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께는 저기 옆집 옥수수밭에 가서 그래유.
"아줌마, 옥수수 따면 우리 좀 줄 거요?" "너를 왜 줘야 하니?" "옥수수밭이 우리 집 옆에 있으니까 나한테도 줘야지요."
이 할미가 민망해 죽겄다니까."
와니다 상시랏(31)의 둘째 딸 민영이는 올해 일곱 살이다. 동네를 쏘다니며 밭일하는 사람들 옆에 가서 말을 붙이는 게 일과다. 일흔아홉 할머니는 말 잘하는 손녀딸이 기특하면서도 낯부끄러울 때가 많다.
다문화가정을 두고 하는 걱정 중 하나가 자녀들의 언어 발달 문제다. 혹시 외국인인 자기 때문에 아이들 말이 늦지는 않을까 결혼이주여성들은 애를 많이 태운다.
충북 보은군에 사는, 민영이의 엄마 와니다는 태국에서 온 결혼이주여성이다.
와니다의 시간
와니다의 고향은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북쪽으로 차를 몰아 7시간여 달리면 도착하는 우돈타니(Udon Thani), 강 하나만 건너면 라오스 땅이다. 그래서 와니다는 라오스 말을 할 줄 안다.
태국은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말레이시아에 둘러싸여 있다. 와니다 뿐만 아니라 국경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옆 나라 말을 할 줄 안다. 트럭 끌고 국경을 넘어 장사를 다니며 자연스레 교류한다.
와니다는 고등학교 졸업 후 일자리를 찾아 방콕으로 떠났다. 농촌 마을인 고향에서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2년쯤 그저 일만 했다. 스물, 스물하나가 그렇게 지나갔다.
'계속 이렇게 사는 건가....'
2008년 봄의 일이다. 이대로 살면 계속 이대로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한국으로 먼저 시집간 당고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모, 나 한국 갈래요.”
김영자의 시간
같은 해 어느 봄날, 와니다의 시어머니 김영자(당시 70)는 산악회 관광버스 안에 있었다. 총무가 마이크를 잡더니 장가 못 간 아들이 있으면 결혼시켜 주겠다고 했다. 목적지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시어머니는 총무를 찾아갔다.
“버스가 서자마자 냅다 갔지. 산악회 총무가 통일교회 목사님이었어유. 외국 처녀랑 결혼할 수 있다는데, 나는 어느 나라인지도 모르고 종이에 이름 적어냈지. 아들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시어머니는 8남매를 낳았다. 그중 아들은 딱 하나였다. 그 귀한 아들이 40이 다 되도록 장가도 안 가고 돈 번다고 객지에 나가 있었다.
“내가 스무 살에 첫째를 낳고 2년 터울로 아이들을 계속 낳았어유. 막내딸이 여섯 살 때 남편이 먼저 갔어. 30년도 더 된 이야기유. 그래도 어찌어찌 다 키웠어. 식당일 하고 밭일도 나가고. 근데 딱 하나 있는 아들이 결혼 생각이 없다니께 속이 터지지.”
와니다의 시어머니 김영자(71)가 집 마당에 앉아 있다. ⓒ김성인
결혼 생각이 없다던 아들이었지만, 선자리 봐준다는 엄마 말에 싫은 기색이 없었다.
그해 여름, 와니다는 홀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교회를 통한 결혼은 생각보다 절차가 간단했다. 남편의 신분증과 여권 사본만 갖고 와니다는 태국에서 혼인신고를 마쳤다. 국제결혼정보업체를 통한 결혼과 달리 남편이 태국에 가서 인터뷰할 필요도 없었다.
“공항에서 딱 나왔는데, 신랑이 꽃 한 송이 안 주는 거예요. 처음 만나서 감동의 순간이 와야 하는데. 그런데 사실은 부끄러워서 얼굴도 잘 못 쳐다봤어요.”
한국에 와서 바로 시댁에서 살지는 않았다. 통일교 교리에 따른 일종의 준비 기간이자, 와니다에게는 적응하는 시간이었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태국인, 일본인 결혼이주여성들 집에서 몇 주씩 살았다.
“그때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웠어요. 문화나 음식 배우고 어른들 모시는 것들이요. 맨날 된장찌개 먹었는데 너무 잘 먹어서 언니가 저더러 살찌겠다고 했어요. 그때 기억 나는 게, 어른 들어오시면 일어나서 인사하고, 나가실 땐 같이 나가서 배웅하고 이런 것들을 배웠거든요. 태국에선 어른이 들어와도 그냥 앉아서 인사해요. 그런 차이를 느꼈어요.
한국에 도착한 건 여름이었지만 결혼 생활은 초겨울에 시작됐다. 남편은 여전히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사 현장에서 철근 작업을 했다. 한 달에 두어 번 보은 집에 와서 며칠 쉬다 다시 떠났다.
“내가 남편이랑 결혼한 건지 시어머니랑 결혼한 건지 헷갈렸다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남편한테 한국어도 배우고, 뭐도 하고 한다는데, 와니다는 시어머니와 모든 일을 함께했다.
