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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인간극장 Apr 02. 2020

8화. 필리피나, 보은군 대표해 춤추다

https://www.youtube.com/watch?v=AsAYxPSvu2w

다큐멘터리 <완 투 쓰리 포> (2017) 

줄거리
한국에서도 가장 깊은 골짜기에 사는 필리핀 출신 결혼이주여성 다섯 명이 모였다. '괴산 다문화 페스티벌'에 보은군 대표팀으로 참가하는 그들은 단 6분의 무대를 위해 한 달 넘게 진땀을 흘렸다. 한국의 필리피나들이 고향을 기억하는 특별한 방식을 따라가 본다.

출연
알린 이 올란데즈, 알마 라모스, 토마스 로즈안, 바가위 마제린, 루피노 레네네스 외

연출
김성인, 이정진


바깥은 여름이었고, 가을이었다. 매미 소리를 등지고 하늘을 바라보면, 머리 위에서 고추잠자리가 빙빙 돌았다.


여름의 끝, 가을의 시작


연중 가장 바쁠 농사철인 8월, 충북 보은군에 사는 필리핀 출신 결혼이주여성 다섯 명이 한데 모였다. 알린 이 올란데즈(45), 알마 라모스(33), 토마스 로즈안(32), 바가위 마제린(39), 루피노 레네네스(43)가 이들이다.


이들은 지난 9월 2일 충북 괴산군에서 열린 ‘2017괴산고추축제’ 일부인 ‘다문화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팀명은 ‘엑소더스(Exodus)’, 단 6분 동안의 무대를 위해, 한 달이 넘도록 준비했다.


"다문화센터에서 전화가 온 거예요. 다문화 춤 대회 나가라고요, 보은군 대표로. 왜냐면 제가 베테랑이거든요. 노래대회 나가서 상금도 받고, 트로피도 받고.."


제가 베테랑이거든요


맏언니 알린은 팀의 리더이자 유일한 경연대회 경험자다. 2003년에 한국으로 시집온 후, 크고 작은 노래자랑에 나가서 수상했다. 알린의 굴곡진 삶(‘가장 작은 지구, 보은’ 제1화 참고)과 빼어난 노래 실력이 알려지자, 알린에게 노래경연대회는 연례행사가 됐다.  


알린 이 올란데즈가 '다문화 페스티벌' 때 노래할 솔로곡을 연습하고 있다. ⓒ김성인


알린 이 올란데즈는 15 년 한국 생활 동안 많은 상을 받았다. 그중엔 노래경연대회에서 받은 트로피와 상패도 있다. ⓒ김성인


알린의 일주일은 바쁘게 돌아간다. 평일에는 보은읍에 있는 베개공장에 다니고, 출퇴근 앞뒤로 동네에서 농사를 짓는다. 주말엔 회남면 집에서 마로면 교회까지 한 시간을 더 간다. 알린은 그의 연두색 경차를 몰고 보은을 누빈다.


바쁜 나날에 춤 연습이 추가됐다. 예년 나가던 노래대회야 혼자 준비하면 그만이었지만, 댄스대회니만큼 함께 무대를 꾸밀 멤버가 필요했다. 알린은 보은에 사는 필리핀 출신 결혼이주여성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2017년 현재 보은군에 거주하는 결혼이주여성은 300명이다. 이중 필리핀에서 온 결혼이주여성은 23명이다. 베트남과 중국 다음으로 많은 숫자다. 알린은 이 23인 안에서 팀을 꾸려야 했다.


경연대회 참가에 적극적이었던 건 로즈안이다. 로즈안은 무대에 필요한 필리핀 전통 의상을 담당했다. 국내 온라인쇼핑몰을 뒤져 소품을 준비하고, 진짜 필리핀 스타일을 선보이기 위해 의상은 필리핀 현지 업체에서 주문해 받았다.


마제린과 레네네스가 뒤이어 합류했다. 두 사람은 로즈안네 아로니아 농장에 모여 낮에는 아로니아를 땄다. 알린이 퇴근하고 오면 로즈안네 집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농장에서 함께 일하던 알마는 친구들의 권유에도 손사래를 쳤다. 무대에 서기가 쑥스럽다며 며칠이고 옆에서 연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옷이 도착한 날, 알마가 장난삼아 옷을 입어봤다. 흰색 레이스 상의에 긴 하늘색 치마를 입으니 다른 사람 같았다.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었다. SNS 프로필사진을 바꾸자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다.


