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18년 떨어져 지내서요,
어떤 엄만지 아직도 몰라요.
엄마가 한국으로 떠나던 2003년 그날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엄마와 함께 한 날이 있었나 싶다. 너무 어릴 때라 잊어버린 걸까, 아니면 정말로 엄마가 곁에 없었던 걸까.
2007년 어느 날, 엄마가 돌아왔다. 키가 멀대같이 큰 아저씨와 벌써 셋이나 생긴 동생을 달고.
뜻밖의 가족을 맞닥뜨린 건 조슈아(가명, 당시 11세)뿐만이 아니었다. 멀대같이 큰, 나중에 조슈아가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남자도 그때 조슈아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니 엄마 거짓말했어. 너 필리핀으로 가!"
시간이 흘러 조슈아가 한국에 온 지금,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조슈아를 향해 윽박지른다. "키워야지 뭐 어쩌겠어"하고 데려올 땐 언제고.
조슈아(현재 21)는 1997년에 필리핀 마닐라에서 태어났다. 19살이 된 2015년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엄마가 한국에 있으니까, 엄마랑 같이 살고 싶어서.
"엄마랑 18년 떨어져 지내서요, 어떤 엄만지 아직도 몰라요. 배신감이랑 사랑하는 느낌만 남았어요. 제 생각에는요, 엄마 옆에 있으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어요. 그거밖에 없어요."
결혼이민자가 한국인과 재혼한 이후에 본국에서 데려온 자녀, 혹은 국제결혼가정 자녀 중 외국인 부모의 본국에서 성장하다가 입국한 자녀를 중도입국자녀라고 한다. 말하자면 조슈아는 엄마가 밖에서 낳아온, 저 남쪽 바다 건너에서 낳아온 아들이다.
다문화가정 자녀는 국내에서 출생한 경우, 중도입국자녀, 외국인가정 자녀로 세분된다. 2016년 현재 보은군 관내에는 초등학교에 182명, 중학교에 33명, 고등학교에 26명 총 241명의 다문화가정 자녀들이 다니고 있다. 일반학생 2,874명 중 8.4%를 차지하며 충북 도내 1위다. 전국 평균은 1.3%다. 물론 취학 아동만 집계한 결과다.
241명의 아이들은 전부 국내 출생 자녀다. 중도입국자녀와 외국인가정 자녀는 한 명도 없다. 조슈아는 제천으로 학교를 다니므로 보은군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관내에서 인구통계학적으로 소수자 중의 소수자다.
2003년에 한국으로 시집간 엄마는 13년 만에 아들을 초청했다. 조슈아는 "엄마와 18년 떨어져 살았다"고 말했다.
헤어짐의 기록
1996년, 조슈아의 엄마 알린 이 올란데즈(당시 24)는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첫사랑을 만났다. 아빠는 엄마가 일하던 출장 뷔페 업체의 납품관리자였다. 아침마다 얼굴을 보다 눈이 맞았다.
당시 회사 기숙사에서 살던 엄마는 아빠와 함께 살고 싶었다. 둘은 마닐라 시내에 집을 구했다. 몇 개월 동거를하니 아이가 생겼다. 엄마는 그 시절을 회상할 때면 늘 "스물네 살이니까 그런 거야"하고 덧붙인다.
이듬해 조슈아가 태어났다. 엄마, 아빠와 같이 산 시간은 단 3개월이다. 3개월 만에 엄마는 짐을 쌌다. 아빠가 유부남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처음엔 몰랐다. 조슈아를 가졌을 무렵 알았다. 아빠는 트럭을 몰고 몇 주에서 몇 개월씩 필리핀 전역으로 출장을 다니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딴 살림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을 털어놓는 엄마에게 외할머니는 "너 당장 와! 뭐 하고 있는 거야?"하고 수화기 너머로 호통을 쳤다. 그렇게 엄마와 조슈아는 떠났다. 필리핀은 7,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최북단 마닐라에서 엄마의 고향인 최남단 타굼까지, 차를 타고 꼬박 3일을 달리는 동안 엄마는 가슴이 닳아 없어지는 듯했다.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지만 엄마는 그 뒤 딱 한 번 아빠에게 편지를 썼다.
