거 이브레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주인공들과 동일시할 정도의 깊은 감동은 얻지 못했다. 동일시하기는커녕 이번에는 음악이 도리어 그의 심장을 말 그대로 부서뜨린다고 생각될 정도로 공연이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그리고 오페라가 끝난 후 극장을 가득 채우며 져나온 박수 소리는 마치 괴의 완결편인 듯 거대한 화재로 건물이 무너지는 굉음처럼 들렸으므로, 그는 한동안 마비되어 꼼짝도 않은 채 타오르는 불길이 자신의 몸마저 집어삼켜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늦게 겉옷 보관소를 빠져나오던 그는, 곁눈으로 슬쩍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시선을 주었는데, 이때 최초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작가는 무엇으로 몰락하는가?-이 이후 수십 년 동안 고통스럽게 그를 따라다니게 된다.


전에 봤던 연극이 엄청 감명 깊었어서 한 세기가 시작되는 기념으로 다시 봤는데, 처음 만큼의 감동을 못 얻었다는 얘기야. 근데 그 와중에 옆에 있는 사람들은 일어나서 박수 치고 환호하니까 뭔가 확 깨졌다는 거지. 자기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어떤 아름다운 기억들이 파괴되는 걸 느낀 경험을 얘기하다가 '작가는 무엇으로 몰락하는가'라는 질문을 하필이면 이 시점에 던진 게 굉장하다고 생각했어, 진짜로.

성자 이 질문 왜 던진 거야?(기억이 안 남*-*)

맹자 자기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던 기억이 있는 거야. 그런데 그 게 파괴된 거지. 본인의 예술관이며 모든 게 그 기억에 의지하고 있었는데, 그 게 별 거 아닌 일로 무너졌을 때 작가는 의지할 대상을 잃어버린 거지. 예술관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이 질문이 여기서 나오는 거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적어 놨는데, '이상적이고 의미 있던 아름다운 기억의 파괴라는 상황 때문에 작가는 몰락한다'고 생각했어. 답이 내려져 있는 상황에 질문을 했다는 거지.

성자 이 게 스탕달 얘기지? 근데 나는 여기가 잘 기억이 안 나기는 하지만, 여기 보면 ‘그는 한동안 마비되어 꼼짝도 않은 채 타오르는 불길이 자신의 몸마저 집어삼켜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면서, 그 몰락하는 과정을 온전히 겪은 거잖아. 아름다운 기억이 다 파괴되는 걸 끝까지 목격하고 받아들이고 나왔는데, 이 질문을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면서 하고, 이 질문을 이후 수십 년 동안 작가로 살면서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고 한 거잖아.

맹자 응, 나는 이 질문이 부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이 질문이 스탕달이라는 사람의 문학관이 된 거잖아. 이제. 때문에 몰락을 한 번 해야지, 몰락을 한 후에 작가가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어.

성자 아... 그러네.

맹자 더 과장하자면, 갖고 있던 아름다운 기억이라는 게 기억으로만 간직되지 않고 기억들이 파괴되는 순간에 그 걸 포착해서 그 질문을 떠올리고,

성자 거기에 대한 답을 찾아 가는 게 작가의 과정이다?

맹자 그렇지.

성자 나중에 어떤 공연장 갔다가 거기서 불이 나고 무대가 무너지고 이런 장면이 나오는데, 그 게 실제인지 상상인지 아예 구분이 안 가는 부분이 있어.

용자 그거 말고도 실제인지 상상인지 구분 안 가는 부분 많았지. 읽다가 ‘언제 바뀌었지?’ 한 것도 많아.


특히 관광명소를 찾았을 때는 엄청난 실망감 이외의 다른 감정을 전혀 얻지 못했고, 차라리 방에서 지도와 기차 시간표를 들여다볼 때가 훨씬 더 좋았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시작도 끝도 없는 단편적인 이야기들, 그러므로 인간이 스스로 추적해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이야기들의 조각(신문 기사를 보며)

성자 이렇게 일상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아.  아, 여기도.


그는 남부 철도의 좁은 객실 구석에 홀로 앉아 족히 열두 시간을 보낸다. ... 그 자신도 영문 모를 일이지만, 몸을 거의 1밀리미터도 움직이지 않고 꼼짝없이 있었음에도 K 박사는 그날 밤 아홉 시 십분 실제로 트리에스테에 있게 된다.