“알마, 너무 예쁘다. 무슨 대회 나가?”
“그냥 한 번 입어 본 거예요.”
"세상에, 축제 안 나가기 아까운걸? 친구들이랑 같이 해 봐~."


대회가 얼마 남지 않은 8월 중순, 알마가 마지막으로 함께하게 됐다.  


알마 라모스가 필리핀 전통 복식인 무대 의상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성인


엑소더스 팀 멤버들이 서로의 손에 금색 리본을 매 주고 있다. ⓒ김성인


로즈안이 손을 장식한 금색 리본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김성인


엑소더스 팀의 첫 번째 경연곡 'Subli music'의 한 춤동작. 음악 말미에 다섯 멤버들이 치맛자락을 들어 한데 모으고는 원을 그리며 빙빙 돈다. ⓒ김성인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의 통계에 따르면 2016년 한 해 동안 개최된 지역축제는 모두 751개다. 축제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다문화’는 빠지지 않는 키워드다. 알린은 이날, 다른 축제에서 만났던 공연팀을 여럿 만났다. 다들 알린처럼 베테랑이다.


반면 알린을 제외한 4명 멤버들은 이런 대회가 처음이었다. 한 팀당 주어진 시간은 6분, 엑소더스 팀은 댄스와 보컬 총 두 개의 무대를 구성했다.


첫 번째로 준비한 음악은 필리핀의 포크 댄스곡 'Subli Music'이다. 'subli'는 타갈로그어로 자세가 구부정한 모습을 뜻한다. 춤을 추는 남자 댄서의 자세에서 비롯됐다. 남녀가 짝을 이루어 춤추는 경우가 많지만, 엑소더스 멤버들은 음악에 맞춰 여성 5인조 댄스를 구성했다.


두 번째 음악은 필리핀 가수 레히네 벨라스케스가 부른 팝송 'Isang Lahi'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내용을 담은 이 노래를 알린이 독창한다. 알린이 이 노래를 고른 특별한 이유가 있다.


"필리핀에는 착한 사람도 많고 나쁜 사람도 많고, 마찬가지예요. 모든 나라 다 똑같애요. 나쁜 사람 만나지 말고, 우리 필리핀 나쁜 (나라라고) 생각 하지 마세요. 나쁜 사람보다 착한 사람이 많아요. 우리나라 놀러오면 우리는 respect(존경) 많이 해요. 놀러오세요."
가장 한국적인,
가장 필리핀다운


"한국에서 남의 나라말을 왜 써!"
"매운 음식 먹을 줄 알아야 한국인이지."


이 땅을 밟은 외국인들에겐 최대한 '한국 사람다울 것'이 은연중 요구된다. 이주민이라면 특히, 과거 오랜 시간 자신이 축적한 문화는 지우고 뭐든지 한국식을 받아들이라는 압박이 가해진다.


이들이 고향 문화를 복원하는 순간이 있다. 무대 위에서다. 몽골어로 된 노래를 부르고, 붉은 치파오를 입어도 마냥 환호성만 듣는다. 알린을 비롯한 엑소더스 멤버들에겐 일상에서 벗어난 무대만이 가장 필리핀 사람다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알마의 딸 은지(9)가 알마의 옷 단추를 잠그고 있다. ⓒ김성인


마제린의 딸 유미(15)가 마제린의 웃옷 단추를 잠그고 있다. ⓒ김성인


마제린은 삼남매의 엄마다. 대회 전날 밤 마지막 연습 때도 막내 유나(2)를 안은 채로 춤을 췄다. ⓒ김성인


댄스 대회 당일, 엑소더스 팀의 딸들은 전부 엄마를 따라 나섰다. 로즈안의 딸 나영이(7)가 대기실에서 로즈안 품에 안긴 채 잠들었다. ⓒ김성인


“시골에서 바빠 죽겠는데, 이거 왜 하는 거예요?”


처음에 이들을 취재할 때, 작별 인사를 나누고 뒤돌아서면 늘 미처 묻지 못 해 맴도는 질문이 있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열심이지?'