와니다는 결혼하자마자 첫째 아들 재관(9)이를 가졌다. 칠십이 넘은 시어머니와 스물 갓 넘은 외국인 며느리가 청주로 대전으로 병원에 다녔다. 두 사람은 의사와 간호사의 낯선 언어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 오자마자 병원에 제일 많이 다녔으니까, 뭐 서류 작성할 때 직원 도움받아야 하잖아요. 그럴 때 직접 뭐라고 하지는 않은데, 이렇게 말해요. “어휴, 내가 오늘 한국어 공부를 하네 한국어 공부를.” 이런 말만 들어도 제 입장에서는 위축되거든요. 내가 외국인이라서 죄인인 느낌.”
그렇다고 병원에 안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2년 뒤 둘째인 딸 민영(7)이를 낳으면서, 와니다는 수 년간 병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게 된다.
민영이가 태어난 지 한 달쯤 지났을 때, 아이의 숨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임신했을 때 아이 배에 가스가 많이 차 있다던 기억이 났다. 와니다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큰 병원으로 향했다.
아이 심장에
구멍이 뚫렸네요
와니다는 믿을 수가 없었다. 멀쩡히 살아 있는 아이 심장에 구멍이 뚫렸다니, 그런데 의사는 그건 오히려 간단한 수술이라고 했다.
“아이 배가 둥그렇게 부풀어 있었어요. 뱃속에 있을 때는 그냥 가스가 찬 건 줄 알았는데, 대장이 좁아서 변이 못 빠져나오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대장 넓히는 수술도 했어요. 거의 일 년 가까이 갓난아기 배에 대변 주머니 매달아서 키웠어요. 아이가 자기 몸도 아픈데 습기 차고 냄새도 나니까 짜증이 나는 거예요.”
둘째가 괜찮아지자 첫째가 문제였다. 아들은 밤에 누워서 자다가도 기도가 막혀 숨을 못 쉬었다. 여섯 살 어린애가 참다못해 앉아서 꾸벅꾸벅 졸았다. 남들보다 편도선이 길어서 그렇다고 했다. 와니다는 어린 자식들을 몇 번이나 수술시켜야 했다.
“그냥 다 필요 없고 건강하기만 하면 돼요, 진짜. 제가 애들한테 바라는 거 그거 딱 하나예요.”
아이들은 언제 아팠냐는 듯 건강하게 잘 지낸다. 가끔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을 때면 딸은 울지도 않고 주삿바늘을 멀뚱멀뚱 쳐다본다. 얼마나 지겹게 겪은 일이었으면 그럴까 싶어 와니다는 마음이 쓰리다.
고추잠자리가 하늘을 빙빙 돌던 어느 가을 낮, 와니다가 잠자리를 잡기를 딸 민영이가 기다리고 있다. ⓒ김성인
엄마는 왜 한국인 아니야?
“엄마, 엄마는 왜 한국 사람이 아니야? 태국에서 온 거야? 왜 온 거야?”
태국에서 온 대한민국 1% 엄마
대한민국 인구 5천만 중 0.5%도 안 되는 결혼이주여성들, 와니다 상시랏(31)은 그중에서도 1%인 태국 출신이다(국내에 거주하는 결혼이주여성은 2015년 현재 238,161명이다). 보은군에는 와니다를 비롯해 태국 출신 결혼이주여성 4명이 살고 있다.
아들은 엄마의 정체성에 관해 물을 만큼 컸다. 와니다는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엄마의 모국에 대해 알려주고 싶다. 하지만 태국어를 가르쳐주려고 하면 아들은 싫은 티를 낸다.
“여기 한국이니까 한국말 해. 태국 가서 태국말 하고.”
“제일 아까워요, 애들한테 태국 말 못 가르쳐주는 게. 그런데 나 혼자 태국말 하기가 참 모양새가 이상해요. 엄마 나라 말 할 수 있는 애들 보면 부러워요.”
태국 말은 낯설어하면서도 아들은 태국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다.
“아이들은 보면 자기들끼리 잘 놀아요.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많기도 하니까, "니네 엄마 외국인이지?" 해봤자 얘네 엄마도 쟤네 엄마도 다 외국인이니까요. 그런데 엄마들은 안 그렇죠. 아들 학교에서 학부모 모임 하면 다문화가정 엄마들은 거의 안 나와요. 저만 나가고 다들 한국인이에요.”
와니다는 집 마당에 태국에서 먹는 '야드 긴 콩'을 길러 먹는다. ⓒ김성인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이주를 꿈꾸는 사람들
어릴 적 와니다의 고향에는 외국으로 돈 벌러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동네에서 누구네 아들이 한국으로 돈 벌러 갔다고 하면 곧 트럭을 사고 이층집이 올라갔다. 친구 엄마아빠가 외국에 갔다 오면 친구의 인생이 달라졌다.