내가 여행하며 생각했던 거야. 나는 기차 안에 가만히 있는데, 몇 시간 지나면 지도 상 여기에서 저기까지 가 있는 게 신기했어 항상.

용자 나도 교환학생 끝나고 한국 돌아올 때, 6개월 간 떠나 있었으니 돌아올 때도 6개월이 걸려야 할 것 같은데, 그냥 슝 와버리니까 이상했어. 통째로 들춰내진 느낌. 그러니까, 나는 이런 공감대는 좋은데, 이 게 서사성을 갖췄으면 더 좋았을 거란 말이지.

맹자 근데 내 생각에는, 우리가 좋다고 얘기하는 부분들이, 이 책이 서사성을 갖췄다면, 주목받지 못했을 거 같아. 물론 문학마다 다르겠지만 서사성은 어떤 목적을 따라 가는 거잖아 기승전결에 따라서, 그 목적을 향해 가다 보면은, 물론 그 와중에도 이런 좋은 문장들이 있겠지만

성자 난 잘 팔렸을 거 같은데 훨씬ㅋㅋㅋㅋ

용자 난 괜찮을 것 같은 게 무의미의 축제 정도만 돼도 그렇게 안 읽히진 않잖아.

성자 근데 난 무의미의 축제는 무슨 얘긴지 더 몰라ㅋㅋㅋㅋㅋ

맹자 그건 나도 그랬어.ㅋㅋㅋㅋ

성자 나는 진짜 답답해. 나는 쿤데라가 너무 좋은데, 아직도 설명을 제일 못 하겠어, 왜 좋은지. 밀란 쿤데라 자체를.

맹자 밀란 쿤데라 소설이 서사성이 중요한 소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거든. 그걸 알고 있는 채로 읽잖아. 제발트 경우에도 우리가 애초에 '아 이거는 서사가 중요한 게 아니구나'하고 읽다 보니까 좋은 문장들에 눈이 가는 거지. 더 작은 부분에도 공감을 크게 하게 되고.

용자 쿤데라가 서사성이 더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나도. 다만 비슷한데도 무의미의 축제는 아주 잘 읽혔거든. 그래서, 그 정도의, 아주 얕은 서사성이라도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았을 거 같아서@ㅠ@

성자 그랬으면, 지금 제발트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다른 무더기의 사람들이 제발트를 좋아했을 것 같아.

용자 이렇게 쓸 거면 에세이로 쓰지 이런 생각ㅋㅋ

맹자 그 질문은 결국 여기로 오네. 이 게 소설인가?

성자 그리고 에세이도 냈어




소설 쓰기에 대한 소설

성자 묘사는 좋아. 근데 두 번째 부분에 기독교적인 부분이 계속 나오는 데서 나는 잘 상상이 안 되더라. 나는 종교 바보니까ㅠㅡㅠ 뭔가 내가 모르는 종교적인 얘기가 있나 했어. 두 번째 단편에서.

맹자 인상 깊었던 부분! 81페이지에



1980년 10월의 마지막 날 탔던 빈발 베네치아행 야간열차에서는 뉴질랜드 여자 교사 한 명 이외에 다른 승객을 거의 보지 못했지만,

이 게 아직 중반도 안 읽었을 때라 그렇게 느낀 걸 수도 있어. 이 책이 소설 쓰기에 대한 소설이라고. 화자는 열차에 탄 여자가 교사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 그녀와 얘기를 하지 않는 이상. 이 사람이 수학 교산지 국어 교산지...

성자 뉴질랜드 사람인지

맹자 뉴질랜드 사람인지 조차도 알 수가 없어. 즉, 이 묘사는 추측이다. 화자는 기억과 사실이 다르지만 이는 불가피하며 이러한 왜곡 자체가 삶이기에 그 서술은 정당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지금 이 묘사도 이러한 삶의 진실에 대한 통찰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내가 내 삶에서 그녀를 뉴질랜드 여자 교사라고 생각한다면, 그녀는 내 삶 속에서 그런 것이다. 이 부분에서 처음 이런 인식을 했어. 진짜 좀 희한했거든, 뉴질랜드 교사인지 대체 어떻게 알겠어.