이들과 함께 여름을 보내면서 물음은 자연스레 해결됐다. 필리핀 사람들이 춤과 노래를 좋아해서, 필리핀 문화를 한국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상금과 성취감을 얻기 위해, 평소엔 할 엄두도 못 내는 화장에 화려한 의상을 입고 가장 예뻐지는 순간이니까,... 답은 이들 전부였다. 수많은 이유와 까닭이 모여 이들을 무대로 올렸다. 생업도 공연도 이들에겐 잘하고 싶은 일이자 해야만 하는 일이다.


Philippine,
the land of LOVE!


9월 2일 오후 두 시, 괴산으로 출발하기 위해, 다문화센터 계단을 내려가며 레네네스가 혼잣말을 했다. "사랑의 땅, 필리핀", 무대 위에서 할 멘트를 준비하는 듯 여러 번 되뇌었다.


"알린, 우리 팀 1등 하면 술 한 잔 해야지?"


긴장과 설렘이 절반씩 공기를 채운 차 안은 원정 경기를 떠나는 유소년 체육부의 버스 안 풍경 같았다. 운전대를 잡은 보은군다문화가족지원센터 박달환 소장이 분위기를 풀려는 듯 말했다. 알린은 쾌활한 목소리로 답했다. 


"술 한 잔! 이따 보은 도착하면요~"


보은군 엑소더스 팀,
입장!  


대회 당일 오전, 알마는 로즈안에게, 레네네스는 알린에게 메이크업을 받고 있다. ⓒ김성인


대회 당일, 행사장 대기실에서 마제린이 알린에게 아이라인을 그려주고 있다. ⓒ김성인


대회 일주일 전, 보은군의 한 공원에서 열린 야외 리허설에서 엑소더스 팀이 무대에 입장하는 부분을 연습하고 있다. ⓒ김성인


대회 당일, "참가 번호 2번" 호명을 들은 엑소더스 팀이 서둘러 무대에 오르고 있다. ⓒ김성인


레네네스의 혼잣말은 전해지지 않았다. 다섯이 무대에 올라 자리를 잡기도 전에 음악이 시작됐고, 엑소더스 팀은 엉거주춤 춤을 시작했다. 알린이 준비한 힘찬 팀소개도 흐지부지됐다. 엑소더스 팀은 참가상과 상금 30만 원을 받았다. 술 약속은 다음으로 미뤄졌다.


"엑소더스는 무슨 뜻이냐면요, 우리 자유롭게 어디 가고 싶으면 가고, 그냥... 새처럼? 어디 날아가고 싶으면 날아가고, 어디서 멈추고 싶으면 멈추고. 다음에 또 다른 나무 가고 싶으면 또 가고. 자유롭게요."


환대할 이유


김현경 작가가 쓴 책 <사람, 장소, 환대>에서는 환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 장소, 그리고 환대 세 개념은 맞물려서 서로를 지탱한다.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이다.    

김현경 작가가 쓴 책 <사람, 장소, 환대>의 프롤로그 중 일부


세계화의 물결은 멀리 필리핀에서 태어난 여성들을 바다 너머 대한민국에 데려다 놓았다. 그들은 우리 땅 가장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땅을 일구고 자식을 키운다. 


알린과 마제린은 큰딸이 벌써 중학생이다. 90년대 초반 일본에서 온 이주여성들을 취재했을 땐, 그들 중 대부분이 일본에서 산 시간보다 한국에서 산 시간이 길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공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한국은, 보은은 그들 삶의 터전이다. 그러나 때로는, 외모나 이름, 말투에서 '티'가 난다는 이유로 단번에 외국인 취급을 받는다. 결혼이주여성들의 삶은 '자리'를 얻기 위한, 아니, 바로 여기가 자신의 자리임을 늘 증명해야 하는 투쟁 그 자체다. 


무대에서 내려오며 뜨거웠던 여름을 보내주었다. 괴산에서 보은으로 돌아오는 길, 밤공기가 선선했다.


이들이 다시 무대에 오를 날이 머지 않았다. 다음 달 13일, 가을의 한가운데 '보은군 대추 축제'가 기다리고 있다. 이번엔 결코 질 수 없는 홈 경기다. 팀 엑소더스는 벌써 준비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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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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