"도와주세요. 아기 우유가 없어. 나는 어떻게 하라고."
답장은 이렇게 시작했다.
"야 이 미친X아!"
아빠의 와이프가 편지를 읽은 거다. 엄마도 욱했다.
"나 미친X 아니야. 당신 남편 나쁜 남자야! 당신 남편 거짓말 했으니까 당신이랑 당신 남편 벌 받을 거야. 나는 몰랐으니까 벌 안 받아!"
편지를 몇 번이나 주고받으며 싸웠다. 아빠가 그 사실을 알았는지는 모른다. 그 언쟁 이후로 아빠와 엄마는 일절 연락하지 않았다.
조슈아가 태어나 첫 번째로 이별한 사람이 아빠였다. 두 번째도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타굼에 있는 외할머니 집으로 돌아온 지 한 달 만에 엄마가 떠났다. 하우스 메이드 일자리를 구해서 근처 도시로 간 것이다. 엄마는 돈을 벌어 집에 보내는 일이 자기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조슈아의 얼굴에 겹치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도 했다. 엄마는 젊었고, 억울했다.
조슈아가 가진 엄마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2007년의 일이다. 한국으로 시집갔다던 엄마가 필리핀에 온다고 했다. 조슈아는 외할머니와 함께 타굼 집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다바오(Dabaw)국제공항에 마중 나갔다. 엄마를 보자마자 외쳤다.
"마마(엄마)!"
엄마가 이상했다. 조슈아를 안아주지 않았다. 아니, 아예 모른 척 했다. 조슈아는 공항에서부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울었다.
조슈아의 엄마 알린 이 올란데즈(45)는 이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2007년에 처음 갔을 때, 나는 걱정됐어요. 왜냐면 나 신랑한테 아이 있다고 말 안 했으니까. 그래서 다바오시티 공항에 조슈아 기다렸는데, 아무 것도 안 했어요. 안아 주지도 않고.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그래서 우리 아들 집에 올 때까지 엄청 울었어요. '엄마가 다른 가족 생기니까 나 필요 없어졌나 봐' 생각했대요. 그래서 나는 '미안해 아들, 엄마가 못 봤어' 이렇게 거짓말했어요. 우리 둘 다 엉엉 울고, 조슈아가 '괜찮아'해서 그때 아들 마음이 풀렸어요."
엄마가 다른 가족 생기니까
나 필요 없어졌나 봐
공항에 마중 나온 아들을 못 봤다는 엄마의 말을 아들은 믿었을까? 조슈아의 대답은 사뭇 다르다.
"엄마 필리핀 왔을 때, 일주일 동안, 그때 저랑 엄마 사이 안 좋았어요. 왜냐면 제 마음 아파요. 18년 떨어져 있었는데. 엄마 두 번 밖에 필리핀 안 왔어요."
엄마는 2003년 한국으로 떠날 때 가족 중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2007년에 한 번, 2013년에 한 번 짧게 친정에 다녀갔다. 엄마 처지에선 이것도 감지덕지였다. 2007년에는 한국여성재단에서 보내주는 친정방문사업에 선정됐고, 2013년엔 오송뷰티박람회에서 열린 노래자랑에서 상을 타서 농협충북지부의 지원을 받아 다녀왔다. 자력 고향행은 여전히 꿈꿀 수 없다.
조슈아는 자라는 내내 엄마가 미웠다. 한 달에 한두 번 걸려오는 국제전화도 조슈아는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래도 그리운 마음이 더 컸다. 엄마랑 함께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다.
2015년 4월, 한국인 새아빠의 초청을 받아 조슈아가 한국에 들어왔다. 엄마는 조슈아를 진작에 데려오고 싶었다. 2009년에 열세 살이던 조슈아를 초청했지만,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 한 번 반려된 사람을 다시 초청하려면 3년을 기다려야 했다. 2013년에 다시 한번 아들을 초대했지만 역시 비자는 불발됐다.