성자 빈발 베네치아 행 열차 탔었어. 일곱 시간 반 동안. 그 기억을 잡고 제발트를 읽었어

빈발 베네치아행 열차에서 내내 본 풍경 by. 성자



맹자 123페이지에 살바토레가 나오잖아. 광장으로 나가자 살바토레는 이미 약속 장소인 바에 도착해... 책을 읽고 있었다. 살바토르가 화자의 상상 맞지?

성자 헐, 걔 여기서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이지.

맹자 그러니까. 얘를 계속 생각했어. 얘가 앞에 나왔었나?

성자 내가 어제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걸렸던 게 이거야. 얘 없어질 때도 그냥 없어져.

용자 지쳐 이런 거!! 내가 못 보고 지나쳤나 싶고.

성자 여기 1912+1 얘도 중요한 요소일 텐데. 이 장소 전체에서 일어난 일이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어.

맹자 더 헷갈린 이유는, 실제 있는 인물을 왜곡해서 쓴 건지 아예 창조한 건지 헷갈리더라고. 헷갈리면서 흥미로운 부분.

용자 한 번 더 읽어야겠다ㅋㅋㅋㅋ

성자 나는 장소 별로 만난 사람 정리해가며 읽으려고.

맹자 그리고 140페이지.

성자 140페이지에서 어딘지 맞춰 보자.

맹자 실제인지 화자의 상상인지 궁금했던 부분이야 여기도. K 박사가 카프카잖아. 하지만 이 편지 내용만으로 K 박사가 그날, 9월 15일에 호텔방을 떠났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는 없다. 142페이지를 보면 또 이런 게 나와. 우리가 아는 것은 단지 K 박사가 베네치아에서 나흘을 머물렀다는 것, 그런 다음 산타루치아 역에서 기차를 타고 베로나를 향해 떠났다는 사실 뿐이다. 이 걸 보고, 어쩌면 화자가

성자우리는 누구야 그럼

용자 갑자기 확 달라져 화자가

맹자 그러니까. 우리가 누굴 말하는지 모르겠는 거지. 글을 전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둔 장치라고 생각했어. 글쓴이의 상상이 뻗어나가기 위해서 필요했던 거야. 이 걸 찾으려고 했어 편지를ㅋㅋㅋㅋ 실제 카프카가 편지를 남긴 건지 어쩐지.

용자 ~라고 썼다-라는 인용이 많은데,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는 거지 이제는.

성자 대사를 칠 때 따옴표를 안 써, 모든 부분에서. 그냥 줄글로 계속 가.

맹자 기억이라는 걸 강조하려고 그런 거겠지.

성자 대화 당시 상황을 제시하지 않고, 들은 기억을 옮기는 거야.


어째서 그토록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그 일뿐만 아니라 때때로 어떤 특정한 사물이나 광경을 마주하면 큰 감동의 물결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는데, 도대체 어떤 점이 감정을 그토록 뒤흔드는 것인지 스스로도 설명할 길이 없다.

맹자 나는 뭔가 이상한 감동이랄까... 포근함 같은 게 느껴지는 장소가 이마트같은 장소거든.

성자 갑자기 너무 2015년 한국이다.

맹자 이마트나 홈플러스! 이상한 감정이 있어 그런 데 가면. 설레는 것도 아닌데,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나.

성자 나는 여기서 작가가 스스로 설명할 길이 없다고 한 게 좋아. 왜냐면 나도 계속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거든. 그래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은 모르더라도,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은 서로 아니까, 위안이 됐어. 안심이 됐어.

맹자 옛날에 살던 집 마당에 포도나무가 있었어. 대문부터 포도나무까지 사실 1미터나 될까 말까인데, 그리로 통하는 공간이 어린 내게는 거의 차원이 바뀌는 공간으로 다가왔어. 거긴 창고 같은 곳이라 깨진 유리나 자전거를 놓던 통로인데, 기억 속에는 짙은 초록색이야. 실제로 초록색은 전혀 없었는데도. 그리고 엄청 길다고 기억하고. 신비롭고 괴기스러운 기분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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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포도나무에 대한 좋은 기억은 없어. 포도나무가 옆집으로 가지를 뻗으니까 옆집 아저씨가 어느 날 가지를 싹둑 잘라 버린 거야. 자기 포도나무도  아닌데(어이없음) 그래서 나무는 그냥 죽었어.

