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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인간극장 Nov 16. 2016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다

늦은 일기


  

외할머니가 운반되어 나왔다. 오래된 보석함을 옮기듯 요양보호사 두 분의 손에 받쳐져 어둔 방에서 꺼내졌다. 엄마의 몸이 순간 굳는 게 느껴졌다. 마른 새우처럼 웅크린 채 입을 뻥긋거리는 할머니는 마치 양수에 싸인 태아 같았다. 그 광경은 내게 처음 겪어보는 종류의 당혹스러움을 안겼다. 엄마는 당신의 엄마를 몇 번이고 불렀지만 할머니는 큰딸만 찾았다. 눈동자는 진작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오십 년 전, 두 돌 된 큰딸이 죽기 전으로.     


할머니에게 치매가 찾아온 건 외할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신 직후였다. 처음엔 그저 충격으로 인한 심신 미약이겠거니 했다. 할머니는 날로 사위어 갔다. 외삼촌들은 동네 의원에서 시내 종합병원으로, 다시 대학병원으로 할머니를 모셔 갔다. 알츠하이머, 익숙하고도 생경한 다섯 글자가 최종 진단이었다. 전두엽 기능이 빠르게 손상되고 있다고 했다. 가까운 기억은 이미 사라졌고 사물들을 구별하는 기본적인 인지 기능에도 문제가 있었다. 엄마가 할머니를 모시기로 하고부터, 나와 여동생이 함께 쓰는 방에서 할머니와의 어색한 동거가 시작됐다.     


몇 주만에 파악한 할머니의 일과는 다음과 같았다. 새벽 네 시께 일어나 부엌에서 밥을 짓는다. 문제는 흰쌀이 무언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바싹 마른 검정콩이나 식혜 만들려고 얻어 둔 쌀겨에 물을 가득 부어 한 솥 안치고는 바닥이 새까맣게 타는 냄새가 날 때까지 놔둔다. 그러는 동안 마른 식물이라면 뭐든 박박 씻어 국을 끓인다. 어떤 날은 소태요 어떤 날은 맹탕이다. 그렇게 부지런을 떨다 보면 동이 튼다. 우리 아빤 할머니에게 모르는 남정네였기 때문에 만만한 나와 동생-역시 누군지 알아보지는 못했지만-에게 와서 아침 먹으라고 깨운다. 그러다 답이 없으니 막 미명이 들기 시작한 방 한 구석에 앉아 멍하니 바라본다. 이른 아침, 할머니의 시선에 화들짝 놀라 깬 게 여러 날이다.     


할머니는 종일 쉬는 법이 없었다. 아침에 동네 회관에 할머니를 맡기듯 데려다 놓으면 금세 사라져 버렸다. 다행히 고작해야 읍내였기에 찾기 어렵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냇가 둑이나 남의 논밭에서 돌을 고르거나 풀을 뜯고 있었다. 나나 동생이 집에 가자고 팔을 잡아끌면 모르는 사람이 잡아간다는 듯 겁을 먹었다. 누에 먹어야 하는데, 풀죽 쒀야 하는데 하는 소리를 염불처럼 외웠다. 고집이 세지고 길을 자주 잃었다. 할머니는 몸도 마음도 낯선 동네로 막 시집온 저 옛날로 돌아가 있었다.     


1 년 만에 엄마가 KO를 선언했다. 텅 빈 눈을 감당하지 못 했다. 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한 시간 거리의 요양 보호소로 옮겨졌다. 엄마는 주말마다 할머니한테 다녀오자고 했고, 나는 그때마다 핑계를 대며 엄마를 홀로 보냈다. 우리 가족은 다섯이나 되는데, 엄마는 늘 작은 외삼촌을 불러 할머니를 만나러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외면'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아빠도 나도, 내 동생들도.     


그러고 6개월 만의 방문이었다. 대청호 근처 산 중턱에 자리한 곳이었다. 조용하고 묵직한, 포근하면서도 건조한 공기에 둘러싸인 병원은 거의 진공 상태처럼 보였다. 시간이 멈춘 듯한 그곳에서 할머니가 꺼내졌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을 거꾸로 돌린 것처럼 그녀는 80노인에서 다시 태아의 상태로 쪼그라들었다. 그렇게 내 눈앞에서, 내 엄마의 엄마가, 두 세대 전의 여자의 일생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할머니를 보내고 엄마가 달라졌다. 방 안에 덩그러니 앉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엄마, 엄마'만 반복했다. 액정이 다 닳도록 화면 속 사진을 쓰다듬었다. 울다 삼키고, 또 울다 삼켰다. 하루에 한 달씩 지쳐갔다. 새까맣던 머리가 금세 새고 곱던 피부에 주름이 패었다. 나는 그냥 모르는 척하는 게 나은 거라고, 엄마에게도 시간이 필요한 거라고 단정했다. 그리고 그건 내 편한 대로 생각한 것뿐이었다. 조용히 무거운 거실 공기 중에 엄마의 외침이 파문을 일으켰다.

"나도 우리 엄마 보고 싶거든!"


심장을 토해 내듯, 엄마가 소리쳤다. 그 한마디에 세상의 모든 슬픔과 원망의 감정이 함께 쏟아져 나왔다. 매일 홀로 끅끅 울던 엄마는 나를 붙잡고, 어디도 가지 말라는 듯 붙잡고선 엉엉 울음을 놓았다.      


내게 엄마가 있듯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었다. TV 드라마 속 주인공의 눈물에는 내 일인 양 따라 울면서, 정작 나의 엄마 앞에선 방문을 닫아버렸다. 할머니와 함께 한 1년 동안도, 할머니가 떠나고 나서도 나는 말 그대로 무정했다. 실은 엄마가 없으면 나는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은데, 엄마에게도 그런 엄마가 있다는 걸 왜 그땐 몰랐을까.     


누군가 인터넷에 올려놓은 글을 보았다. 여러 가지 삶의 '꿀팁' 중에 '엄마 목소리 녹음해 놓기'가 있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엄마가 떠나고 나면 결국엔 엄마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는 날이 온다고. 그러니 평생 후회하기 전에 꼭 남겨 놓으라고. 수화기를 든다. 염색 좀 하라고, 뱃살 나오니까 밤에 아이스크림 먹지 말라고 잔소리하는 건 내 쪽이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녹음을 안 했다는 걸 깨닫는다. 이런 일이 벌써 몇 년 째다. 엄마가 떠날 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게 겁 나기 때문일 거다. 그런 일은 정말 나중에 생각하고 싶다. 아마 당분간은 녹음 버튼을 누르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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