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선생에게 배운 지혜는 영원히 가슴에 새길 것들이야. 목수에게 집을 그려달라고 한, 일화는 유명하지. 집을 그리면 으레 지붕부터 그리기 마련이지만, 목수는 집의 기초부터 그렸다는 이야기야. 이 일화에도 ‘공부는 머리 깨기’라는 배움을 얻을 수 있어. 직접 노동하는 자만이, 세상의 순리에 다가가는 법이니까.
우린 쉽게 배움이나 공부를 이야기하지만, 진짜 공부란 어디에 있는 걸까? 나도 나이 어린 친구들을 ‘학생’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지만, 막상 자신 있게 대답은 못 할 거 같아. 다만 내가 알아낸 건, 배움이란 삶의 과정 그 자체라는 거 정도지.
‘공부는 머리 깨기’를 좋아하면서, ‘배움은 삶’이란 것도 받아들이면, 좀 이상한 거야. 삼단 논법을 좀 흉내 내면, 삶이란 머리 깨기의 연속이라는 건데, 꼭 그렇진 않은 것 같거든. 물론 삶이란 변화의 연속이지만, 모두가 변혁가처럼 대담하진 않아. 오히려 그런 식으로 피곤하게 사는 사람은, 극소수 중에도 극소수야.
정말 문제는, 둘 다 맞는 말이란 거야. 공부란 삶이지만, 동시에 상식을 깨부수고, 재구성하는 과정이야. 결국 각각의 주장에서, 공부가 포함하는 범위를 다르게 생각해야 하는데, 영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난 아직은 이걸 수수께끼로 남겨둘 생각이야. 공부라는 걸 특수한 무언가로 결론짓는 건, 도저히 성에 안 차기 때문이지. 물론 이거야말로 깨부숴야 하는 고정관념일 수도 있지만, 양보하기 싫은 영역이 있는 법이니까.
여전히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공부는 특별한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해. 다만, 사람마다 진지하게 생각하는 정도가 다른 거라고, 일단은 생각하고 있어. 중요한 삶의 계기에서, 누구나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변화하기 마련이야. 설령 그게 더욱 예전처럼 행동하는 것이라도, 그 행동에 더 단단한 결의를 보이는 변화가 있는 거니까.
중요한 건, 변화의 이유가 아닐까? 그 대부분은 생존일 거고, 누군가는 스스로 정한 기준이거나, 남에게 강요받은 걸지도 몰라. 설령 비슷한 정도의 계기에 따라 변화가 필요해도, 각자가 변하는 정도는 확연하게 다르더라고. 아마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각자의 정도와 이유가 다르기 때문일 거야.
그런 의미에서 공부는, 삶 그 자체인 동시에 머리를 깨는 노력이란 걸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누구나 경험과 계기를 통해 공부라는 삶을 쌓아가는, 계속 깨부수고 재구성하는 과정의 연속이야. 다만, 그 강도에 따라 평범한 일상의 경험이거나, 도끼로 머리를 깨버릴 정도의 충격일 때가 있는 거지. 지식의 고통에 정통한 사람과 머리 아픈 건 질색인 사람은 사실, 난이도만 다르게 같은 일을 하는 거야. 그 무엇도 특출 나거나, 특별하지 않아.
아, 이 글을 끝내려는 와중에 생각난 건데, 어쩌면 이 문제를 해결한 거 같아. 내가 이 책의 첫 번째 순서에서, ‘무한 무성생식’이라는 개념을 설명했단 말이지. 구구절절 말을 길게 했지만, ‘무한 무성생식’은 쉽게 말해서, 모든 것은 언제나 변화하는 상태에 있다는 말이야.
이걸 ‘공부는 머리 깨기’, ‘삶은 공부의 연속’과 합해 보자. 공부하면서 깨어지고 넓어지는 지식과 지혜의 영역이란, 우리의 사고가 변화하는 과정이야. 그 변화는 곧, 삶을 거대하게 구성하는 틀이 되는 거지! 이거 생각보다 쉬운 문제였구나! 그 무엇도 특출 나거나, 특별하지 않아. 모두가 언제나 변화하고 있는 거야!