성자 여기 나오네. 아까 생생하게 되살려 그린 그림 아래 ‘우리가 알다시피 사실과 기억은 전혀 다르다’


그럼, 제목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참. 쉼표가 아니네. 마침표네. 이제 보니까. 「현기증. 감정들」


성자 현기증... 내가 이런 문장이 계속 생각나거든 머릿속에서. ‘나는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근데 찾아봐도 인터넷 무협지 같은 데만 나와. 근데 비슷한 게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무진기행 마지막 문장. 그것 때문에 헷갈리는 건지.

맹자 듣자마자 무진기행이 떠올라

성자 현기증이란 단어가. 익숙하단 말야. 어디서 본 거지

맹자 화성인 바이러스ㅋㅋㅋㅋ

성자 라면?ㅋㅋㅋㅋ

맹자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사실 브런치에 이 책에 관해 쓰면서 그 짤을 올려야 하나 생각했어.

성자 왜 현기증이라고 붙였을까 제목을.

맹자 현기증이, 엄청 묘한 단어야, 내게는. 숭고라는 단어는 내가 읽은 책들에서는 거대한 걸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감정이란 말야. 파도 같은 걸 마주했을 때, 거대 자연이 나를 덮칠 것 같은 두려움 같은 게 숭고하다에 포함된단 말야. 그래서 숭고하다는 말에는 타자와 나라는 존재의 괴리가 전제돼 있지. 얘랑 나는 다른데 다른 존재가 나를 덮치려는 것에 대한 감정. 그런데 현기증은 어떤 복잡하거나 거대한 걸 목격했는데, 그 거대한 거에 내가 동질감을 느끼는 감정이라고 봐. 거기서, 내가 타자화하는 상태에서 나는 사실 타자가 아닌데, 내가 타자화하며 그 대상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 거기서 느껴지는 어지러움이 내게는 현기증이야. 묘한 단어야. 제목도 그런 의미라고 봐.

성자 현기증은 나한테는 더 작아. 사람들은 현기증을 느끼고 싶어 할 때가 있어. 쉽게 말하면, 어렸을 때 한 여름에 운동장  조회하면 쓰러지는 애들 있잖아.  한두 명씩. 나는 절대 그런 연약한 소녀는 못되었지만 가끔은 쓰러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단 말야. 유혹이지. 작게는 유혹에서 크게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아 쓰러져버리고 싶다- 이게 현기증이야 나한테는

맹자 내 식으로 하면 나는 사실 쓰러지지 않아도 돼. 근데 쓰러진다는 상황은 나와 다른 상황인데, 그 타자에 동일시를 하게 되면 현기증이 이는 거지.

성자 유혹이 강해. 현기증이 스스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내가 현기증을 느끼고 싶어서 불러낸다. 정신을 놓고 싶어서.

맹자 그건 한편으로는 그 단어가 갖고 있는 문학성에서 기인하는, 그 외연에 위치한 경외감에서 비롯한다고 봐.


성자 글로 정리하면 뭔가 보일까.

맹자 이건 정리할 수 없어. 이 책을 읽고 정리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인 것 같아. 제발디언이 되느냐 안 되느냐.




제발트처럼 쓰고 싶다

맹자 정말 이렇게 쓰고 싶다.

성자 그걸 여전히 모르겠어. 제발트처럼 쓰고 싶다는 말에는 설명이 더 필요해. 어떻게?

맹자 이 책을 읽으면 자유를 느끼거든. 글을 자유롭게 쓴다고 독자가 거기서 자유를 느끼진 않아.

성자 배수아처럼 안 쓰고 제발트처럼 쓰고 싶다?

용자 자유를 느낀다는 것도 모호한 말 아냐?

맹자 자유도 맞는데, 해소가 더 적합하다. 서사성에 대한 욕구를 해소하는 것. 문학작품이라고 해서 반드시 서사성이 필요할까?를 깨닫게 해줘서. 자유로워졌어 내가. 문학이, 소설이, 서사가 없어도 작품성 있는 소설이 있다는 걸 단연코 증명하는 책이니까.