그러다 2015년, 마음을 돌린 남편이 조슈아를 초청했다. 그러자 단박에 비자가 발급됐다. 그 전까지 남편은 조슈아 얘기만 꺼내도 불같이 화를 냈다.
"남의 새끼를 내가 왜 키워?"
엄마는 그럴 때면 할 말이 없었다. 그냥 몰래 신청하고, 그러다 비자가 나와서 조슈아가 한국에 오면 그다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는 심산이었다.
조슈아는 한국에 처음 온 날을 기억한다. 2015년 4월 18일, 그날은 추웠다. 겨울을 겪어본 적 없는 그에게 한국의 4월은 뼈가 시리게 쌀쌀했다.
조슈아가 찍은 한국의 겨울. 조슈아의 SNS엔 유독 겨울에 찍은 사진이 많다. ⓒ 조슈아
"저 혼자 인천까지 왔어요. 인천에서는 엄마랑 보은으로. 버스 타고. (보은까지 오는 동안) 엄마랑 말 안 했어요. 처음에 부끄러웠어요."
그날도 아빠는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안방에서 TV를 보며 소주를 홀로 따라 마시는 모습은 그날 이후 매일 반복됐다.
할머니도 아빠도 조슈아에게 잘해줬다. 알린도 조슈아도 "친손자보다 더 좋아한다"고 인정한다. 왜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밥 해주니까."
한국에 오자마자, 한국말도 전혀 할 줄 모르는 조슈아는 새로 생긴 할머니와 아빠의 식사를 챙겼다. 쌀밥에 김치찌개 끓이고 '이거, 이거' 같이 볶고(조슈아는 그 음식의 이름도 모른다). 그냥 눈치껏 배운 대로 한국 음식을 한 상 차려 냈다.
밥만 하면 다행이다. 조슈아는 종일 취해 있는 아빠 대신 농사일을 거들었다. 논에 물 대고 밭에 말뚝 박고, 엄마와 둘이서 일을 하고 돌아오면 집안은 늘 난장판이다. 몇 해 전부터 아빠는 술을 먹은 날이면 자면서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괄약근이 약해졌는지 매일 밤 전쟁이다. 그 오물을 치우고 이불을 빠는 일도 조슈아와 알린 두 사람의 몫이다. 바다 건너 남쪽 섬에서 온 모자가 매일 밤 한국 노인의 똥을 치우며 산다.
한국에 와서 여행한 적이 있냐는 물음에 조슈아는 고개를 젓는다. 뒷산에 올라 독수리봉을 보는 것도 기자와 동행한 그 날이 처음이었다. 그래도 외국에 온 건데, 스물한 살이면 한창 호기심도 많을 나인데 답답하지 않냐는 질문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독수리봉에 오르는 길. 막내아들은 앞서간다. 지그재그로 뛰어다닌다. 엄마는 큰아들에게 이런저런 말을 붙여 보지만, 큰아들은 아직도 엄마가 어색하다. 그저 앞만 보고 고개만 끄덕거린다. 그래도 나란히 걷는다. ⓒ 김성인
조슈아가 사는 마을 뒷산 정상에서 보이는 풍경. 사진 가운데 튀어나온 봉우리가 독수리봉이다. 이 숨은 비경을 보기 위해 주말마다 등산객들이 마을을 찾는다. 조슈아는 첫 인터뷰 날, 한국에 온 지 2년 만에 처음 뒷산에 올랐다. ⓒ 김성인
조슈아는 올해 3월, 제천에 있는 한국폴리텍다솜고등학교(이하 다솜학교)에 입학했다. 다솜학교는 다문화가정 자녀들을 위한 대안학교다.
전교생 134명 중 한국에서 나고 자란 다문화가정 자녀들이 30%, 조슈아와 같은 중도입국자녀의 비율이 70%다. 학생들의 국적은 한국, 중국, 몽골, 베트남, 일본, 필리핀, 러시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까지 총 9개 나라다.