“어릴 때 그런 걸 보니까, '우리 엄마아빠도 외국 가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와니다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10년 전 한국행을 택한 것처럼, 와니다의 여동생도 한국으로 오고 싶어 했다. 태국에서 결혼해 아이 둘을 키우느라 바쁜 여동생 대신, 남편이 한국행을 준비하고 있다. 금속 인테리어 일을 하는 여동생 남편이 시험을 잘 보면 한국에서 노동자로 살아갈지도 모른다.
실은 와니다의 아버지도 젊은 시절 외국을 지긋지긋하게 떠돌았다. 그러다 결혼 후 고향으로 돌아가 젖소를 먹이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오라는 와니다 말에 아버지는 고향에서 자기 사업 하면서 편히 일하는 게 소원이라며 손사래를 친다.
부모 세대의 꿈은 자식 세대로 이어졌다. 큰딸은 한국으로 시집가고, 둘째 사위는 돈 벌러 한국으로 갈 생각이다. 와니다의 가족들처럼 동남아시아, 아니 더 먼 곳의 사람들이 미래를 위해 오늘도 이주를 꿈꾼다.
며느리 사오는 매매혼?
십수 년 전 국제결혼 붐이 일기 시작할 때, 동네 사람들은 “며느리 어서 사 왔네”하는 말을 쉽게 했다.
실제로 국제결혼정보업체를 통해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 신부를 맞을 때, 신랑은 업체에 돈 천만 원은 주어야 한다. 그러나 신부의 친정에서 받는 돈은 고작 몇십만 원에 불과하다. 결혼식 때 입을 멀끔한 옷을 살 예단비 정도다.
보은군에 사는 결혼이주여성들을 만나 보면 “며느리 사왔다”는 말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매매혼’이라는 말에는 ‘돈에 팔려온 외국인 여성’이라는 뉘앙스가 강하게 깃들어 있다.
“친정엄마가 진짜 힘들 때는 그런 얘기도 해요. 누구 집 딸내미는 외국 가서 부모님 도와준다는데, 너는 어째 그러느냐고.”
와니다가 처음 한국행을 결심했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다.
“한국은 잘 사는 나라고, 내가 가서 부모님 도와드리면 편하게 살 수 있으실 거로 생각했어요. 근데 직접 와서 직접 살아보니까, 생활이 태국에서 살던 거랑 비슷해요. 돈 벌면 바로 다 나가요. 이 돈을 태국에 가져가면 물론 큰돈이지만, 나는 여기서 우리 가족들이랑 계속 살 거고, 또 남편이 얼마나 힘들게 버는 돈인지 아니까.”
와니다는 태국에 있는 가족들을 부양하는 큰딸 역할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한국에 또 하나의 가족이 생긴 것만으로도 기쁘다고 한다.
2010년엔 가족들이 함께 태국에 다녀왔다. 한국에서 못 올린 결혼식을 늦으나마 태국에서 올렸다. 아들 재관(당시 3)이, 시어머니, 큰 시누 식구들과 함께 갔다.
2008년 한국에서 결혼한 와니다는 2010년 태국에 가서 늦은 결혼식을 올렸다. 하얀 꽃으로 만든 화관을 나눠 쓴 사람이 와니다와 남편 염기용(47)이다. 세 살 된 아들 재관이도 함께했다. ⓒ와니다
시어머니는 처음 가는 해외여행이었다.
“음식도 그렇지(입에 안 맞지), 말도 안 통하고 하니께 뭐라고 지껄일 수가 있어야지. 사돈끼리 얼마나 좋아. 우리는 여기서 사돈 만나면 밤새도록 이야기하느라고 잠을 못 자잖아. 그런데 거기(태국) 가서는 말이 안 통하니까 답답하지.”
사돈하고 정답게 얘기 나눌 수 있으면 좋았으련만, 시어머니는 그거 하나 아쉽다. 그래도 며느리 덕에 난생처음 해외여행도 가고 신기한 일이 많다.
“나는 테레비 보면 만날 그런 거만 봐요. 다문화가정 나오는 거 보면 재밌어. 어떤 집 시어머니는 며느리 친정까지 따라가서 막 살 찐다고 못 먹게 하는 거유. 벤또를 가져가서는 요만큼만 먹으라고.”
와니다가 차린 밥상엔 태국식 메뉴가 오르기도 한다. 태국 향신료가 다 떨어져 잡채 양념으로 대신한 태국식 볶음국수가 갈치조림, 마늘종, 오이지, 지고추, 고추부각무침 옆에 나란히 놓였다. ⓒ김성인
올해 12월, 와니다의 가족은 보은군에서 운영하는 친정방문사업에 선정되어 태국을 방문한다. 80을 앞둔 노모는 “집 밖에 나가는 것도 힘든데 어디 태국까지 갔다 오냐” 하신다.
시어머니가 본 태국을 두 아이에게 보여주고 돌아오면, 시어머니가 그랬듯 아이들도 엄마 와니다를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터다. 4년 만의 친정 방문을 이 가족이 목 빠지게 기다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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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9.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