성자 그 관점에서 봤을 때 걸리는 게 하나도 없는 게 말한 대로 굉장한 거네. 작품이란 게 어떤 방향성을 추구해도 뭔가 아쉬운 게 보이잖아. 그냥 학생인 우리 눈에도. 근데 이 책은 없어. 그러니 좋은 책이겠지.

맹자 이 책은 가까이서 보아도, 가까이서란 내용이나 문장에 줄 칠 것들이 많은 것, 멀리서 봐도 형식이나 서사 구조 측면에서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좋아.    

성자 이건가? 너 이 사람이 의도한 대로 잘 썼다고 생각하지? 그걸 하고 싶은 거지?

맹자 어, 맞아.

용자 나도 이 사람이 의도를 안 했고, 뭐 갑자기 운이 좋아서 이렇게 썼다고는 생각 안 해.

성자 의도가 제대로 발현되기가 엄청 힘들잖아 사실. 우리 주변만 봐도. 그런 측면에서 나는 쿤데라처럼 쓰고 싶어. 쿤데라는 더 재밌거든. 약간의 세속적인 느낌이 있어.

맹자 P가 떠오르기도 했거든

용자 맞아 진짜

맹자 내가 P 글을 읽으며 좋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어.

성자 근데 또 이 게 배경이 한국이면, 잘 읽혔을 거야.


용자 이 책이 직관적으로 읽히진 않잖아. 너무 직관적이면 사람들이 유치하다고 느끼지만, 균형을 맞추는 것도 중요해. 삐딱하게 보자면 이 사람은 막 쓴 건데 우리가 괜히 과잉 해석하고 좋게 봐주는 걸 수도 있어. 일부러 찾고 막. 제발트가 아니더라도 이런 식의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실험적으로 막 썼어 근데 한 평론가에 의해 호평 얻고 유명해질 수도 있잖아. 왜냐면 메시지가 직접적이지 않아서 해석의 폭이 넓어지니까.

맹자 그것도, 나도 항상 고민하는 거야. 생각 없이 쓴 건데 만약 그거에 대한 해석 때문에 그게 유명해진 거라면, 만약 제 삼자, 모든 걸 다 아는 전지전능한 시선이 있어서 그 작가가 이 책을 예술적 의도나 추구 없이 썼다는 걸 알아. 근데 비평가들 때문에 엄청 유명해졌어. 그러면 이 걸 문학성이 있다고 해야 하냐는 거지. 일단 나는 문학성이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 사실을 안 다음에는 문학성이 훼손된다고 봐.

성자 그거 예술 전체로 얘기할 수 있잖아.

맹자 단순히 '이건 그냥 예술이잖아'라는 말로 합리화할 수 있을까?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모든 걸 해석에 방점을 뒀지만, '그냥 해석하면 되잖아. 독자가 받아들이기 나름이잖아'는 예술성의 지속을 따져봤을 때 옳은 건가? 하는 고민이야. 그럼 문학이랑 페이스북 글은 뭐가 다른 걸까? 그런 생각까지 가는 거지.

성자 해석의 여지가 최고라고 본다면?

맹자 응. 원숭이가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을 비평가들이 좋게 해석을 하고, 유명 화가가 그렸다고 거짓말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성자 예술에 절대적인 퀄리티가 나는 있다고 생각해.

맹자 아직 있다고는 생각 안 해 나는

성자 아 근데 나한테 절대성이 있다고 해봤자 내  기준일뿐이니 취소.

용자 요즘엔 뭐든 절대적인 게 너무 없어. 시대성인가.

성자 어떤 평론가가 극찬을 해서 사람들이 좋다고 하다가도 시간이 지날수록 제대로 평가받기는 할 것 같은데

맹자 근데 그런 자연법칙 같은 건 모호하다는 거야. 한편으로 지금까지 좋게 평가받는 것들 중에도 그런 게 있을 수 있다고도 생각되니까.

성자 우리가 실제로 모르니까.

맹자 그치. 사실 이 문제는 글 쓰고 읽는 차원을 넘어서는, 신이 되어야 하는 거니까.