국적만큼 나잇대도 다양하다. 청소년기를 지나 입국한 중도입국자녀 중엔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이도 있다. 언어도 문화도 전혀 다른 나라에서 한두 해 공백이 생기는 일은 허다하다. 조슈아는 한국 나이로 21살이지만, 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현재 다솜학교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학생은 95년생, 22살이다.
조슈아는 방과후엔 늘 농구를 한다. 얼마 후 있을 대회 준비로 한창이지만, 금요일엔 친구들이 다 집에 가고 조슈아 혼자 남는다. 조슈아가 농구하는 모습을 촬영한다고 했더니 몽골에서 온 3학년 형이 '옷이 그게 뭐냐'면서 급히 학교 유니폼을 가져와 갈아입혀주었다. ⓒ 김성인
더 큰 병원으로
가 보셔야겠어요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다솜학교에서는 주말마다 집에 갈 수 있다. 조슈아는 입학하고 딱 한 번 집에 내려왔다. 학교에서 2주간의 특별 휴가를 보내준 것이다. 포상 휴가였으면 좋으련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담임선생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지난 5월 말이었다. 건강검진을 했는데 결핵이 의심된다고, 큰 병원에서 정확히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큰 병원'이라는 게 어딘지 엄마는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국민건강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조슈아의 병원비도 걱정이었다. 조슈아는 한국 국적을 딸 목적으로 F-1(방문동거) 비자를 받아 입국했다. 현재 외국인 신분이지만 지역가입자로 국민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의료 수급 대상인 가족들은 그동안 건강보험에 관해 신경 쓴 적이 없다.
지난해 조슈아의 치과 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았을 때 치료비가 100만 원 넘게 나온 적이 있다. 10개월 분납으로 어찌어찌 해결한 엄마에게 간호사들이 당장 아들 건강보험에 가입시키라고 했다. 엄마는 읍내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찾았다.
2015년 4월 입국한 때부터 한 달에 8만 원 정도씩 총 100만 원 가까운 돈을 일시납부하면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고 들었다. 엄마는 당장 100만 원이 없어 가입을 미뤘다. '나중에 조슈아가 돈 벌면 해도 되겠지, 설마 그동안 크게 아프겠어?'라고 생각했다.
그때 어떻게 해서라도 가입을 해 놓을 걸, 엄마는 매일매일 후회한다. 1년이 지나 누적 보험료는 200만 원을 넘었고 엄마에겐 그 돈 나올 데가 없다.
막막한 심정으로 늘 그래왔듯 보은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찾았다. 센터에서는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을 연결해줬다. 서울적십자병원 희망진료센터에서는 다문화가족, 이주노동자, 의료 소외계층에게 의료비를 지원하고 있다. 적십자병원에서 CT 검사를 받고 또 며칠을 기다렸다. 그동안 조슈아는 엄마를 도와 고추밭에서 풀을 뽑았다. 아버지는 결핵 옮는다며 동생들과 수저도 같이 못 쓰게 했다.
아파서 휴가를 받아 내려온 큰아들은 종일 밭일을 한다. ⓒ김성인
6월 16일,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 병원 예약은 오후 한 시였지만 조슈아와 엄마는 이른 아침 보은 집을 나섰다. 청주에서 오전 9시 버스를 타니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시각은 정확히 10시 반, 아직 예약 시간까지는 한참이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서대문에 있는 서울적십자병원으로 향했다. 10여 분 택시를 타는 동안 넉살 좋은 엄마는 금세 택시 기사와 친해졌다. 국제결혼에 관심 있다는 기사의 말에 금세 사촌 동생과 소개팅을 주선했다. 장난삼아 한 말이 아니었다.
결혼이주여성들은 매파가 되어 또 다른 외국인 여성들에게 한국으로의 결혼을 주선한다. 엄마는 막내 이모를 비롯해 벌써 몇 명을 한국으로 데려왔다. 서울, 남양주, 청주, 문경에 그녀들이 살고 있다. 엄마는 따로 소개비를 챙기지는 않는다. 겸사겸사 친정 방문하려고 기회가 닿으면 이 일을 한다. 실제로 브로커가 되는 결혼이주여성들도 적지 않다.
택시에서 한바탕 웃고 병원 앞에서 내렸다. 병원에 도착해서도 엄마는 여유롭다. 병원 회원카드와 예약접수증을 깜빡하고 못 챙기고는 "미안해요. 선생님~ 나 시골 살아서 정신없어~"하고 얼렁뚱땅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서울서는 눈 뜨고 있어도 코 베어 가요."
원무과 선생님은 못 말린다는 듯 예약접수증을 다시 발급해줬다.
진료실 앞 대기 소파로 안내받았다. 자동 신장계를 보자마자 신발을 벗고 키를 재는 조슈아. 영락없는 '고딩'이다. 기자보다 1cm 작게 나왔다고 아까워하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 김성인
예약 시간을 훌쩍 넘겨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만 바라봤다. 이쪽으로는 눈길 줄 정신도 없는지 고개를 자꾸만 갸우뚱했다. 조슈아와 엄마는 애써 긴장을 숨겼다. 꽤 오랜 침묵이 흐른 후 의사가 입을 뗐다.
"더 큰 병원으로 가 보셔야겠어요."
'더 큰 병원'이란 건 한국 드라마에나 나오는 말인 줄 알았는데, 학교에서부터 서울 병원에 오기까지 조슈아는 계속 '더 큰 병원'으로 가라는 말만 들었다.
CT 사진에선 두 개의 멍울이 보였다. 오른쪽 갈비뼈 아래 8cm짜리 꽤 큰 혹과 오른쪽 쇄골 아래 1cm짜리 작은 혹이었다. 그 혹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니 3차 병원으로 가서 혹을 주사로 찔러봐야 한다는 얘기였다. 결핵성 늑막염이면 다행이고, 최악의 경우 폐암이라고도 했다.
한국말이 서툰 조슈아도 진료실 안 분위기에서 모든 것을 읽었다. 밤마다 통증을 호소하던 조슈아는 의사에게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했다. 이제 기침도 안 한다고 우겼다. 걱정이 그의 아픔을 결정했다. 담당 의사는 3층 희망진료센터를 연결해주었다.
"그래도 결핵 아니래. 얼마나 다행이야."
선생님 어떡해요,
우리 돈 없어요
엄마는 진료실을 나오며 애써 밝은 척을 했다. 사회사업담당자를 만나자마자 엄마는 "선생님 어떡해요, 우리 돈 없어요"했다.
3차 병원에서 외래진료를 할 경우 드는 검사비는 최소 100만 원이라고 했다. 남편은 "빚 갚아야 하는데 돈이 어딨어!"하고 서울 다녀올 경비만 주었다.
약 4주가 흘렀다. 조슈아는 여전히 기다리는 중이다. 사정을 알게 된 학교에서도 방법을 찾고 있고, 엄마도 보은군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오가며 고군분투다.
검사 결과를 확인하러 서울 병원에 방문한 날,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정면 전광판에는 예약자 이름이 순서대로 떴다가 지워졌다. 조슈아의 이름은 '올랑데ㅈ %*$'로 표기됐다.
이름 이야기를 하다가 조슈아가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냈다. 한국 이름 지어놨다며 괜찮은지 봐달라고 했다.
조슈아는 영어로 한자 뜻을 검색해서 국적을 따면 개명할 한국식 이름을 지어 놨다. ⓒ 김성인
순박할 순(淳)에 굳셀 건(健), 혹은 공경할 건(虔), 순건.
아버지 박순석, 남동생 박순택, 박순호를 따라 자기도 순박할 '순(淳)'자 돌림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영어로 된 사이트에서 '순박할 순'자에 어울리는 한자를 찾았다.