성자 역으로, 고흐인지 고갱인지 한 평론가에 의해 확 뜨게 됐다고 하잖아. 그러면 ‘아 그거 평론가 한 명 때문에 비싸진 거야'하고 폄훼받는 경우도 있으니까. 절대성을 규정할 수 없는 한은.

맹자 엄청 많이 팔렸고 문학성이 좋다고  평가받는 작품이 있다고 쳐.

용자 신경숙이라고 해 그냥

맹자 그래. 이미 문학적으로 높다고 평가를 받았어. 근데 추후에 표절임이 밝혀지거나, 아니면 대필이라고 밝혀지면, 우리는 기존에 했던 문학적 판단을 철회해야 할까? 아니라고 생각해.     


용자 성석제 투명인간도 그래. 초반 묘사가 너무 길고 상세해서 50페이지까지 가기가 힘들어.

맹자 서사성이 짙고 하나의 목적을 향해 가는데도 초반에 진짜 안 읽히지.

용자고래도 그렇지 않아?

맹자 맞아 고래도 초반에 안 읽히다가 50페이지 넘어가면 진짜 이건 미쳤어.

용자 엄마가 고래 읽더니 이건 무슨 판타지야! 상상력은 인정한대. 그러고 끝ㅋㅋㅋㅋ

성자 그런 작가들이 절실해. 우리도 한국 현대 소설 계속 시도했었잖아. 젊은 작가들. 근데 실패한 거에 원인을 찾았어. 상상을 하다가 말아. 상상력의 폭이 너무 작고 꼭 현실에 한 발을 질척거리게 담그고 있어.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얘기를 책에서 똑같이 하고 있는 거야. 젊은 사람의 고민을 쓰더라도, 소세키처럼 1900년대 초 일본이나, 우리 근대 소설들처럼 전쟁을 겪거나 한 시대라면 내가  그때로 슉 가잖아. 아주 다른 시대를 살면서도 인간의 본질적인 고민은 공감되니까 재미를 느끼는데, 요즘 작가들은 맨날 내가 보는 것들, 카페에서 보는 풍경과 단상

맹자 카페에서 글을 쓰니까ㅋㅋㅋㅋ

성자 그러니까 궁금하지도 않고

맹자 그런 거에 염증을 느끼니까 한편으로는, 답을 정하는 걸 나는 정말 싫어하는데, 대안을 내놓는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대부분의 한국 작가들은 젊은 소설가들은 그 전에 멈춰. 상상을 하고 대안이나 답을 안 찾아. 질문만 던져 놓고 ‘야 너 근데 이런  생각해봤어? 나도 해 봤어’ 그냥 이렇게 끝내는 거야.      


용자 문장이 너무 길어.

맹자 나는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 10시부터 12시까지(군인). 어디서 끊어야 할지 곤란했어.

용자 책을 읽다가 대충 이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부분에서 끊어야겠다 하잖아. 한 큐에 다 읽을 수는 없으니. 근데 이 건 그 게 없어. 어디서 끊더라도 다음에 기억나지 않을 것 같은 불안함만 있어.

맹자 그런 게 독서 경험 측면에서 어려웠어.

성자 내가 유럽에 살았고 스탕달이나 카프카의 삶을 더 알았다면 진짜 잘 읽히지 않았을까. 한국  걸로 생각해 봐. 스탕달 대신 김승옥 나오고 이랬어봐. 나 완전 팬 됐을 걸.                    


(용진이 제주도 가는 이야기)

맹자 우리 13일에서 18일 사이에 다음 모임 해(2016년 1월 성인챇방)

용자 왜케 빨리 해? 군인 아님? 여하튼 여기 스카이프 틀어놓고 해. 넌 어떻게 생각해?

성자 어쨌든 너 제주도 간 다음에 일정 다시 정해. 책은 벌써 정했어. 로맹 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용자 「죄와 벌」은 왜 3월로 밀렸어?

맹자 아니 사실은 제발트 한 번 더 하자고 하려 했지.

성자 아냐. 너 혼자 해.

맹자 근데 오늘  얘기해보니까, 된 것 같아.

용자 나는 이거 한 번 더 읽을게.

성자 그것도 너 혼자 해.






성인챇방

2015년 12월.    






#차이코프스키와 톨스토이

라흐마니노프와 도스또예프스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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