일주일에 소주 한 짝을 해치우는 아버지, 엄마와 동생들을 못살게 구는 아버지. 조슈아는 그를 꼬박꼬박 아버지라고 부른다. 충청도 식으로 '아부지'하고 구수하게 발음한다. 아부지, 엄마, 동생들, 손자, 할머니, 밥, 술, 농사, 밭, 참깨, 고추..조슈아가 배운 말들이 곧 조슈아의 세계가 됐다.
조슈아의 세계
조슈아가 첫 번째로 만난 세계는 엄마의 세계였다. 엄마와 아부지, 네 동생이 모여 사는 회남면 00리.
두 번째 세계는 집에서 차로 40분 거리인 보은군 읍내다. 한국에 오자마자 다문화센터에서 일주일에 두 번 한국어 수업을 들었다. 같이 듣는 수강생은 대부분 결혼이주여성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근처 배뜰공원으로 갔다. 거기서 한 명 두 명 친구가 생겼다
심심하지 않아요 시골에서?
"심심해요. 그래서 집에 오면 매일매일 나가요. 그런데 일 있으면 못 나가요."
나가면 누구랑 놀아요? 친구 있어요?
"네, 친구 많아요."
어디서 만났어요?
"어떻게 만났느냐면요, 저 (다문화센터에서) 공부 끝나면 농구하고. 또 형님들 있어서 (애들한테) 저랑 같이하라고 말해주고. 다 한국인이에요, 고등학생들. 저기 배뜰공원에서 하고, 일요일마다 보은고등학교에서 하고요."
세 번째 세계는 학교다. 조슈아는 요즘 집보다 학교를 더 좋아한다. 수의사가 되고 싶다던 어렸을 적 꿈은 포기했지만 새 꿈이 생겼다. 사진작가다.
왜 포토그래퍼 되고 싶어요? 언제부터 그런 생각 했어요?
"학교 들어갔을 때요. 여기 학교. 왜냐면 여기 저한테 너무 어려워요. 말 어려워요. 그리고 공부도 잘 이해 안 돼서요. 수의사 하고 싶었는데요 관심 없어졌어요."
그럼 학교에서도 사진 많이 찍어요?
"네. 그 꽃은 여기서 찍었어요. 저기 꽃 있어요."
무슨 사진 찍는 거 좋아해요?
"아무거나요. 제 눈에 아름다워 보여요."
포토그래퍼, 전기기능사, 필리핀에 계신 할머니한테 집 사주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적 따기.
9월 12일이 디데이다. 그날 청주에서 귀화 시험이 있다. 실은 벌써 세 번째 도전이다. 한국 이름도 지어 다 지어놨고 필기시험도 자신 있지만, 면접은 영 불안하다.
국적을 따면 어떻게 살 거냐는 물음에 조슈아는 대답한다.
그럼 나중에 한국에서 계속 살 거예요?
"네."
어떻게 살고 싶어요?
"국적 합격해서요. 여기 사람이니까."
조슈아가 올해 1월 1일에 쓴 새해 소망. '우리 가족에 건강, 제 꿈이 이루어져요. 행복하게 살고 축복 많이 받습니다.' ⓒ 조슈아
한국인으로 살기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해 첫 번째 대답이 '여기 사람으로 살기'다. 행복하게 살 거예요, 돈 많이 벌 거예요, 도 아니고. 태어날 땐 한국인이 아니었지만, 한국인이 될 테니까.
'모국(母國)'이 문자 그대로 '어머니의 나라'라면 조슈아에게 모국은 대한민국일지도 모른다. 조슈아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에도 엄마는 한국에 살았고, 한국에서 필리핀으로 조슈아를 만나러 왔다. 조슈아가 한국에 온 이유도 엄마랑 같이 살고 싶어서다.
3년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조슈아는 보은으로 내려올 생각이다. 그때쯤엔 조슈아가 이 집안의 실질적 가장이 돼 있을 거다. 20년 전, 동생들 학비를 대느라 대학을 그만둔 알린처럼, 조슈아에게도 대학 보낼 아버지 다른 동생이 넷이나 있다.
-
2017. 7.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